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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폐하의 연인이라 말해 주세요 (6/127)

6화. 폐하의 연인이라 말해 주세요2021.04.20.

아델은 홀로 방에 틀어박혀 생각에 생각을 더하기 시작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16553284807598.jpg“황후궁 시녀들도 믿을 만한 사람들은 아니야.”

결혼한 첫날, 황후가 누구도 만나지 않겠노라 선언했음에도 시녀들은 의아한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황후의 표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이미 황제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고트로프와 에흐몬트는 오랜 기간 교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깊고 거친 바다가 두 나라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바다를 넘어 서로의 땅을 노릴 이유가 없었기에 두 나라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정도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고트로프의 경우 인접국에는 수많은 밀정을 심어 두고 동태를 살폈으나, 에흐몬트엔 그 흔한 밀정 한 명 심지 않았다. 그것은 에흐몬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로 인해 지금 아쉬운 것은 아델, 그녀였다. 손에 쥔 정보가 없었다. 아델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정식으로 부부가 된 황제를 떠올리자 가슴에 돌을 얹은 것같이 답답해졌다. 손바닥에 한참이나 얼굴을 묻고 있던 아델은 푹신하고 거대한 침대에 몸을 뉘며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16553284807598.jpg“우선, 카를 울리히가 왜 고트로프의 황녀를 황후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부터 알아야겠군.”

16553284807607.jpg‘많은 것을 바라지 마시오.’

  불현듯 떠오른 목소리에 아델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16553284807598.jpg“망신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은 아마 삼삼오오 모여 이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 틀림없었다.

16553284807598.jpg“내일 아침이 되면 더 재미있는 소식이 추가되겠군.”

결혼식 첫날, 황후가 소박을 맞았다는 소식이 얼마나 빠르게 퍼질지 훤하게 보였다. 소박을 맞은 것인지, 먼저 거절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소문에서 약자는 그녀 자신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갔다.

16553284807598.jpg“설마……. 오늘 같은 날까지 보란 듯이 디안 푸아티에에게 가 있지는 않겠지?”

중얼거리던 아델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탄식하며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욕을 입에 담고 말았다. * * * 아델의 불길한 예상은 적중했다. 황제가 식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상아궁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상아궁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황제 앞에 시녀들이 달려 나와 고개를 조아렸다.

16553284807607.jpg“깨어났나?”

1655328480763.jpg“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폐하.”

카를은 미간을 찌푸리며 디안의 침실로 들어섰다. 거대한 침대엔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보라색 눈이 깊게 침잠했다. 누군가 목을 움켜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1655328480763.jpg‘카를, 카를.’

1655328480763.jpg‘카를, 내 아들.’

  들릴 리 없는 애달픈 목소리에 황제는 어금니를 세게 물며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거대한 침대, 배게 위로 흩어진 금발, 파리한 안색의 여인.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고 손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 들 무렵이었다.

16553284833328.jpg“……폐하?”

꺼질 듯한 목소리에 카를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눈을 뜨니 디안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디안의 시선이 황제의 의복에 닿았다. 결혼식 때 입은 예복 차림 그대로였다. 입꼬리가 위로 치솟으려 하여 그녀는 턱에 힘을 주었다.

16553284833328.jpg‘내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가셨으니, 결혼식도 엉망이었겠어.’

16553284807607.jpg“정신이 드느냐?”

디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갓 깨어난 듯 몽롱한 시선으로 황제를 보다가 이내 타박하는 어조로 말했다.

16553284833328.jpg“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달려오셨어요?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폐하.”

16553284807607.jpg“그만.”

16553284833328.jpg“죄송해요. 늘 폐를 끼치네요…….”

16553284807607.jpg“그만.”

디안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16553284833328.jpg“……황후께서 기다리실 거예요. 가세요.”

16553284807607.jpg“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에 디안은 입술을 말아 물며 울었다.

16553284833328.jpg“황후의 웨딩드레스를, 제가 정했어요, 폐하.”

16553284807607.jpg“…….”

16553284833328.jpg“그녀가 쓸 예식용 관도 제가 골랐어요, 폐하.”

디안은 아직 아델이 금관으로 바꾼 것은 알지 못했다.

16553284833328.jpg“예식에 필요한 물품도, 꽃도……. 전부 제가 골랐어요.”

16553284807607.jpg“…….”

16553284833328.jpg“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거기까지만 했다. 가슴에 얹힌 답답한 것을 더 풀어내고 싶었지만, 그 이상 분을 풀면 안 된다. 선을 넘어 그를 질리게 만들어서는 안 돼. 그래서 디안은 그저 우는 것으로 화를 내리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더 울고 나서야 디안은 몸을 일으키며 황제의 얼굴을 응시했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권태로움마저 엿보이는 냉정한 얼굴로 그녀의 울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눈물이 흔적도 없이 말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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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284807607.jpg“이전과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16553284833328.jpg“제가 이대로 폐하의 곁을 지켜도 될까요?”

16553284807607.jpg“그래.”

16553284833328.jpg“……하지만 저는…… 황후 폐하께 저를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나요? 황후께서 오셨으니 귀족들은 대놓고 저를 첩이라 부를 거예요.”

디안이 가련한 손길로 그의 옷소매를 잡으며 간절히 호소하자, 지금까지 잠잠하던 그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16553284807607.jpg“원하는 호칭이 있나?”

16553284833328.jpg“……연인.”

16553284807607.jpg“…….”

16553284833328.jpg“황후께 저를 폐하의 연인이라 말해 주세요.”

그 말을 하고 나자 디안의 심장은 폭주하듯 거칠게 뜀뛰었다. 숨이 가빠 오고 식은땀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늑대는 완전히 길들지 않는다.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그녀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여상한 어조로 답했다.

16553284807607.jpg“알았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디안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늑대를 길들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약한 곳을 건드려 반응하게 할 수는 있다. 황제 카를은 뜨거운 불을 감춘 예민한 늑대 같은 남자였다. 그리고 디안은 그의 약한 곳을 잘 알고 있었다. 디안이 그에게 손을 뻗자 황제는 그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침대에 다시 누우며 조금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16553284833328.jpg“안아 주세요.”

가녀린 목소리에도 카를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디안은 간절히 바라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고, 황제는 결국 구두를 벗고 침대로 올라와 디안을 끌어안았다. 예복 너머로 들려오는 잔잔한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며 디안은 황제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파리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결국, 그녀는 황후의 첫날밤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

16553284833328.jpg‘내가 황후가 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그 자리를 온전히 가질 수 없어.’

  * * * 황제 부부가 결혼식을 치른 바로 다음 날, 소문은 마른 수풀에 번진 들불처럼 무서운 속도로 번졌다.

1655328480763.jpg“어머~! 세상에, 황제 폐하께서 식이 끝나자마자 상아궁에 가셨대요, 글쎄.”

1655328480763.jpg“그럼, 황후께서는 결혼식 날 소박당한 거군요?”

1655328480763.jpg“그렇죠. 황제 폐하께서 결혼식에도 늦게 오셨잖아요? 나 참, 그런 경우는 또 처음이에요.”

1655328480763.jpg“최근 엘린 아뜰리에 신상들을 푸아티에 영애가 다 털어 가다시피 하셨대요.”

1655328480763.jpg“세상에, 거기 목걸이 하나가 얼만데.”

1655328480763.jpg“그 돈이 어디서 났겠어요?”

재미있는 구경거리 하나가 생긴 셈이었다.

1655328480763.jpg“황후 폐하는 어떠시대요?”

1655328480763.jpg“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분이래요. 어떻게 아셨는지 어제 누구의 방문도 허락지 않겠노라 선언하셨다네요? 뭐, 그런다고 체면이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말이에요.”

1655328480763.jpg“황후 폐하면 뭐 하나요. 첩만도 못하신 것을.”

1655328480763.jpg“그분이 황궁을 휘어잡으실 수 있을까요?”

그때였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던 귀부인 중 한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던 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1655328480763.jpg“왜요?”

1655328480763.jpg“쉿!”

눈치 없이 물어보는 통에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잘게 흔들었고, 귀부인들은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1655328480763.jpg“!”

주위를 살피던 이는 깜짝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옆 회랑에서 황후가 느긋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귀부인들은 얼른 정중한 태도로 황후에게 인사를 건넸고, 아델은 그들의 인사를 우아한 태도로 받은 뒤 멀어졌다. 귀부인들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1655328480763.jpg“들으셨을까요?”

그 질문에 귀부인들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황후의 표정을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이라곤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 요요한 금빛 눈동자뿐이었다.

1655328480763.jpg“……아뇨. 들으시기엔 멀었고, 언짢은 기색도 없으셨어요. 그러니 못 들으셨을 거예요.”

1655328480763.jpg“그렇겠죠?”

귀부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8480763.jpg“휴우……. 말조심해야겠어요.”

1655328480763.jpg“그러니까요. 식장에서 그 모욕을 당하셨는데도 조금의 동요도 없던 분이셨어요. 표정 보셨어요?”

1655328480763.jpg“전 무슨…… 숲속의, 있잖아요. 검은 육식동물,”

1655328480763.jpg“흑표범이요?”

1655328480763.jpg“그래요! 흑표범! 마치, 흑표범을 보는 것 같았어요.”

1655328480763.jpg“아이, 정말! 말조심하라니까요?”

1655328480763.jpg“근데 뭐…… 솔직히 지금 이대로면 우리가 눈치 볼 것 있나요? 뒷배가 될 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요?”

한편, 그녀들을 지나 회랑을 걷던 아델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굳어 있었다. 그녀들의 말마따나 거리가 있어서 속삭이던 그들의 말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다만, 반응은 확실히 보았다. 뒤에서 수군거리다가 당사자가 오니 놀란 모습. 저들만 그러했느냐 하면, 산책 도중 마주친 시녀들도 시종들도 모두 한결같이 저런 반응이었다. 아델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속이 들끓어 산책을 나섰던 참이었다. 그런데 만나는 무리마다 저런 반응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어제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부는 바람의 시원함도, 햇볕의 따뜻함도 더는 느껴지지 않아서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느긋한 모습을 유지하느라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에 묻고 그렇게 한참을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각오하고 온 길이지만, 상상과 현실의 괴리는 너무나 가혹하게 컸다. 고국에서 이곳까지 누구 하나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비단 에흐몬트의 요청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고트로프에 필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배길에 따라올 이유도, 그래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델은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쏟아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선연한 금빛 눈동자에 야성이 어렸다. 과거는 돌아보지 말고, 이곳에서의 삶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1655328480763.jpg‘그곳에서는 현명하게 처신하렴. 넌 똑똑하니 현명하기만 하면 문제없을 거야.’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델은 그 음성을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 * * 에흐몬트 결혼 문화에도 연회는 있다. 다만, 결혼 당일과 다음 날은 정숙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례상 3일째가 되는 날 오후에 큰 연회가 열렸다. 황제 부부의 결혼연회도 마찬가지로 3일째가 되는 날 열리게 되었고, 이에 온 황궁이 떠들썩해졌다. 연회는 결혼식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디안 푸아티에는 이른 아침부터 연회 준비로 분주했다. 그녀는 아름답게 꾸며진 메인 홀 이곳저곳을 살폈다. 색색의 영롱한 수정과 꽃으로 꾸며진 메인 홀은 보는 것만으로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단상 위 상석엔 황제와 황후가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1655328480763.jpg“궁주님, 더 손 볼 곳은 없을까요?”

시녀의 정중한 질문에 디안은 고개를 저었다.

16553284833328.jpg“없어.”

어쩐지 날이 선 듯한 어조에 시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디안에게서 한참 물러나 대기했다. 디안의 시선은 황후가 앉을 의자에 못 박혀 있었다. 붉은 융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자리. 황제의 바로 옆에 앉아 만인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 탑에서 쏟아져 나온 마수에게 부모를 잃은 그녀가 백작 영애의 지위까지 얻어 낸 것은 모두 스스로의 노력 덕분이었다.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고 상아궁까지 얻어 낸 것도 모두 그녀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곳은 황제의 나라. 이 모든 것은 황제의 것. 그러니 황제의 사랑을 등에 업은 그녀보다 더 높은 사람은 오직 황제 한 사람뿐이어야 했다. 단지 운 좋게 황녀로 태어나 어떠한 노력도 없이 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그녀의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황제는 디안에게 상아궁을 내어 주었으나, 황후의 자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조금 더 매달려 보았으나, 황후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그의 눈은 냉혹하게 가라앉았고 결국 디안은 그에게 더 애원하지 못했다. 황후가 나타난 이후, 디안의 가슴은 불안하게 들끓었다. 황제의 사랑을 확인하고, 황후의 결혼식마저 망쳐 버렸으나 그럼에도 불안은 가시지를 않았다.

16553284833328.jpg“아니야. 가라앉혀, 디안 푸아티에.”

디안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16553284833328.jpg‘왕을 왕으로 만드는 것은 주위의 시선이다. 단지, 그뿐이다.’

디안은 가슴에 칼처럼 품고 다니는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그리고 상석에 놓인 두 자리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오늘 황후는 저 자리에 제대로 앉지 못할 것이다. 결혼식, 첫날밤, 첫 연회. 그 모든 주인공은 황후가 아닌 디안 자신일 것이다. 원래부터도 그것은 그녀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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