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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나타나지 않는 황제 (4/127)

4화. 나타나지 않는 황제2021.04.13.

엄연한 무례였지만, 아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례를 먼저 범한 쪽은 디안이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황후가 될 사람이었으니까.

16553284340001.jpg“취향…… 취향이라.”

아델은 피식 웃으며 디안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편안한 안락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나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으나, 디안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다리를 꼬았다.

16553284340001.jpg“왜?”

16553284340016.jpg“…….”

16553284340001.jpg“왜 내게 이런 조언을 하는가? 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굳이 정성스럽게.”

무미건조한 어투였으나 내재된 뜻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디안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고 눈을 휘어 웃었다.

16553284340016.jpg“폐하의 취향에 대해 모르실 것이니 제가 알려 드리…….”

그러나 아델은 그녀의 말허리를 단칼에 잘라 버렸다.

16553284340001.jpg“그러니까 왜.”

16553284340016.jpg“…….”

16553284340001.jpg“그대는 혹시 취향을 이쪽저쪽에 말해 주고 다니는 사람인가?”

아델은 그 말을 하고 난 뒤 쿡쿡 웃었다. 음산하게 느껴지는 웃음소리가 어둑한 침실에 울려 퍼지자 오싹한 기운마저 풍기는 듯했다. 아델은 눈치를 보고 있는 시녀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16553284340001.jpg“에흐몬트산 밀주가 그렇게 유명하다던데. 궁금하구나. 밀주를 한 잔 내어 오너라.”

16553284340044.jpg“예?”

16553284340001.jpg“술 한 잔 가져오란 말이다. 한 잔 마시고 푹 잠을 자야 개운할 것 같아.”

16553284340044.jpg“아, 예. 알겠습니다.”

시녀가 얼른 몸을 돌려 나가자 아델은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16553284340001.jpg“내 머리카락을 말려 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어서 말려다오.”

16553284340016.jpg“…….”

아델의 명령에 디안은 숨을 꾹 참았다가 내쉬며 수건을 집어 들었다. 아델이 소파에 완전히 기대어 앉은 탓에 머리카락을 말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끝의 물기만 대충 닦아 내고 있는데 눈을 감고 있던 아델이 불현듯 말했다.

16553284340001.jpg“내 취향도 황제 폐하께 전달 좀 해 주겠나?”

16553284340016.jpg“……어떤…….”

16553284340001.jpg“난 사적인 것은 직접 말할 줄 아는 남자가 좋다고.”

느긋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아델라이드는 그렇게 속삭이며 씩 웃었다. 디안은 잠시 침묵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

16553284340016.jpg“예, 알겠습니다.”

16553284340001.jpg“그리고 한 가지 더.”

16553284340016.jpg“말씀하세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아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나붓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예의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델은 눈빛으로 디안을 옭아매며 속삭였다.

16553284340001.jpg“난 태어나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취향에 날 맞출 생각은 해 보지 않았거든. 그러니, 폐하의 취향을 내게 공유하지 않아도 돼. 그 취향, 그대만 간직하도록 해. 내 취향도 파악하기 어려운데 남의 취향까지 굳이.”

늘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 있던 디안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 균열에 아델라이드는 눈을 기울이며 웃었다.

16553284340001.jpg“그럼 이만 가 봐.”

아델의 명령에 디안은 숨을 크게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표정을 관리했다. 긴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자, 수건을 내려놓을 때 즈음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몸을 돌려 아델을 바라본 디안은 눈을 달처럼 접어 곱게 웃으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16553284340016.jpg“황녀님을 뵙고 싶은 마음에 그만 실례를 저질렀네요. 용서하세요.”

16553284340001.jpg“용서씩이나.”

16553284340016.jpg“그럼 편안하게 쉬시길 바랍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절 불러 주세요. 대우에 소홀함이 없도록 일렀답니다.”

16553284340001.jpg“…….”

16553284340016.jpg“그럼.”

그녀는 정중한 어조로 말한 뒤 방을 나갔다. 그러나 디안 푸아티에가 나간 문을 응시하는 아델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마치, 성의 주인이 방문객에게 건넬 법한 말이 아니던가? 아델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16553284340001.jpg“오자마자 황제의 정부가 인사를 한다라? 기가 막히는군.”

얼굴도 본 적 없는 황제, 그녀의 예비 남편에 대한 꺼림칙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아델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3284340001.jpg“카를 울리히 에흐몬트…….”

  * * * 예비 황후가 에흐몬트 수도에 도착하자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아델은 온종일 시녀들의 손길을 받느라 바빴다. 근육을 풀어 준다는 마사지부터, 피부 관리, 머릿결 관리에 이르기까지, 관리는 끝도 없었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 좋아서 아델은 아예 온몸을 그녀들에게 내어 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16553284340044.jpg“다음은 손톱 관리입니다.”

16553284340001.jpg“마음대로 하거라.”

16553284340044.jpg“다음은 발톱 관리입니다.”

16553284340001.jpg“좋을 대로 하거라.”

황제가 오든 말든, 황제의 정부가 찾아와 속을 긁었든 말든, 일단은 몸을 푸는 것이 먼저였다. 두 달간 마차와 배를 타고 이동했던 탓에 한잠 푹 자고 일어났음에도 온몸이 물 먹은 듯 찌뿌둥했다.

16553284340001.jpg“결혼식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했니?”

16553284340044.jpg“예, 일주일 남았습니다.”

16553284340001.jpg“흠.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16553284340044.jpg“무엇이 말입니까?”

16553284340001.jpg“몸을 회복하는 것이.”

16553284340044.jpg“?”

16553284340001.jpg“점심은 어떤 요리니?”

16553284340044.jpg“말씀하셨던 대로 잘 익힌 고기 요리를 준비 중입니다.”

16553284340001.jpg“그래. 조금 빨리 끝내 다오. 뭘 좀 먹어야겠어.”

  * * * 일주일은 금방 흘렀다. 황제는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예비 황후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 소문은 이미 황궁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다.

16553284340001.jpg“사랑꾼 납셨네.”

아델은 이 상황에 대해 그렇게 평했다.

16553284340001.jpg“순애보 납셨어.”

더불어 그녀는 어렴풋이 황궁의 모든 관리를 디안 푸아티에가 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황후의 직함을 받기 전이라 아델은 단지 눈치로만 그 사실을 알아채는 수밖에 없었다.

16553284340001.jpg“내가 굴러온 돌이라 이거군.”

아델은 결혼식 드레스의 섬세한 소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금실로 화려하게 꾸며진 새하얀 웨딩드레스. 그때 마침 시녀가 머리에 쓸 관을 가져왔다.

16553284340044.jpg“이것을 쓰고 입장하실 겁니다.”

시녀가 함을 열어 보여 준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백금관이었다. 시녀는 그것을 아델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올린 뒤 거울을 들어 보여 주었다. 아델은 물끄러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16553284340044.jpg“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16553284340001.jpg“금관은 없느냐?”

16553284340044.jpg“금관이라 하오면,”

16553284340001.jpg“나는 은색보단 금색이 어울린다. 아직 식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관을 바꾸고 싶구나. 가서, 금관을 가져오너라.”

시녀가 머뭇거리자 아델은 가차 없이 머리에 씌워진 관을 직접 벗어 버렸다. 결국 시녀들은 디안이 선택해 준 관을 도로 집어넣고 금관을 찾으러 황실 보고로 달려갔다. * * * 한편 그 무렵, 카를도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시중은 디안이 들고 있었다. 카를의 예복은 옷감부터 디자인까지 모두 디안이 직접 고른 것이었다. 예복 단추를 잠가 주는 디안의 가느다란 손이 어쩔 수 없이 떨리자, 카를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16553284465443.jpg“디안.”

그는 드물게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디안의 하늘색 눈이 일렁이더니 결국 눈물이 차올라 뚝뚝 떨어졌다.

16553284340016.jpg“죄송해요.”

그녀는 황제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기대었다. ‘밀어낼까?’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그는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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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은 동그마한 금빛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닿아 오는 힘이 어찌나 가벼운지, 이대로 툭 치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딱 이 여자처럼 작고 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황후라는 이름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었으나, 동시에 외면하고 싶었던 사람. 오랜 시간 비어 있던 황후궁에 새 주인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잠을 설칠 정도로 예민해졌다. 시종들이 조심스럽게 예비 황후를 한 번은 만나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카를은 모두 거절했다. 황후란 이름을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카를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디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떨면서 울고 있었다.

16553284465443.jpg“울지 마라.”

디안은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전율했다.

16553284340016.jpg“죄송해요, 폐하. 정말…… 정말 죄송해요. 제가 울면 안 되는데, 이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눈물이 나요.”

디안은 예복을 입고 있는 황제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황제는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입술과 닿은 입술에서 짠 눈물 맛이 났다.

16553284340016.jpg“황후께서는 아름다우세요.”

황제가 대답이 없자 디안은 그가 반응할 수밖에 없는 말을 꺼냈다.

16553284340016.jpg“그분이 제게 시녀냐고 물으셨어요.”

그 말에 카를의 몸이 굳었다. 몸이 맞닿아 있던 디안은 그 변화를 빠르게 알아챘다. 그녀는 카를의 가슴에 이마를 대며 숨을 삼켰다. 카를은 디안의 어깨를 잡고 몸을 뗐다. 그리고 싸늘하고 냉혹한 표정으로 디안을 바라보며 다그쳤다.

16553284465443.jpg“그날, 인사를 갔던 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16553284340016.jpg“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에게 시녀냐고 물어보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어요.”

16553284465443.jpg“그따위 소리를 들었군.”

16553284340016.jpg“아뇨, 폐하. 다만 저는…… 저는요.”

디안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차올라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이 황제의 예복을 적셨다.

16553284340016.jpg“저는, 그 물음에 어떠한 답도 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감히 그분께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어요.”

디안은 손을 들어 카를의 얼굴을 천천히 매만졌다.

16553284340016.jpg“전, 폐하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전…… 폐하만 있으면 되는데……. 제 욕심이 과한가 봐요.”

그 말을 끝으로 디안의 호흡이 가빠졌다. 카를 울리히가 가장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그는 놀라서 얼른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몸이 약한 그녀는 종종 쓰러지곤 했다. 그것마저도 카를의 어머니를 닮았다.

16553284465443.jpg“디안.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쉬어라.”

16553284340016.jpg“허, 허헉.”

디안은 카를의 팔에 매달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나 이내 어지러운 듯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16553284465443.jpg“밖에 누구 없느냐!! 어서 의원을 불러라, 어서!!!”

황제의 다급한 외침에 문밖이 삽시간에 소란해졌다. 디안은 꺼져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부여잡는 주문을 외웠다.

16553284340016.jpg“절 버리시면 안 돼요. ……절 버리지 말아요, 폐하…….”

그 말을 끝으로, 디안은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 * *

16553284340001.jpg‘날 우습게 만들려고 작정이라도 했나?’

결혼 예복 차림의 아델은 싸늘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웅성거림은 시각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으나,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볼 사람도, 알려 줄 사람도 없었다. 새삼 고트로프에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귀족들은 혈혈단신으로 바다를 건너온 이국의 황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예고도, 기약도 없이 결혼식에 늦는 황제 덕분에 그 시선엔 비웃음마저 섞여들었다. 마치 비무장 상태로 적진 한가운데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16553284340001.jpg‘그럴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아델라이드.’

귀족들 사이에서 웃음소리마저 들려오자 아델은 이를 악물며 배에 힘을 단단히 주고 허리를 폈다.

16553284340044.jpg‘황녀님. 그곳에서 믿을 것은 오직 당신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명예와 당신의 품위는 오직 당신만이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떠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유모는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델라이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가까이 서 있던 시종을 돌아보았다. 인형처럼 서 있던 예비 황후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귀족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예비 황후는 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낭랑한 음성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16553284340001.jpg“황제께서 오실 때까지 나도 좀 앉아 있어야겠으니 편안한 의자를 가져오라.”

16553284340001.jpg‘결혼식에 참석한 귀족들도 앉아 있는데, 언제까지 혼자만 서 있어? 모양 빠지게.’

아델은 위엄 있는 표정으로 명령했고, 시종들은 재빨리 의자를 가지러 어디론가 달려갔다. 예비 황후는 황제가 왜 오지 않는지, 언제 오는지를 궁금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대신전의 입구가 아닌 대신관 앞에 의자를 두라 명하였다. 대신전의 입구를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자, 황후와 귀족들의 관계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선명한 금빛 시선이 귀족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찬찬히 훑기 시작하자, 소란하던 대신전에는 적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유로운 태도로 좌중을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이 잠시 한곳에서 머물렀다. 달빛 머금은 밤바다 같은 검푸른 색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리오넬은 아델의 시선이 제게 잠시 닿자 보일 듯 말 듯 묵례를 했다. 그에 아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시선을 돌렸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그의 형 테세우스가 작게 속삭였다.

16553284498822.jpg“손바닥 뒤집듯 상황을 역전시키는구나.”

리오넬 뒤에서도 귀족들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3284340044.jpg“세상에. 눈을 뗄 수가 없는 분이로군요.”

16553284340044.jpg“기세가 대단하신데요.”

예비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16553284340001.jpg“이런. 귀한 분들을 기다리게 하는군요.”

이까짓 일이 무슨 대수냐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에 그녀를 비웃던 귀족들은 슬쩍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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