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화
강남 지하 던전 (1)
백호랑이 준 강남 지하 던전은 강남 아카데미 바로 옆에 있었다.
입구가 옆에 있다는 거고, 아카데미는 지상에, 던전은 지하에 있으니까 부지상으로는 꽤 겹치기도 한다.
애초에 이 금싸라기 땅에 아카데미가 들어온 것도 던전 때문이라고 한다.
한 번 게이트가 생겨서 위에 있던 건물들이 작살이 나고, 복구할 만 하니까 이번에는 던전이 생겨서 결국 못 버틴 토지 소유주들이 다 털고 나가버렸다고.
그 틈을 타 약삭빠른 학장이 아카데미를 세웠단다.
백호랑이 그보다 한 발 빠르게 던전을 불하받아서 결단의 빛이 좀 바래긴 했지만.
그래도 지하 던전을 호랑 길드로부터 임차해서 생도들의 실습에 활용하고 있다고.
“저 왔어요.”
송서영은 내게 연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길드원들을 데리고 왔다.
던전 입구를 살피는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미묘해보였다.
“백호랑이 이 던전을 증여해줬다는 거죠... 통이 크긴 하네요. 그 여자.”
송서영은 백호랑과 서로 사이가 나쁘긴 하지만 사적인 감정과 업무는 서로 다르다는 것 같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게 가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
길드 빌딩에서 짐을 챙겨 나를 따라온 까마귀 교관 후긴도 깍깍거렸다.
“백호랑 길드 마스터는 괜찮은 인물입니다악. 목소리에도 악이 살아있어서 본 교관이 아주 훌륭하게 생각하는 모범입니다악.”
“앗! 길마, 이거 뭐에요? 새로운 마스코트? 귀엽다~”
이연채는 냉큼 달려와서 빨간 캡모자를 쓴 후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수련은 어쩐지 징그럽다며 표정을 찌푸렸다.
“왜, 뭐야? 뭔데?”
뒤늦게 밴 택시에서 내린 장비비는 후긴을 보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왜 까마귀가 여기에...”
“장비비 훈련생. 본 교관은 까마귀가 아닙니다악. 큰까마귀입니다악.”
“내가 왜 훈련생이야! 너 우리 길드 나갔대매!”
“길드 마스터가 다시 초빙해주셨습니다악. 저는 다시 장비비 훈련생의 훈련 교관입니다악.”
“형님!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해줘!”
나는 슬그머니 얼굴을 돌렸다.
때마침 금발 청안의 외국인 교수가 내 쪽으로 다가와 굽실거렸다.
풍채 좋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저, 혹시 유서준 길드 마스터님 맞으십니까?”
“네. 접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신수도 훤칠하시고, 허허허.”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 교수는 내 앞에서 도통 허리를 펴질 못했다.
건물주가 갑이라면 던전주는 슈퍼갑이라서일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가 던전 문을 닫아버리고 우리 길드만 쓰게 하면 아카데미는 실습처가 끊기고 곤란해질 테니까.
물론 나로서도 이 넓은 던전을 아카데미 생도들의 도움 없이 감당하기는 힘들 테니까, 그렇게 할 이유는 없지만.
“일단은 안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 쪽으로 오시죠.”
“혀, 형님! 얘 따라오는데? 얘 가라고 해줘!”
“장비비 훈련생. 자꾸 그렇게 말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악.”
“쉭쉭! 저리 가!”
장비비는 나와 송서영을 사이에 끼고 후긴을 밀었다.
자기가 생각한 최강의 진용인가.
후긴도 좀 껄끄러웠는지 깍깍거리다가 부리를 다물었다.
이연채가 불쌍하다고 어깨에 얹어주려다가 생각보다 무거웠는지 휘청거렸다.
결국은 박정하가 한 팔에 올리는 걸로 했다.
후긴, 알아서 잘만 걷는데.
어쨌거나 우리는 지하철 입구처럼 생긴 던전 입구를 내려갔다.
안 쪽은 콘크리트로 떡칠을 해놓았다.
“가끔 뚫고 나오려는 놈들이 있어서 말이지요. 자, 저 쪽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는 멈추는 일이 워낙 많아서 위험하다고 한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 내려갔다.
옆면의 벽은 처음에는 콘크리트였다가, 서서히 흑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편마암으로 바뀌었다.
군데군데 큼지막한 구멍이 뚫린 곳도 있었는데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센서가 달려 있었다.
“저기로 몬스터들이 오가나 보죠? 그런데 왜 안 막아두고 센서만 달아놓은 겁니까?”
“워낙에 뚫는 게 특기인 녀석들이다 보니 구멍을 막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차라리 센서로 포착해서 튀어나온 놈들을 때려잡는 게 효율이 좋죠. 아, 마침 저기 나오네요.”
- 위잉위잉
센서가 빨간색 불빛을 내며 울었다.
곧, 구멍 한 군데에서 우우웅하는 소리가 나더니 드릴이 빠져나왔다.
아니. 드릴이 아니라 드릴을 뿔처럼 단 두더지였다.
나는 시험 삼아 투시안을 써보았다.
《투시안》
〈집중하여 보면 사물을 뚫어볼 수 있습니다〉
드릴 두더지의 피부 밑의 살과 혈관이 보였다. 좀 징그러웠다.
조금 더 주의를 집중해서 보니 이마에 이어진 드릴과 두개골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릴과 두개골의 재질이 비슷해 보이고, 또 몸에서 뼈가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큰 걸 봐서는 상당히 단단한 게 특징 같다.
녀석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곧장 우리 쪽으로 뛰어내렸다.
“제가 처리하지요.”
교수는 성큼성큼 달려가며 크게 외쳤다.
“투사는 설지니, 영광을 위하여! 거암과도 같이! 물러서지 않으리!”
그가 외친 건 명백히 지원가의 스킬이었다.
그런데 그가 입은 정장이 부풀어 오르는 게 멀리서도 선하게 보였다.
그는 그대로 맨손으로 달려서 드릴 두더지와 격돌했다.
그는 드릴을 돌려대는 두더지를 옆구리에 끼고서, 그대로 녀석의 목을 졸랐다.
- 깨액! 깩!
두툼한 팔에 졸리는 두더지가 조금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두더지는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교수는 오히려 더 세게 압박을 가하며 두더지를 조르고는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퍽, 퍽, 퍽.
주먹 단 세 대에 드릴 두더지는 축 늘어졌다.
“나이가 드니까 좀 힘들군요. 허허.”
외국인 교수는 두더지를 통째로 들고 돌아왔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물었다.
“아, 아직 자기소개를 안 했던가요? 이런 실례를. 저는 강남 아카데미 지원과 학과장 제니아 타카라라고 합니다.”
“지원가이신 거죠? 그런데 특이하게 맨손 격투를 하시네요.”
타라카 교수는 두 주먹을 깡하고 부딪쳤다.
“좋은 지원은 강한 근육과 단단한 주먹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유서준 길드 마스터님도 길드 마스터이시기 전에 지원가이시니, 저와 함께 지원가의 도(道)를 논해보는 건... 아니, 실례했습니다. 저명하신 유서준 길드 마스터님 앞에서 떠벌릴 말은 아닙니다만.”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근육맨의 모습은 어디다 던져버리고 또 다시 굽실거렸다.
외국인 교수가 학과장까지 맡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어쩐지 사회인의 애환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괜히 안쓰러워졌다.
편하게 대해주셔도 된다고 하면 더욱 자세를 낮추는 게 짠내를 더했다.
어쨌건 우리는 계속 타카라 교수의 안내에 따라 던전을 돌았다.
이따금 실습 나온 아카데미 생도들이 우리를 흘깃흘깃 쳐다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얼른 와서 유서준 길드 마스터님께 인사 올리라고 호통을 치는 타카라 교수를 말리느라 힘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또 한 팀이 타카라 교수의 호통에 비척비척 다가와서 인사를 올렸다.
좀 그러지 말라니까.
어색하게 인사를 하던 아카데미 생도 중 하나가 이연채를 보고는 얼굴색을 밝혔다.
“연채 선배?”
“아... 서운이? 서윤이? 맞아, 서율이였지!”
“처음 게 맞았어요. 서운이에요. 김서운.”
김서운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연채를 둘러싼 우리들을 둘러보고는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유서준zl존 길드에 취업하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진짜 대단하세요.”
“아이, 뭘 또. 운이 좋았지. 길마가 잘 봐주셨고. 에히히.”
“이번에 소원의 탑 등반도 성공적으로 마치셨다면서요. 솔직히 요즘 호랑 길드, 호랑 길드 하지만 근본은 유서준zl존 길드잖아요. 소원의 탑 먼저 오르는 것도 유서준zl존 길드일 걸요. 그래서 요즘 선배님이 진짜 저희 롤모델이에요.”
이연채는 몸을 비비 꼬았다.
후배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이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이건, 마치 꿈의 대기업에 취업하고 모교에 채용설명회를 위해 금의환향한 그런 기분.
대충 그런 느낌 아닐까.
“으흠.”
박정하는 아라크네 아머와 횃불아귀 방패를 괜히 닦는 시늉을 했고, 신수련은 C급 마법사 자격증을 꺼내서 불빛에 비춰보기 시작했다.
무슨 헛짓들을 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후배들 앞에서 막내 기 살려주자는 게 아닐까 싶다.
장비비는 괜히 장팔사모를 셀파의 발치에 찍어대며 입술을 내밀었다.
이럴 때 드릴 두더지가 나와 주면 좋은데, 하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인다.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서영 씨. 저는 뭘 할까요?”
“길드 마스터는 그냥 있는 게 제일 멋있어요.”
그거 은근히 돌려 까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말을 잘 듣는 길드 마스터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김서운은 선망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가만히 폼 잡고 있는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송서영 대단해.
“저기... 길드 마스터님. 저도 내년에 아카데미 졸업하거든요. 혹시 그 때 채용 계획이 있으시다면...”
“네, 이연채 헌터의 후배님이라면 믿을만하죠. 그 때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서운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른 생도들과 돌아갔다.
친구끼리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면서 저 쪽으로 가는 모습은 즐거워보였다.
“감사합니다. 길마.”
이연채가 살짝 다가와서 웃으며 말했다.
“뭐가요?”
“일부러 제 기 세워주신 거요.”
“인사하고 말 몇 마디 나눠준 건데요, 뭘.”
“그래도요.”
“아악!”
마지막은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서운아!”
우리와 헤어져서 저 쪽으로 가던 김서운의 일행들에게 문제가 생긴 듯 했다.
우리는 급히 그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에요?”
“서운이가 구멍에 빠졌어요!”
그 말대로, 바닥에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다.
드릴 두더지가 뚫어놓은 걸까. 아래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타카라 교수는 방방 뛰었다.
“인솔자 누구야?”
“접니다. 교수님. 이 교수님 조교로 있는...”
“함정 체크도 제대로 안 했어?”
“죄송합니다.”
“일단 내가 내려가서 확인할 테니까, 자네는 다른 생도들 데리고 나가서 상황 보고하고 도움 요청해.”
생도들은 후다닥 돌아갔다.
타카라 교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제가 더 안내를 드리기는...”
“그거야 당연하죠. 괜찮으시면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타카라 교수는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눈치였다.
나는 바닥에 누워 구멍에 바싹 얼굴을 댔다.
《투시안》
〈집중하여 보면 사물을 뚫어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건 그대로였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어둠 너머에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깊지 않아요. 구멍이 니은 자로 파여 있거든요.”
드릴 두더지는 수평으로 굴을 파다가 살짝 올라가서 수직으로 굴을 팠다.
그러다가 바닥을 뚫고 나오기 직전에 굴착을 멈춘 것 같다.
그래서 거죽만 남아있던 바닥을 밟은 김서운이 쑥 하고 빠진 거겠지.
다행인 건 니은(ㄴ)자 갱도 중 수직 깊이는 그리 깊지 않다는 거였다.
대략 십 미터 정도일까.
김서운은 그 밑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 같다. 뼈만 봐서는 크게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제가 들어가서 데리고 나올게요.”
어두운 구멍 아래서는 투시안이 유용하게 쓰일 테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셀파는 배낭에서 로프를 꺼내서 내 몸에 묶어주었다.
장비비가 나를 조금씩 갱도 아래로 내려 보내주었다.
나는 곧 김서운이 누워있는 갱도의 밑바닥에 닿았다.
“아이고.”
김서운은 뒷머리에 큰 혹이 나 있었다.
그래도 저 위에서 떨어지고 이만한 상처로 끝나기를 다행이지.
나는 그에게 로프를 묶어주면서 그가 머리를 부딪힌 곳을 살펴보았다.
살짝 피가 묻어난 지점이 있었는데, 거기는 일반적인 편마암이나 화강암 재질이 아니라 다소 무른 재질로 되어있었다.
그 덕분에 김서운이 크게 다치지 않은 건 그렇다 치고.
왜 여기만 이런 재질로 되어 있는 거지?
드릴 두더지가 수평 굴을 잘 뚫다가 여길 피하듯 수직으로 올라간 이유는 뭐고?
나는 그 부분을 만져보았다.
무르기는 했지만 손으로 쉽게 팔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투시안》
〈집중하여 보면 사물을 뚫어볼 수 있습니다〉
모래 알갱이 같은 입자들이 먼저 보였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큰 자갈 알갱이.
그리고 그 너머에는 오돌토돌한 구멍이 난 복숭아 씨앗 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과 비슷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 수십 배는 더 크기는 하지만, 그것은 던전 코어라고 불리는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