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헌터 타이쿤-45화 (45/52)

제 45화

백호랑의 보답

나는 택시를 타고 주변을 빙빙 돌다가 은밀하게 길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마스크를 올려 쓰고 있었지만,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은 용케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것 같아서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97층의 집무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힘내 너구리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지만, 애써 모른 척 했다.

- 띵동.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바로 복도 앞을 지키고 선 헌터들과 마주쳤다.

“유서준 길드 마스터님?”

“네.”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보여주자,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존경하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도 많은데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서요.”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정말로 죄송하지만... 카메라나 녹음기를 가지고 오시진 않으셨는지를 검사해야하는데 협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해합니다. 네. 검사해보시죠.”

헌터들은 굉장히 송구해했다.

일단의 검사를 마치고 나서, 겨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막 주술사 두 명이 나와 엇갈리듯 집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우리들로는 안 된다니까 그러시네. 저러다가 길마한테 정말 큰일 나면 어쩌려고. 주술사 길드에 연락 안 하면...”

“쉿쉿. 나가서 얘기하자.”

집무실 안에는 간이 파티션으로 가려둔 구역이 있었다.

예전에 봤던 색색의 호랑이 동상들은 모두 치운 것 같다.

노집사는 나를 보고는 노구를 일으켜 인사했다.

“급히 연락했는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도움을 요청해놓은 처지에 이것저것 까다롭게 조건을 놓은 것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백호랑 길드마스터가 쓰러졌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이 날 테니까요. 이해합니다.”

노집사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은 차원관리부에서도 아가씨의 용태를 숨길 수 있을 때까지는 숨기라는 요청이 들어온지라...”

“차원관리부에서요?”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그럴 이유가 있었다.

백호랑의 안위는 그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호랑 길드,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을 뒤흔들 수도 있는 문제니까.

왜, 재벌가 회장이 갑자기 쓰러지면 주가가 출렁이지 않던가.

백호랑은 단순히 재계 인사도 아니고 안보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니까 그녀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하면 파급력은 더 크겠지.

사실 유서준zl존 길드가 붕괴했을 때도 엄청난 후폭풍이 불었다고 한다.

나는 그 후폭풍이 잠잠해진 후에야 이 세계로 소환되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난리를 잠재운 건 결국 이인자였던 호랑 길드가 충격을 흡수해주었기 때문이라는데.

그 호랑 길드가 또 흔들린다면, 이번에는 더 커다란 파랑이 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일단은 백호랑의 상태를 살펴봐야겠지.

사실 대충은 예상이 가기는 하지만.

“우선은 백호랑 길드 마스터의 용태를 좀 확인하고 싶은데요.”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지요.”

노집사는 파티션 한쪽을 밀어서 치워주었다.

그 안에는 호화스러운 캐노피 침대가 놓여 있었다.

커튼 너머 누워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 뚥. 꽭.

하는 괴상한 울음소리도.

나는 각오를 다지고 커튼을 걷어 올렸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백호랑이 내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잠시 움찔했다.

내가 알던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가고, 백호랑은 복어 같이 빵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기를 잔뜩 불어넣은 통통한 얼굴로 백호랑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 뚥.

“아귀화...?”

호롱불아귀의 미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분명, 포만감이 0까지 떨어지면 탐식욕에 미쳐 아귀가 될 수 있다고 했었지.

- 뚥. 쀍.

백호랑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노집사는 침대 옆에 놔두었던 보리건빵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하나씩 백호랑에게 먹여주었다.

백호랑은 보리건빵을 물 없이 세 봉지나 먹고도 계속 이를 딱딱거렸다.

어마어마한 식욕이었다.

노집사는 백호랑에게 계속 건빵을 먹여주며 참담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가 소원의 탑을 4층까지 정복하고 돌아온 바로 그 날 당일.

백호랑은 마음이 급해져서 원래 며칠 후로 예정되어 있던 탐사 일정을 당겼다고 한다.

그녀 나름대로도 그렇고 길드 내부에서도 그래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내게 이런저런 정보를 얻고 호롱불아귀의 미로 지도를 필사해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미로는 소원의 탑에 진입할 때마다 구조를 바꾸었기 때문에 기껏 필사해 간 지도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도 비상식량을 많이 준비해간 덕분도 있고 호랑 길드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횃불아귀 앞까지는 다다랐다고 한다.

그리고 백호랑은 A급의 헌터인만큼 그녀도 직접 횃불아귀 레이드에 참여했다.

문제는 수인화 상태로 싸우다보니 포만감이 감당 못할 수준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는 거였다.

돌이켜보면 장비비도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포만감이 엄청 줄어들었지. 강한 헌터가 위력이 센 스킬을 쓸수록 포만감이 많이 줄어드는 구조 같다.

“다행히 무사하게 후퇴할 수는 있었지만...”

바로 탈출하지 못하고 한참 미로를 헤매면서 또 시간을 낭비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포만감이 계속 깎여나갔을 거고.

"그럼 다른 헌터들 중에서도 아귀화 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귀화까지 된 건 아가씨가 유일합니다."

"왜요?"

길드 마스터는 길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내가 길드 마스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길드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게 길드 마스터뿐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백호랑이 제일 안전하게 보호되는 게 당연할 텐데.

준비해간 비상식량이나 미로에서 얻은 불가사리도 백호랑에게 우선적으로 제공되는 게 당연할 테고.

"그게... 실은 아가씨께서 드시지 않고 길드원들에게 양보하셔서 그렇습니다."

“그걸 두고 보고만 있으셨어요?”

“면목이 없습니다.”

노집사는 착잡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내게 사과할 문제가 아니긴 한데.

길드 마스터인 백호랑이 고집을 부리면 아랫사람들로서는 딱히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겠지.

게다가 나처럼 다른 사람의 포만감 수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이건 내 추측이지만, 백호랑이 자기의 포만감 수치를 속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가사리를 양보해준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결국 이 사달이 났으니 바보 같은 짓일 수도 있겠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백호랑보다 헌터 하나가 아귀화되는 게 피해가 훨씬 적었겠지.

하지만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다른 길드원을 나 대신 희생시킬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생각은 없다.

백호랑은 그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일 테니까.

다만 그녀를 말리지 못한 노집사는 고목 같은 얼굴을 쥐어짜면서 괴로워했다.

“어떻게라도 아가씨를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요?”

다행히도, 그 질문에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노집사는 자기가 그렇게 물었으면서도 바로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건 호랑 길드의 주술사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호롱불아귀의 미로를 탈출하고 받은 보상 중에 『아귀아귀 치료제』란 게 있었지.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내 열었다.

새까만 환약에서는 말린 다시마 같은 향이 훅하고 풍겼다.

“설마, 그게...”

“네. 치료제에요. 바로 먹이면 될 겁니다. 물론 저를 믿어주신다는 전제 하에요.”

“... 먼저 부탁드린 건 이 늙은입니다. 당연히 믿지요.”

노집사는 아귀아귀 치료제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백호랑에게 먹여주었다.

백호랑은 보리건빵을 씹듯 환약을 아그작아그작 씹어 삼켰다.

변화는 곧바로 일어났다.

백호랑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걸 멈추더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 왜애앩!

하고 보리건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이런저런 정리와 청소가 끝난 후.

나는 다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창문은 모두 열려있지만 아직도 희미하게 토 냄새가 났다.

물론 나는 모른 척해주었다.

백호랑은 해쓱한 얼굴이었지만 의자에 앉을 정도의 체력은 있는 듯했다.

“유서준, 당신!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크게 빚을 졌군요! ... 콜록.”

“아직 몸이 다 회복된 게 아닐 것 같은데. 조용조용 얘기하시죠. 그게 낫지 않을까요?”

“흥! 이 백호랑이 자기 몸상태도 조절하지 못... 콜록. 그래요. 그러도록 하죠.”

백호랑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노집사는 나와 그녀 앞에 쌍화차를 내놓았다.

원래도 원기 회복에 탁월한 쌍화차지만, 【헌터헌터 타이쿤】에서는 체력과 활력을 보충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백호랑도 그걸 조금 들이키고는 상당히 편해진 듯했다.

“일단은 감사하다는 말부터 전해야겠군요. 고마워요. 이번엔 정말 당신 덕분에 살았다고 해도 좋겠죠.”

그건 사실이라서 나는 그냥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아니라며 겸양을 떠는 건 너무 비상식적이라 오히려 예의에 어긋날 테니까.

“이 백호랑은 빚을 지고 사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러니 이 빚은 반드시 갚고 말겠어요.”

“어쩐지 복수를 다짐하는 것 같은 말이네요.”

“은혜와 원한을 갚는 건 비슷하잖아요? 저는 당신에게 은혜를 갚을 때까지 장작 위에서 자며 곰쓸개를 먹겠어요.”

은혜 갚는 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니 좀 이상하잖아.

그렇지만 뭐 백호랑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녀를 편히 자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대가를 받아야겠다.

나는 원래 그녀를 만나려던 용건을 꺼냈다.

백호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 교관을 돌려 달라는 말인가요? 그 정도야 간단한 일이죠.”

백호랑은 서랍 안에서 훈련 교관 명단을 꺼내서 내밀었다.

익숙한 인명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이름.

후긴.

북유럽 신화의 주신 오딘의 큰까마귀로 유명한 전승이 있는 캐릭터였다.

세계를 날아다니며 뛰어난 전사들을 눈여겨보다가 오딘에게 그것을 귀띔해주고, 또 그들이 싸우는 걸 지켜보았다고 하지.

그 전승답게 게임 내에서도 훈련 효율을 큰 폭으로 높여주어서 언제나 영입 일순위로 꼽히는 교관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짚었다.

백호랑은 명단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까마귀 교관 말이군요. 제일 실력 있는 교관을 짚었어요.”

“안 될까요?”

“그럴 리가요. 보상으로 흥정을 할만큼 저를 구해준 은혜는 싸지 않답니다.”

백호랑은 오호호 웃다가 사례가 들려서 다시 기침을 했다.

“으흠. 집사. 후긴을 불러오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후긴은 곧바로 집무실로 불려왔다.

그는 셀파와 비슷한 정도로 큰 까마귀였다.

사람보다는 한참 작지만, 까마귀치고는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말이었다. 날개를 좌우로 펼치면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게다가 후긴은 머리 위에 딱 맞는 빨간 모자를 쓰고, 목에는 호루라기를 걸치고 있어서 더욱 만만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악!”

“안녕하세요.”

“앗. 길드 마스터... 가 아니라 전 길드 마스터도 있으셨습니까악.”

후긴은 고용주와 전 고용주가 같이 있어서 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노집사가 노련하게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후긴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물었다.

“그럼 본 교관은 다시 전 길드 마스터... 가 아니라, 길드 마스터에게로 가서 일하면 되겠습니까악?”

“네. 그래주시면 됩니다. 혹시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악. 길드 마스터를 위해 기라성 같은 헌터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했던 기억은 본 교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악.”

후긴은 음산하게 흐흐 웃었다.

벌써부터 무슨 코스로 훈련시킬지 생각하면 기뻐서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어쩐지 길드원들에게 좀 미안해졌다.

후긴의 지옥 훈련은 가끔 길드원의 만족도와 관계도를 약간 떨어뜨릴 정도로 악랄하기 그지 없었는데.

그래도 소원의 탑을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단시간에 파워업이 필요한 상황에서 후긴은 딱 알맞은 훈련 교관이었다.

사실 백호랑이 내게 빚을 지지 않았다면 후긴을 내어주는 일도 없었겠지.

그만큼 그는 괜찮은 교관이었다.

“그럼, 본 교관은 이만 먼저 내려가보겠습니다악.”

후긴은 짐을 정리하고 나를 따라오겠다며 일단 집무실을 먼저 나갔다.

나도 이만 잔을 비우고 일어나려는데, 백호랑이 나를 붙잡았다.

“잠깐. 혹시 후긴을 내어준 걸로 빚이 청산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닌가요?”

“그럴 리 있나요! 나를 구해준 보답은 그렇게 싸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백호랑은 노집사를 시켜서 약간 손때 묻은 문서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이게 뭐죠?"

"던전 통합문서에요!"

그녀가 준 보답은 던전이었다.

그것도 서울 강남의 알싸라기 땅에 있는 지하 던전.

공시지가만 ㎡당 1억 코인.

거기에 내 시선이 풀 바른 듯 딱 붙어버렸다.

"나는 바로 그 옆에 있는 강남 아카데미에 대여하고 임대료만 받고 있었지만, 당신이라면 더 유용하게 쓸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죠!"

백호랑은 우리 길드는 물론이고 길드원들의 전 재산을 합친 것보다 비싼 던전을 보답으로 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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