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나의 연인이니 관심 두지 마시오2021.04.27.
디안의 모습에 데스포네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렇다고 그녀를 만류하지도 않았다. 디안이 사람들을 헤치고 황후 앞에 서자 귀족들의 시선이 묘해졌다. 몇몇 귀족들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믿고 하는 꼴 좀 보세요.”
“그러게요. 그 총애가 얼마나 모래성 같은 것일지 모르는 거죠. 아름다움과 사랑이 영원하리라 생각하는 것이 우습군요.”
“황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글쎄요. 오시자마자 첩에게 첫날밤까지 빼앗기셨으니 속 좀 타시겠죠?”
“하긴……. 우리 황후 폐하께서는 뭐랄까요, 아름답긴 하시지만…… 좀 무서워 보이시죠?”
“아름다운 여인으로서는 디안 푸아티에가 낫군요.”
귀족들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단지, 이 장면이 못 견디게 재밌을 뿐이었다. 아델은 친히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선사하려는 디안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황후와 황제의 정부가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자 귀족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음악을 연주하던 악단도 슬그머니 활을 내리며 두 사람을 관망할 정도였다. 디안은 황후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황후 폐하. 디안 푸아티에라 합니다.”
한 떨기 백합 같은 모습이었다. 아델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부드럽게 웃었다. 모두가 자신의 반응을 재고 있었기에, 눈썹 한 올까지 신경 쓰며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푸아티에 영애.”
“제가 결혼식과 이 연회를 준비하였는데, 마음에 드시는지요?”
당돌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황제의 정부가 마련한 연회에 대해, 황후는 무어라 답할 것인가? 귀족들의 음흉하게 반짝이는 시선이 황후에게 쏟아졌다. 그런데 황후는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디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 그것 역시도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새삼 깨달았다. 눈을 깜빡이던 한 귀부인은 자신의 속눈썹이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라 버렸다. 속눈썹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막감이 연회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황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그 간극은 오싹한 소름을 동반했다.
“고생 많았군요. 아, 그대가 준비한 연회용 드레스를 입지 못한 것에 대해 서운해하지 말아요. 아름다워 입고 싶었으나 치수가 한참 작더군요.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제야 황후가 웨딩드레스 차림임을 깨달은 귀부인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디안은 귀족들의 웅성거림에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가 난감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고트로프에서 보낸 치수대로 준비를 한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치수 기준이 달랐던 모양이에요. 불편을 끼쳐 드렸군요…….”
그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음악마저 사라진 홀에 별안간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귀족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엔 지금까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황제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귀족들은 그를 위해 일제히 뒤로 물러나 길을 만들었고, 카를은 그들을 가로질러 황좌를 향해 걸었다. 황후는 오늘도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녀는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의 여자였다. 한편 디안은 카를의 모습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는 그녀의 구원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태양이었다. 그러니 눈물이 차오른 것은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여린 눈매가 허물어지며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황후와 디안을 번갈아 보았다. 그 모습에 아델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퍼뜩 깨달았다.
‘울어? 지금 내가 울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절로 인상이 팍 찌푸려지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 내려는 찰나, 황제가 디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황후에게서 디안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군중 속에 숨어 있던 레녹스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귀족들의 눈은 커다랗게 변해 반짝였다. 아델은 무의식중에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폐하.”
가녀린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렸다.
‘나 참, 기가 막히네. 이건 또 새롭군. 나도 울어야 하나?’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본능적인 분노와 짜증이 치솟았다. 결혼식부터 시작해서 황제는 아예 황후라는 존재를 우스갯거리로 만들려 작정한 사람 같았다. 디안 푸아티에보다 더 아델의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인사를 하던 참이었습니다.”
“어떤 인사를 했기에 이리 우는 건가?”
황제의 질문에 아델은 치미는 뭔가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답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날카로워졌다.
“저야말로 왜 우는지 궁금하군요. 그녀가 직접 제게 다가와 인사를 했습니다. 왜 인사를 하려 했는지, 궁금하시면 영애에게 물어보시지요.”
그 말에 카를은 몸을 돌려 디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공포와 눈물이 범벅으로 얼룩져 있었다.
“저는…… 그저…… 황후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디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에겐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황제가 황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빛으로 사람 목을 조를 수 있었다면 이미 아델은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귀족들은 황제 부부의 날선 대치에 숨을 죽이며 눈을 반짝였다. 황제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황후를 노려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델은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델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휙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앉자 눈치를 보던 악단이 음악을 연주했다. 음악이 흐르자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내 연회장은 작은 소란 속에 휩싸였다. 황제는 황좌에 느른하게 기대어 앉아 시종이 건네는 샴페인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며 의례적으로 연회장을 둘러보던 그가 막 자리에 앉은 황후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관심 두지 마시오.”
정면을 노려보고 있던 아델은 황제의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연회장 한구석에서 자신을 애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디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 여자는 나의 연인이니. 관심을 두지 마라, 이 말이오.”
말을 마친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황후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한 줌의 온기도 없는 얼굴로,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나 또한 그대의 연인에게 관심 두지 않을 터이니. 알겠소?”
아델의 입술이 절로 위로 치솟았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기분이 나쁠 때면 웃음이 터지는 것이 버릇이라.
“그 말, 폐하의 연인에게도 좀 전해 주시겠어요? 제가 그녀와 마주한 것이 딱 두 번인데 모두 그녀가 직접 절 찾아온 만남이었답니다. 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말이에요.”
그에 황제는 잠시 침묵하며 샴페인을 몇 모금 마시더니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델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화려하게 웃어 주었다. 황후의 웃음에 귀족들은 작게 웅성댔다. 그때, 리오넬 주변에 있던 한 사람이 속삭였다.
“과연, 여유를 잃지 않으시는군요.”
리오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여유를 잃지 않았다기보다는, 잃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 같은데.’
황후는 말을 타고 달릴 때 보여 준 해사하고 가벼운 웃음이 아닌, 무게감 있는 권력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아델은 적당한 시점에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거칠게 드레스를 벗어 버린 아델은 아예 그것을 한쪽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어 보았지만 들끓는 가슴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말초신경을 타고 전해지는 찌릿한 감각에 아델은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밀폐된 공간, 황후의 검은 머리카락이 너울너울 춤을 추듯 공중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기류에 어둑한 방을 밝히던 촛불이 일렁였고 창문이 덜컥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작아 입을 수 없었던 드레스, 은근한 비웃음.
“디안 푸아티에.”
하늘하늘하게 가녀린 여자가 떠오르자 아델은 웃으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한참이나 이어진 음산한 웃음소리가 가라앉을 무렵,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호박색 술이 찰랑이며 잔에 가득 차자 아델은 그것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불을 마신 듯 목이 홧홧하게 뜨거웠지만, 용암처럼 들끓는 가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디안 푸아티에는 그렇다고 쳐.”
더 괘씸하고 이해도 되지 않는 쪽은 카를 울리히였다.
“그렇게 죽고 못 살 것 같으면 디안 푸아티에를 황후로 책봉할 것이지 왜 애먼 사람 데려다 놓고 그따위 짓거리야. 무슨 비운의 로맨스, 이런 거에 환상 있어?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 주는 백마 탄 황제, 이런 것에 환상 있냐고. 변태야?”
아델은 사나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 유모라도 있었으면 말을 쏟아내며 화를 풀었을 텐데. 결국 아델은 연거푸 술 두 잔을 더 들이켰다. 독하기로 유명한 에흐몬트 밀주를 석 잔이나, 그것도 원액으로 마셔 버리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래도 아델은 착실히 황실의 보물이라는 금관은 잘 벗어 모셔 둔 뒤에 신발을 벗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아름다운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뭐? 내 연인도 인정을 해 주겠다고? 기가 막히네. 아주 공평한 사람이야. 사랑? 사랑이라.”
아델의 얼굴엔 진심 어린 비웃음이 걸렸다. 사랑이라. 사랑, 그게 다 뭔가?
“아델라이드. 생각해라. ……생각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늘 가진 것이 많아 등한시했던 말이었다.
‘늘 가진 것처럼 행동해라. 두 손에 쥔 것이 없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두 눈을 부릅떠. 어깨를 늘어뜨리고 여유를 걸쳐 입어라. 가진 것이 없어졌을 땐 겸손하지 마라.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아챈단다.’
아델라이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을 되뇌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 * * 속된 표현으로 간을 본다는 말이 있다. 누구든 처음 어떤 집단에 들어가면 그 집단의 문화, 생태계를 파악하느라 몸을 사리기 마련이었다. 아델도 그럴 작정이었다. 제아무리 고트로프의 황녀라 한들, 에흐몬트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기 때문에 최소한 반년에서 일 년 정도는 조용히 지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제부로 아델은 그 생각을 폐기했다.
“황궁 총관리인이 현재 누구냐.”
“예?”
“총관리인. 그 단어로 지칭한다 들었는데.”
“현재 총관리인 자리가 공석입니다.”
“공석?”
“예.”
“그래도 대리인이 있었을 텐데. ……디안 푸아티에 백작 영애가 대리인이었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녀 이전의 총관리인은 누구였느냐?”
시녀들이 눈치만 보고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자 아델은 싱긋 웃으며 그녀들에게 몸을 기울였다.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본다 생각하느냐?”
“한나 긱스 백작 부인입니다.”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그녀를 불러오너라. 내가 만나고자 한다고 정중히 전해.”
그 말에 시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나 긱스를 내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를 등에 업은 디안 푸아티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후는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고, 그들은 긱스 백작가로 사람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무소의 뿔처럼 거침없이 명령을 더 내렸다.
“황궁법 총서를 가져오너라. 최신판으로.”
* * * 잠시 후. 아델은 황궁법 총서를 읽다 말고 황제 연표를 들춰 보았다. 총서 앞장에 실린 연표엔 당시 개정 혹은 제정되었던 법률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한 인물이 압도적으로 많은 법을 개정 및 제정하여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개싸움을 한 인간이 누구야, 도대체?”
에흐몬트 황궁 관리에 관한 법은 ‘누더기 법’이라고 불릴 정도인데, 과거에 사이가 나빴던 황제와 황후가 황궁 관리 권한을 두고 싸움에 싸움을 거듭한 결과였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인사발령권은 황후에게 있으나 고용을 해제하는 승인은 황제에게 받아야 한다거나, 황궁 거주와 관한 것은 황후에게 결재권이 있다는 식이었다. 어찌나 항목이 세세한지 심지어 황제가 기거하는 궁의 벽지 선택권은 황제에게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선대 황후는 관련 책자를 보다가 ‘싸움도 정도 것이지, 이게 무슨 민폐인가!’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역대 황제들은 황후에게 자신이 가진 궁 내부의 결재권을 위임함으로써 대부분의 권한이 황후에게 올 수 있도록 안배했다.
“현재 황제가 가진 권한 위임을 내가 아니라, 디안 푸아티에에게 해 뒀다 이거지.”
신랄하게 중얼거린 아델이 혀를 차며 읽던 페이지로 책을 넘겼다.
“그래도 황후 고유 권한은 임명과 동시에 부여받는 것이니 다행이군.”
황후가 할 일은 무수히 많았다. 그 모든 것을 홀로 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대 황후들은 측근을 황궁 총관리인으로 임명하여 관리를 효율적으로 했다고 한다. 아델이 부른 한나 긱스 부인은 바로 선대 황후가 임명한 황궁 총관리인이었다. 잠시 후,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방문객이 있음을 알렸다. 당연히 한나 긱스 부인일 줄 알았는데, 방문객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