제 44화
훈련훈련!
소원의 탑에서 돌아온 후 이틀은 내리 푹 쉬었다.
잠이라면 버려진 묘지에서도 실컷 잤지만, 그래도 길드 아지트에서 빈둥거리고 있자면 잠이 솔솔 쏟아졌다.
그렇게 잠만 자다보니 어쩐지 죄책감이 느껴져서 베개 밑에 『몽중부적』을 깔았다.
꿈속에서 훈련이라도 하면 좀 죄책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어, 길마! 안녕하세요!”
“좋은! 밤입니다!”
꿈속의 훈련장에는 이연채와 박정하가 이미 와 있었다.
“이틀 푹 쉬시라니까. 왜 벌써 나오셨어요?”
“그냥... 이 몽중부적이란 거 한 번 써보고 싶어서요. 신기하잖아요.”
이연채는 멋쩍게 웃고는 물었다.
“그런데 비비 선배랑은요? 길마랑 같이 안 오셨어요?”
“비비야 지금 훈련장에서 훈련해도 거의 효율이 안 나오거든요. 셀파도 그렇고.”
같은 이유에서 신수련도 안 나온 게 아닐까 싶다.
그녀는 C급 마법사니까, 적어도 초급 훈련실을 중급 훈련실로 업그레이드한 후에야 어느 정도 성장 효율을 뽑아낼 수 있겠지.
“저 왔어요!”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신수련이 뿅하고 나타났다.
“으잉? 수련 씨는 왜 왔어요?”
“안 오면 나중에 대표님이 눈치 주실 거 같아서...”
나는 말없이 신수련을 노려보았다.
신수련은 자기 어깨를 앞으로 감싸 안았다.
“꺅! 투시안이다!”
“안 쓴다고요!”
우리가 의미 없이 툭탁거리는 사이에 박정하와 이연채는 벌써 훈련을 시작했다.
허수아비를 상대로 방패를 찍고 화살을 날리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신수련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실은 좀 부족함을 느껴서 온 거예요. 저도 그렇고, 아마 정하 선배님이나 연채 선배님도 그럴 걸요.”
“부족함이요?”
“한계라고 할까... 사실 소원의 탑에서 저희들은 대표님 발목을 잡기만 했잖아요?”
나는 딱히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호롱불 아귀의 미로에서도, 거인 주방장의 부엌에서도, 그리고 버려진 묘지와 영광의 대분묘에서도 일곱 명이 모두 각자의 역할을 다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수련이나 이연채, 박정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박정하는 묘지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해서 장비비와 포지션을 바꿨고, 신수련은 하마터면 묘지기의 대낫에 썰릴 뻔 했지.
이연채는 아예 자격지심의 악몽을 꾸었다.
길드원들이 발목을 잡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소원의 탑을 더 오르기 전에 길드원들을 파워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잘 해왔다고 해도 그 위로 올라갈수록 소원의 탑에서 내리는 시련은 더 거칠어질 테니까.
“대표님만큼 간절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소원의 탑에 오르고 싶어요. 약속해주셨잖아요? 부와 명예! 그리고 얄미운 신경애 씨한테 한 방!”
신수련은 주먹을 슉슉 휘둘렀다. 여전히 엄마한테 원한이 많은 듯 했다.
"저야 그렇다 치고. 정하 선배님은 유서준zl존 길드를 자기 손으로 재건하고 싶다고 했고, 연채 선배님은 사라진 언니를 찾고 싶다고 했죠? 다 각자의 이유로 소원의 탑을 오르고자 하는 거니까... 이렇게 힘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소원의 탑을 오르기 위해서 우리 모두의 뜻이 하나로 모였다는 의미니까.
"그래도 꿈에서까지 여러분들을 동원하는 건 사실이니까, 몽중훈련에 참여하면 그 시간 분은 특근수당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대표님! 으흐... 매일 꿈 속에서 훈련한다 치면 월급이 두 배니까... 뭐부터 살까..."
"수련 씨는 빚부터 갚을 생각해요."
"가, 갚을 거예요!"
신수련은 곧 완드를 휘두르며 훈련에 참가했고, 나도 그녀의 뒤를 이었다.
【오늘의 훈련 종료!】
[헌터 유서준의 종합 능력치가 미미하게 증가했습니다.]
[헌터 박정하의 종합 능력치가 미미하게 증가했습니다.]
[헌터 이연채의 종합 능력치가 미미하게 증가했습니다.]
[헌터 신수련의 종합 능력치가 미세하게 증가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좀 이따 뵐게요!"
"금방! 뵙겠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인지 이연채와 장비비는 슥하고 사라졌다.
신수련도 하품을 하더니 슥 사라졌다.
그런데 다 같이 의지를 다진 것에 비해서는 효과가 영 아쉬운걸.
시지프 위셔가 몽중훈련의 효과는 길드 아지트의 훈련실 효과와 마찬가지라고 했으니까, 일단은 훈련실부터 개조에 들어가야겠다.
나는 슬슬 코가 간질간질해지는 걸 느끼며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
“에취!”
“으히히히.”
범인은 장비비였다.
장비비는 내 코를 강아지풀로 간질이다가 내가 일어나자, 옆에 있던 셀파에게 강아지풀을 억지로 넘겨주고 도망쳤다.
졸지에 강아지풀을 넘겨받은 셀파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요, 나으리. 쇤네는 말리려고 했는데...”
“알아. 비비가 말린다고 말려지겠어? 큰 비비나 유유가 말리지 않는 이상에야 쟤를 누가 말리겠어.”
나는 코를 슥 매만지고 일어났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그럼, 다들 출근하기 전에 마쳐놓는 게 좋겠지.
샤워실에서 씻고 나와 훈련실 앞으로 향했다.
장비비와 셀파가 내 뒤를 쫄쫄 따라왔다.
“형님. 뭐하게?”
“훈련실 업그레이드 할 거야.”
“오!”
초급 훈련실에는 벽 한 쪽에는 통유리 거울이, 옆면에는 사물함과 작은 창고가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목각 허수아비가 줄지어 서 있었다.
겉보기엔 썩 괜찮은 훈련실이지만, 사실 이것만으로는 큰 효과를 보긴 어려웠지.
남는 시간에 헌터들을 놀려두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중급 훈련실부터는 효과가 확 달라진다.
『중급 훈련실』
「비용 : 2,000 코인」
「설명 : 헌터가 훈련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설이 갖추어진 훈련실입니다. 훈련실 내에 교관을 배치하면 효과를 더욱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효과 : 헌터의 종합 능력치와 경험치가 약간씩 증가합니다.」
훈련실 안이 번쩍였다.
빛무리가 잦아들었을 때 훈련실은 네 배 이상으로 넓어져 있었다.
소소한 장비와 시설들이 더해졌지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목각 허수아비가 양철 허수아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양철 허수아비는 가끔 삐걱삐걱하는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이얏!”
나비를 본 고양이처럼 눈이 돌아간 장비비가 장팔사모를 휘둘렀다.
양철 허수아비는 장팔사모 창질을 당해내지 못하고 콰르릉 무너졌다.
하지만 무너져 내린 양철 고물더미는 천천히 덩어리를 지어 몸을 일으키더니,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양철 허수아비는 날 무딘 무기를 들려주면 나름대로 싸울 수도 있다.
이제 움직이는 다수의 적들과 싸우는 훈련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부속 훈련시설을 배치할 수 있습니다.]
중급 훈련실부터는 코인을 지불하고 추가적인 훈련시설을 배치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훈련시설이 있지만 당장 필요한 건 이것.
『에코의 진자』
「비용 : 1,000 코인」
「설명 :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원반 판 위에 올라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진자 추를 피하는 연습을 하는 훈련시설입니다. 움직이는 진자 추의 규칙은 일정한 시간에 따라 바뀝니다.」
「효과 : 헌터의 회피 확률이 조금씩 증가합니다.」
묘지기가 신수련을 습격했을 때, 그녀가 발을 접질려 공격을 피한 건 요행이었다.
하지만 회피 확률을 차근차근 조금씩 올려놓으면 요행을 실력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
생존기를 하나 더 벌어둔다는 측면에서도 회피 확률을 올려두는 건 꼭 필요하다.
“나으리. 쇤네가 시험삼아 써 봐도 되겠습니까요?”
“물론이야.”
셀파는 신이 나서 원반 판 위에 올라갔다.
곧, 원반 판이 동서남북으로 불규칙하게 진동하고, 그 위에 매달린 묵직한 진자 추가 살벌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하지만 셀파는 짤막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쉽사리 진자 추를 피해냈다.
공격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짐꾼은 회피와 특수능력에 능력치를 몰빵했으니까.
이 정도야 셀파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거다. 반쯤은 놀이기구 타는 기분이겠지.
어쨌거나 장비비도 셀파도 꾸며놓은 훈련실에서 열심히 뛰노는 걸 보니 뿌듯해진다.
이제 꿈에서도 길드 아지트의 훈련실 효과를 그대로 적용받는 『몽중부적』을 통해 종합 능력치와 경험치를 두 배로 복사할 수 있겠지.
소원의 탑에서 한몫 챙긴 덕에 코인도 여유가 생겼으니까 훈련교관 영입 건도 알아봐야겠다.
아침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곧 신수련이 하품을 하며 나와서 아침밥을 졸랐고, 나와 셀파는 거인 주방장의 부엌에서 배운 요리 스킬을 나란히 선보였다.
"맛있어요!"
"진짜진짜 맛있어!"
그 대신 설거지와 뒷정리는 신수련 담당이었다.
신수련이 커피사탕을 입에 물고 행주로 테이블을 빡빡 닦아낼 즈음에는 이연채와 박정하, 그리고 송서영까지 모두 출근했다.
"훈련실이 바뀌었네요!"
"훨씬! 넓어졌습니다!"
이연채와 박정하는 중급 훈련실을 바로 이용해보고 싶어했다.
다른 헌터들이 훈련실에 들어가서 훈련에 매진하는 사이, 나는 송서영에게 훈련 교관 일을 물어보았다.
"원래 우리 길드에서 훈련 교관 일을 맡아하던 사람들 중에 연락이 닿는 사람 없을까요?"
구관이 명관이기도 하고, 내 길드에서 제일 능력치가 좋은 교관들을 뽑아다 썼으니 가급적이면 원래 연이 있던 교관을 데려오고 싶었다.
송서영은 볼펜을 뱅글뱅글 돌리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길드원으로 편입시킨 훈련 교관들은 아시다시피 다른 길드원들과 같이 소원의 탑에서..."
"네. 그랬겠죠. 하지만 길드원이 아닌 초빙 훈련 교관들도 있었잖아요?"
"그 분들은 호랑 길드로 이적하셨어요. 호랑 길드에서도 영입에 꽤 필사적이었거든요."
알짜 헌터들은 전부 내 길드에 있었으니 호랑 길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보다 한층 떨어지는 헌터들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일자리를 잃은 훌륭한 교관들을 놓칠 리가 없었다는 거지.
일이 또 이렇게 돌아갔네.
나는 일단 백호랑을 만나보기로 했다.
백호랑은 은근히 우리 편의를 봐주는 편이니까, 조건만 잘 협의하면 훈련 교관 한 명쯤은 돌려줄 지도 모른다.
우선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한참 컬러링 벨소리만 나고 전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백호랑이 나를 차단한 게 아닐까 하는 이유도 없는 불안한 상상이 스멀스멀 일어날 때쯤.
간신히 전화가 이어졌다.
"여보세요?"
- 뻐끔.
그런데 핸드폰 너머에서 울린 것은 백호랑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니라 뻐끔하는 거품 소리였다.
그리고...
- 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