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헌터 타이쿤-52화 (52/52)

제 52화

빌런 소사이어티 (2)

우리는 송서영과 여우 가면을 데리고 다시 길드 아지트로 돌아갔다.

나는 카페테리아 창가에 송서영을 앉히고, 라벤더 차를 끓여왔다.

불안할 때 마시면 진정 효과가 있다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송서영은 호로록 차를 마시며 간신히 놀란 가슴을 달랬다.

뒤에서 어깨를 주물주물해주는 장비비나, 발치에서 재롱을 피우는 웰시 덕분도 있겠지.

“서영 씨. 이제 좀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탓하려는 건 아닌데, 왜 거기까지 걸어서 가신 거예요? 택시 타고 간다고 하셨잖아요.”

“... 야식 먹은 거 소화 시키려고...”

하긴. 송서영도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어.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이다.

나는 여우가면을 쓴 녀석에게 다가갔다.

놈은 정수리에 하이힐 일격을 맞은 탓인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여우가면을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송서영을 납치하려고 했고, 또 정황상 자이간트의 출몰에도 관여한 놈이니까.

나는 여우가면에 손을 뻗어서 그것을 휙 잡아당겼다.

그런데 여우가면 밑에 나타난 것은 여우가면이었다.

내가 잡아당긴 여우가면은 스르륵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다시 한 번 여우가면을 빼앗아 봤지만, 여우가면 밑에는 또 다른 여우가면이 있을 뿐이었다.

내 손에 집힌 여우가면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트릭스터 르나르에요. 얼굴을 가리는 건 아마도 귀속 아이템일 테니 가면을 벗기려고 해도 소용없을 걸요.”

송서영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는 르나르라는 자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유명한 사람인가요?”

“유명한 빌런이죠.”

빌런.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헌터가 되는 대신 사회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간 자들이다.

설정상으로는 일단 그렇지만, 【헌터헌터 타이쿤】 인게임에서는 길드 명성 수치가 높아지면 가끔 길드 아지트를 습격하러 오는 녀석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길드 아지트에서 디펜스가 이뤄지는데, 나중에 길드가 커지면 그냥 입구 경비원 선에서 컷 당하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송서영을 납치하려고 한 거지.

따져 묻고 싶지만, 르나르는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서 심문하기도 애매했다.

“흠흠. 내가 정신 차리게 해볼까?”

“비비, 네가? 그래라.”

장비비는 르나르 뒤로 다가가서는 빠악 하고 뒤통수를 갈겼다.

“악!”

르나르는 비명 소리를 내지르다가 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장비비는 의기양양해서 가슴을 두들겼다.

“애초에 정신 잃은 척하고 있던 거라구. 한 눈에 보면 척 알지.”

나는 장비비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여주고서, 르나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르나르 씨. 계속 정신 잃은 척 하면 일어날 때까지 깨우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떡할 겁니까? 한 번 더 깨워드려요?”

르나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일어났어요. 일어났다구요.”

“그럼 좀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가 르나르와 무릎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바싹 당겨 앉았다.

르나르는 부담스러운지 머리를 뒤로 빼려 했지만,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 당겨 나를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먼저 이것부터 물읍시다. 우리 길드 사무원은 왜 납치하려고 한 겁니까?”

“이, 인질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인질?”

“이번에도 기껏 자이간트를 숨겼다가 풀어놨는데 댁네 길드에서 방해해서 일이 수포로 돌아갔지 뭡니까. 그러니까 다음 일에는 당신네들이 방해 못하도록 인질을 잡아두려고 한 겁니다.”

르나르는 체념했는지 묻는 말에 술술 대답했다.

트릭스터라는 별명대로 대단한 신념 따위는 없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녀석 같다.

덕분에 심문은 쉬웠다.

“그래서, 그 다음이란 건 뭡니까.”

“그건...”

르나르는 머뭇거렸지만, 장비비에게 스파이크를 두어 대 더 얻어맞고 나서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이클립스 계획이란 건데...”

그건 대한민국을 통째로 뒤엎는 끔찍한 계획이었다.

***

클럽 애니웨이.

입장 관리를 깐깐하게 하기로 유명한 사치와 향락의 클럽이다.

이런 곳에는 절대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르나르의 뒤를 따라 골목길을 빙빙 돌아, 뒷문 앞에 섰다.

- 똑똑

르나르가 뒷문을 노크하자, 자이간트를 연상케 하는 고릴라 같은 남자가 나왔다.

그는 여우 가면을 보고는 거구의 몸을 숙이고 인사했다.

“르나르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들어가도 되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쪽 분들은...”

송서영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입에 붙은 테이프 때문에 읍읍거릴 뿐이었다.

한편, 송서영을 양쪽에서 팔짱 끼워 잡은 나와 장비비는 차례대로 어깨만 으쓱여보였다.

우리는 여우 가면을 쓰고, 그 위에 르나르의 여우 가면 환각 마법을 덧씌운 채였다.

르나르는 슬쩍 장비비의 눈치를 봤다.

장팔사모는 워낙 유명해서 특정될까봐 놓고 왔지만, 장비비가 쥐고 있는 단창이 언제고 그의 등을 찌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허튼 짓을 하려는 생각을 싹 달아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는 결국 우리가 짜놓은 대사를 읊었다.

“여자는 유서준 길드의 사무원이야. 잡아왔지. 나머지는 내 부하.”

“이런 부하들이 있으셨습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이던가?”

“... 죄송합니다.”

덩치는 바로 철문을 열어주었다.

르나르가 들어가고, 나와 장비비는 송서영의 팔짱을 낀 채로 그 뒤를 따랐다.

좁은 복도에서부터 클럽 음악 소리가 들렸다.

둥둥하는 비트 진동이 건물 전체를 울리고 있는 듯 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남녀가 서로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가면을 쓴 이도 드물지 않았고, 코스프레를 한 작자나 아예 몸 전체를 로브로 둘러싼 인간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 혼잡 속에서 르나르가 달아나지 않도록 그의 망토를 꽉 잡았다.

장비비는 재주 좋게 단창 끝을 그의 등에 겨누고 망토로 숨겼다.

누군가 뒤에서 밀기라도 하면 그대로 푹, 일텐데.

“조, 조심 좀 해주시죠.”

“난 조심하고 있어. 너나 조심해.”

르나르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지하로 내려갔다.

한 층 밑에서는 더 적나라한 춤사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무언가 불법적인 약물 때문인지 눈이 풀린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는 꼴이 영 보기 좋지 않았다.

공기 자체에서 끈적끈적한 느낌이 묻어났다.

그렇지만 한 층을 더 내려가면 분위기는 다소 바뀌었다.

여전히 남녀가 술을 마시고, 일부는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눈에 생기라고 할지, 아니면 독기라고 할 만한 것들이 가득했다.

몇몇은 우리를 보고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건 우리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르나르의 일행이라 그런 것 같았다.

빌런 소사이어티에도 파벌이 있는 건지 아니면 트릭스터에게 인망이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르나르. 빌어먹을 애새끼.”

누군가가 중지를 치켜세우며 욕설을 던졌지만, 르나르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듬성듬성 놓여 있는 테이블 너머.

저 쪽 끝에는 미닫이문으로 구역 전체가 닫혀 있었다.

르나르가 그 앞에 서자, 저절로 미닫이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웨딩홀처럼 넓은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여느 결혼식장과는 달리 조명은 무척 어두웠다. 전등이나 광열기구는 없었고, 단지 벽을 따라 길게 설치된 어항에서 헤엄치는 야광 장어가 유일한 광원이었다.

그 어항을 바라보며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셋.

앉은 사람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각기 둘씩 해서 여섯.

선 자들은 호위나 부하라고 치고, 앉은 사람만 살펴보자면...

창백한 인상에 깃 세운 예복을 입은 남자.

풍선껌을 불며 의자를 건들거리고 있는 금발 태닝 여자.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손바닥 위에 다람쥐를 모시고 있는 노파.

르나르가 미리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창백한 남자는 뱀파이어 드라킬, 불량한 여자는 전원이 수배된 암살자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금태연이었다.

다람쥐는 이름이 없었고, 노파는 다람쥐의 무녀라고 했는데.

다들 인상이 강해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듯 했다.

“르나르. 지각했군.”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 호두를 갉던 다람쥐에게서였다.

인상이 강하다는 건 다람쥐도 포함해야겠다.

르나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일을 마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여자는 데려왔잖습니까.”

나와 장비비는 송서영을 앞으로 떠밀었다.

송서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금태연은 풍선껌을 터뜨리고 킬킬 웃었다.

“저 여자가 유서준의 여자 친구라 이거지?”

“여자 친구가 아니라 사무원입니다.”

르나르가 정정해줬지만, 금태연은 다리를 꼬고 코웃음을 쳤다.

“유서준zl존길드가 망할 때 저 여자만 안 도망치고 남아 있었다며? 그럼 그렇고 그런 찐득한 사이였던 거 아니야?”

“그 때 유서준 길드 마스터는 장막 뒤의 존재였습니다.”

“뭐, 어쨌든. 지금도 둘이 긴밀한 관계라고 했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서 당신들이 이 여자를 납치해오라고 한 거기도 하고요.”

르나르의 말에 금태연과 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드라킬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유서준이 사무원 하나 때문에 우리 요구를 들어줄까요?”

“유서준 길드의 결속력은 끈끈합니다. 이 여자를 인질로 삼아 요구를 하면, 함부로 내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유서준 길드에는 대단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클립스 계획을 발동할 동안 가만히 있으라는 것 뿐이지만, 과연 그럴지...”

금태연이 신경질적으로 끼어들었다.

“됐어, 됐어. 유서준이 요구를 안 들어주면 여자는 죽이고, 유서준 길드도 무너뜨리면 그만이야. 그럼 되는 거잖아?”

“유서준 길드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자이간트로 차원관리부를 흔들려던 계획도 결국 유서준 길드 때문에 실패한 것 아닙니까.”

“흥. 장비비만 어떻게 하면 나머지는 조무래기야. 그리고 유서준은 장비비의 약점이라고. 그 놈부터 치면 장비비가 무너질 거고, 장비비가 무너지면 유서준 길드도 무너질 거라고.”

장비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몰래 그녀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말하는 내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정확한 판단이기도 했다.

빌런들은 생각보다 유능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금태연의 말에 드라킬이 수긍했고, 다람쥐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유서준 길드는 금방 성장할 것이다. 길드 마스터는 반 보 앞에서 이끌고, 길드원들은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르니. 그들이 예전의 지위를 찾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 그러니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유서준 길드가 더 커지기 전에.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금태연과 드라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람쥐는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금태연. 이클립스 계획은 예정대로 실행될 수 있는가?”

“백호랑 참수 작전은 문제없어. 유서준 길드가 어떻게 나오느냐가 문제긴 한데, 떨거지들을 모아서 두 시간만 벌어주면 될 거야. 아니, 한 시간 만이라도 괜찮아.”

“좋아. 드라킬. 차원관리부 침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실무진의 이 할을 종복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인사권을 가진 자들을 중점적으로 포섭했으니까, 계획 개시 전에 인사 배치를 최대한 흐트러뜨릴 겁니다.”

“머리를 쓰는 것도 좋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힘이다. 너는 머리에 너무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명심하죠.”

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을 싹싹 비벼댔다.

“헌터 협회의 남궁무진은 내가 맡는다.”

“다저씨가 맡으면 별 문제는 없겠지.”

“저도 이견 없습니다.”

금태연과 드라킬이 말을 거들었고, 르나르는 묵묵히 들었다.

파워 밸런스는 다람쥐가 가장 높고 금태연과 드라킬이 동급, 르나르가 가장 낮은 게 아닐까 싶다.

다람쥐는 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십일 후 있을 개기일식, 이클립스 계획 발동을 최종적으로 승인한다. 우리는 약자들이 세운 법칙을 무너뜨리고 강자의 법칙을 새로 세울 것이다. 차원관리부와 헌터 협회, 더 나아가 길드와 대한민국 정부도 우리 빌런 소사이어티의 룰에 따라야 할 것이다.”

금태연은 환호성을 질렀다.

“착한 척하던 놈들을 마구 베어버릴 수 있다니, 벌써 군침이 돈다구!”

드라킬은 팔짱을 끼었다.

“이것으로 우리 종족도 겨우 뒷골목에서 나올 수 있겠군요. 버러지들의 피를 좀 빨았다고 음지 속으로 쫓겨난 세월이 너무 길었지요.”

르나르는 입을 다물었기에, 자연스레 그에게로 세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르나르가 뒤늦게 무어라 말하기 전에 다람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르나르. 송서영을 데려온 저 자들은 누군가?”

“제 부하입니다.”

“부하라.”

다람쥐는 껄껄 웃고는 호두 껍데기를 내던졌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호두 껍데기는 르나르가 급히 만든 배리어를 모조리 부숴버리고, 그의 명치 정중앙에 꽂혔다.

“커헉...! 어, 어째서...!”

다람쥐는 노파가 꺼내주는 호두알을 나와 장비비에게 겨누며 대답했다.

“네가 언제 유서준과 장비비를 부하로 거두었단 말이냐?”

우리는 급히 무기를 치켜 들었다.

"... 어떻게 알았지?"

"감으로."

다람쥐는 곧바로 호두알을 쏘았다.

장비비가 단창을 휘둘러 튕겨냈지만, 그 바람에 단창도 부서지고 말았다.

"죽여!"

금태연의 고함 소리에 수하들이 달려왔다.

이 자들의 실력도 만만찮은데, 뒤에 있는 금태연이나 드라킬, 다람쥐까지 가세하면 승산이 없다.

나와 장비비는 미닫이문 쪽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발 빠른 빌런 몇몇이 이미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못생긴 빌런이 칼날을 혀로 핥으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케케케. 그 유명한 유서준 씨의 피는 어떤 색인지 구경 좀 해보자고... 악!"

- 쾅!

미닫이문이 박살나고, 섬광탄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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