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고트로프의 마녀를 뭐로 보고2021.04.24.
아델라이드는 태어남과 동시에 황녀였다.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해 주는 사람들이 늘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많은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신경을 썼던 일들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뭐든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크게 느껴지는 법 아니던가?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나 길이며 품이 아델의 체격보다 훨씬 작았다.
“됐다. 벗겨라.”
싸늘한 말에 시녀들은 얼른 드레스를 벗겼다.
“정말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아무래도 고트로프에서 전해 받은 전하의 치수와 에흐몬트의 치수가 서로 맞지 않았던 듯합니다. 저희는 고트로프에서 온 치수를 기준으로 드레스를 제작하였는데…….”
그러나 치수 기준의 다름이 문제라기엔 입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더구나,
“그럼 결혼식 드레스는 어떻게 치수가 맞았단 말이냐?”
“두 드레스를 만든 의상실이 서로 달라서…… 송구합니다, 폐하.”
그에 아델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어 앉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지금 시녀들과 입씨름을 해 봐야 정신만 사나워질 뿐이었다.
“치수에 맞춰 수선을 해 오너라. 기다리겠다.”
“하, 하오나 연회 시각까지 이제,”
“조금 늦게 입장해도 상관없다. 수선해 와라.”
황후의 단호한 명령에 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명을 그대로 이행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델의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나기 시작했다.
“왜, 어렵겠느냐?”
“정말 죄송합니다만, 황후 폐하. 큰 옷을 작게 수선하는 것은 금방 되지만 작은 옷을 크게 수선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연회 시작이 문제가 아니라 끝나는 시각보다도 늦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델은 턱에 힘을 주었다.
‘아델. 너는 늘 마수며 탑이며 이런 것들과 싸우고 다니니 궁궐 안 나의 싸움은 하찮다고 여기지?’
문득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단 한 번도 전쟁을 쉰 적 없는 장수란다. 에흐몬트에서 마음을 놓지 말아라.’
그녀는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고트로프에서 가져온 옷을 입을 수도 있겠지만, 참석하는 연회는 다름 아닌 그녀의 결혼연회였다. 그런 자리에 고트로프식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그럼 내가 저 드레스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로구나.”
“…….”
“내 결혼연회에 참석하지 않거나, 혹은 맞지도 않는 저 드레스를 억지로 입고 가는 것. 맞느냐?”
냉정한 말에 시녀들은 대답할 수 없는지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아델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어깨를 반듯하게 펴며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나의 결혼을 디안 푸아티에가 준비했느냐?”
그 질문에 시녀들은 숨을 멈춘 채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제께서 허락하셨고.”
“…….”
행여나 불똥이 튈까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당혹스러워하는 시녀들의 태도에 아델은 듣지 않고도 답을 알아차렸다. 아델은 웃었다. 금빛 눈이 길게 휘며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오금이 저릴 정도로 오싹한 분위기가 풍겼다. 시녀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와 금관을 가져와라.”
“예? 송구하오나 그 드레스는 이미 입으셨던 옷인데…….”
“상관없단다.”
본디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고, 이름 높은 검사는 검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작 드레스 따위로, 황제의 사랑 따위로 우위를 점하고 싶은 모양인데.
‘고트로프의 마녀를 뭐로 보고.’
아델의 눈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 * * 에흐몬트 황궁의 메인 홀. 황제의 결혼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는 이른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연회장 주변은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한 궁의 고용인들과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해가 저물자 물씬 달아올랐는데, 정작 연회의 주인공인 황제 부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황후는 나타나지 못하겠지. 고트로프 옷을 입고 올 수는 없을 것이고, 드레스는 작아 입지 못할 테니. 아, 웨딩드레스도 있나?’
디안은 데스포네 공작과 함께 연회장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느라 바빴다.
“이 연회장을 꾸미는 데 데스포네 공작님의 도움이 컸죠.”
“우리 궁주님의 안목이 없었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허허허.”
데스포네 공작은 디안을 ‘궁주’라 치켜세우며 웃었고, 귀족들도 사교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수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공수해 오신 겁니까, 궁주님?”
“아이참, 제 안목이 아니라 공작님의 안목이래도요.”
디안은 연신 웃으며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이 연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면서도 누구도 ‘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는 오시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머나! 궁주님. 이 목걸이, 이번 아뜰리에 신상 아닌가요?”
한 귀부인이 과하게 놀란 얼굴로 디안의 목덜미를 가리키자, 다른 부인들도 앞다투어 그녀의 목걸이를 칭찬하고 나섰다.
“세상에, 이번 신상들이 그렇게 아름답다더니! 구경이나 해 보고 싶은 마음에 갔다가 궁주님께서 모조리 구매하셨다는 소식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답니다.”
“저도요. 저도 그랬어요. 어머나…… 이 귀걸이도 세트잖아요.”
그즈음에서 그들은 더 은밀한 것을 거론하며 디안을 치켜세웠다.
“아……. 그리고, 폐하께서 결혼 첫날밤조차 상아궁에서 계셨다던데…….”
“저도 들었어요. 아아, 그런 사랑이라니. 부러워요, 궁주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얼마나 황후 폐하께 죄송스러운데요. 가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황후 폐하께서 절 오해하실까 봐 두려워요. 그러니 그런 말씀들 마세요.”
귀부인들은 디안과 친해지고 싶어 했다. 친해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녀의 호의를 사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아 참, 궁주님. 사실 이번 저희 영지 수확량이 예년과 같지 않아서…… 가능하시다면 세금 감면을 좀 어떻게…….”
“궁주님, 저희 영지 인근에 최근 탑이 내려와서요. 스트라이커들을 좀 보내 주실 수는 없으실지…….”
태생부터 고아한 귀부인들이 디안 앞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려 댔다. 칭찬을 계속 건네고, 눈을 맞추려 하고, 웃고, 부탁하고. 짜릿하다. 전율이 일만큼. 디안은 살풋 웃으며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폐하께 꼭 말씀드려 볼게요.”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궁주님.”
그때, 디안 옆에 서 있던 레녹스가 으스대며 끼어들었다.
“우리 궁주님께서 이렇게 겸손하십니다. 황제 폐하께선 여전히 궁 관리에 관한 폐하의 권한을 궁주님께 위임하신 상태랍니다. 뭐, 이 정도면 사실상 황후께서 가진 권한보다 많은 것이 아닌가…….”
“위험한 발언을 함부로 하는군.”
으스대던 레녹스는 훅 치고 들어온 나직한 목소리에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디안을 치켜세우던 귀부인들도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넋을 놓을 정도로 근사한 남자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레녹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리할 일이 있어 불참한 테세우스를 대신하여 발드르 공가 대표로 참석한 리오넬 발드르였다. 리오넬 주위로 굵직한 중견 귀족들이 서 있었다. 귀부인들은 리오넬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얼른 뒤로 물러났지만, 레녹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부러 가슴을 활짝 폈다. 데스포네 공작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디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 오라비를 말리려 했다. 멍청하게 이런 곳에서 리오넬 발드르와 싸워봐야 득 될 것이 없었다. 물론, 레녹스의 입이 더 빨랐지만.
“제가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껏 위세를 과시하며 으스대는 레녹스의 모습에, 리오넬은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 연회가 무엇 때문에 열렸는지 제대로 파악이나 하시오.”
순간 말문이 막혔던 레녹스는, 무심히 그를 스쳐 지나가는 리오넬의 뒷모습을 형형한 시선으로 획 노려보았다. 그리고 저를 제지하려는 디안을 무시하고, 리오넬에게 화를 내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떠들썩하던 연회장이 파도가 굽이친 것처럼 술렁였다. 화를 내려던 레녹스도 술렁임이 시작된 입구를 바라보았다. 디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입구에 향했을 때, 보일 리 없는 파도가 다시 한번 연회장의 모두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밀려와 부딪쳤다. 하얀 포말이 일고 난 자리엔 고요한 침묵만이 남았다.
“…….”
디안의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레녹스 마저 멍하니 황후를 바라보았다.
“화, 황후 폐하 드셨습니다!!”
시종이 말을 더듬으면서 황후의 입장을 고했다.
황후는 치수가 작아 입을 수 없는 드레스 대신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머리에 쓴 금관이 수정 불빛에 반짝이고, 금관과 똑같은 색으로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요요하게 빛났다. 결혼식 때와 달리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이 황후의 걸음걸음마다 부드럽게 흩날렸는데, 그 때문인지 황후는 결혼식 때와 전혀 달라 보였다. 황후의 체격은 작고 가냘팠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가 작다고 느끼지 못했다. 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를 본 귀족들은 한결같이 짙고 강렬한 어둠을 떠올렸다. 샛노랗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은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 같았고, 하얀 얼굴은 창백한 달빛 같았다. 그 오싹하면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분위기에 입구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고, 아델은 그들이 비켜 주는 길을 따라 천천히 상석을 향해 걸었다. 악사들은 연주하던 활을 내리고 황후의 입장을 지켜보았고, 리오넬마저 제 앞을 스쳐 가는 황후를 멍하니 바라볼 정도였다. 연회장엔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직 황후의 발소리와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너른 홀을 가득 울렸다. 아델라이드는 텅 빈 황좌를 보며 비소를 머금었다. 차라리 황제가 없기를 바랐기에 주인 없이 텅 비어 있는 황좌가 마음에 들었다. 감히 누구도 오를 수 없었던 단상에 아델은 당연하다는 듯 발을 올렸다. 이윽고 황좌가 있는 곳까지 올라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군중을 바라보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곳에 모인 모두를 훑어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천천히, 차분하게 시선을 옮겼다. 황후가 입고 온 옷이 웨딩드레스라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내로라하는 귀족들마저 사로잡혔다. 마녀. 누군지 그 별명을 참으로 잘 지었다.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올 무렵, 황후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금빛 눈동자마저 달처럼 곱게 접어 휘었을 때 곳곳에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의 심장을 한 손에 쥐었다 편 아델은 웃으면서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좀 늦었군요.”
디안은 숨을 고르며 황후를 응시했다. 누구도 오를 수 없었던 황제의 계단을 거리낌 없이 밟고 올라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만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각각의 목소리로 떠들던 귀족들은 숨을 삼키고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바라보면 안 되는데. 디안은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지어 황후는 웨딩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왔음에도 위화감이 없었다. 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빗나갔다. 한편,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던 아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데스포네 공. 어떠십니까? 만찬은 즐거우신지요?”
그의 한 걸음 옆에는 우연인지 디안 푸아티에가 있었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황후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텅 비어 있던 황좌의 주인이 나타나자 악단은 웅장하고 장엄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팔걸이에 여유롭게 팔을 얹은 채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이토록 불편한 자리가 마련되면 귀족들은 두 무리로 나뉘게 된다. 눈치를 보며 뒤로 빠지는 자와, 새로 등장한 황후를 경계하며 정치의 파도를 읽으려는 자. 그 두 무리는 이미 눈빛부터가 다르기 마련이었다. 상석은 이래서 좋다. 사람들의 태도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온 이는, 에흐몬트에서 그나마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리오넬은 발드르 공가의 가신 가문 귀족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와 인사를 올렸다. 그들이 인사를 올리는 동안, 리오넬은 황좌에 앉은 황후를 바라보았다. 가뿐한 표정으로 말을 달리던 모습도, 이렇게 좌중을 휘어잡은 권위적인 모습도 모두 제 것인 듯 그녀에게 어울렸다. 여유로운 태도로 고개를 돌리던 아델은 저를 보고 있던 리오넬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햇살 아래에서와는 달리 짙고 어둡게 보이는 검은 눈동자.
‘리오넬 발드르.’
아델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리오넬의 뒤를 이어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앞다투어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그들끼리 경쟁이 붙었다. 담소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던 이들이 삽시간에 황후에게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바뀌어 줄까지 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만약 드레스가 없어서 결혼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황후가 호의적인 얼굴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디안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후는, 단 한순간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이 스치기는 했으나 지나가던 시종 시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나는 너에게 어떤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에 알 수 없는 모멸감이 치솟았다. 디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당신이 날 제대로 보지 않겠다면, 볼 수밖에 없게 해 주지.’
디안은 긴 줄을 무시하고 곧장 단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