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보좌관을 들이시지요2021.05.01.
“결혼식 때 뵙고 처음 뵙습니다, 황후 폐하.”
특별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방문객이 인사를 올리자 아델도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랜드 공. 그렇지 않아도 한번 따로 뵙고 싶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은 엘리자베타 울리히 그랜드였다. 황제의 이복 누이인 그녀는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울리히 황가 특유의 붉은 기가 도는 보라색 눈동자와 금발을 가진 엘리자베타는 황제와 비슷한 듯 달랐다. 황제가 예민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가졌다면, 엘리자베타는 차갑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가졌다.
“앉으시죠.”
“예, 황후 폐하.”
두 사람이 마주 앉자 시녀들이 자연스럽게 다과를 내어 왔다. 그녀들이 내어오는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자베타가 아델에게 독대를 청했다.
“주위를 물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에 아델도 선뜻 응했다.
“잠시 나가 있거라.”
“예, 폐하.”
시녀들이 종종거리며 방에서 물러나자 아델은 엘리자베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엘리자베타는 따뜻한 찻잔에서 오르는 투명한 김을 바라보다가 그 너머에서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햇살이 좋은 계절이라 창 너머까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강렬한 햇살의 한 허리를 베어 두 눈동자에 담아낸 듯한 사람이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 실례했군요, 황후 폐하. 폐하의 눈동자가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말입니다. 용서하세요.”
“내 눈동자 색이 특이하긴 하지요. 고국에서는 그래서 나를 ‘고트로프의 흑표범’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물론 내 뒤에서요.”
“흑표범이라……. 실제로 본 적 없으나 어쩐지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아델은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엘리자베타는 차를 마시는 황후를 다시 한번 재어 보듯 바라보았다. 다시 이어지는 묘한 시선에 아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엘리자베타를 직시했다. 두 사람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서로를 한참이나 마주 보았다. 무례라고 느껴질 만큼이나 한참 황후를 바라본 끝에야 엘리자베타는 황후의 체구가 참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가 큰 그녀의 어깨에 간신히 정수리가 닿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듯했다. 그럼에도 연약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다. 황후는 존재감만으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이미 결혼식에서 보았으며, 지금 확인했다.
“저는 황후 폐하가 마음에 듭니다.”
두서없는 말에 아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유감스럽게도 에흐몬트에 대한 정보가 없다시피 했다. 눈앞의 그랜드 공작에 대해서도 황제의 이복 누이라는 점 이외엔 아는 것이 전무 했다. 아델은 그랜드 공작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가 궁금했다. 그때, 엘리자베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나 긱스 백작 부인을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
“그녀는 제 유모였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한나 긱스 백작 부인을 들이시려는 것은 황궁에서 황후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미 아닌가요?”
“황후로서 황궁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리하셔야지요.”
“…….”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디안 푸아티에의 옆엔 황제의 총애가, 뒤엔 아우구스 울리히 데스포네 공작이 있죠.”
엘리자베타는 차로 입을 적신 뒤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 틈에서 폐하께서는 황후로서의 입지를 지켜 내셔야 합니다. 지금 황궁에 있는 사람들을 믿으셔서는 안 됩니다. 모두 데스포네 공작과 디안 푸아티에의 사람들이니.”
아델은 엘리자베타의 말을 묵묵한 태도로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황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내가 황궁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함에 있어 공께서는 어떤 이로운 일이 있으십니까?”
목소리는 나직했고, 두 눈은 물러남 없이 번뜩였다. 흡사 정글의 맹수가 몸을 낮추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발톱을 드러낸 것 같은 모습에 엘리자베타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엘리자베타 역시도 에흐몬트의 황녀였으며, 현재는 대 영지를 거느린 공작이었다. 한 방 맞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직설적인 질문이었으나, 엘리자베타는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심정을 드러냈다.
“황제께서는 그 두 사람 틈에 끼어 제대로 된 황도를 걷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니 저는 황후께서 디안 푸아티에와 데스포네 공작의 연결고리를 끊어 놓기를 간절히 바라는 겁니다.”
“황후로서 황궁에서의 입지를 다잡아서?”
“그렇습니다. 한나 긱스 백작 부인을 들이시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다만, 황제께서 직접 내보낸 사람이니 총관리인 자리를 부여하시면 싸움이 커질 겁니다. 옆에 두고 자문을 구하시는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조언을 드리자면, 보좌관을 구한다는 공고를 내십시오.”
“보좌관?”
“황후의 보좌관은 늘 있어 왔던 제도입니다. 황후의 일정 및 업무를 직접 조율하고 때로는 대리로 결재하는 존재인데, 이것은 황후께서 역할을 부여하기 나름입니다.”
“그게 답니까? 황궁 총관리인을 비서 격으로 쓴다 들었습니다만.”
“황궁 총관리인은 말 그대로 황궁 내부적인 일을 도맡는 사람이죠. 주로 여성이었습니다. 반면 황후의 보좌관은, 주로 남성입니다. 제 모후께선 제 부친인 선대 황제께서 정부를 갈아치울 때마다 보란 듯이 보좌관의 수를 늘리셨지요.”
그 말에 아델은 실소했다.
“그러니까 황제께서 정부를 두셨으니 나도 보란 듯이 정부를 두라, 이 말입니까?”
“고트로프 황궁 분위기는 어떤지 모르나, 이곳 에흐몬트에서는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맞바람을 피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황제가 만인의 앞에서 황후 폐하를 모욕했는데도 가만히 계신다면, 이곳의 귀족들은 폐하의 존재를 황제의 첩만도 못하다고 인식할 것이란 뜻입니다. 에흐몬트는 무인의 나라입니다. 강한 것을 숭상하고 약한 것을 멸시하는 사람들이에요. 기세에서 밀리시면 안 됩니다.”
아델라이드는 입가에 걸려 있던 실소의 흔적을 지우며 엘리자베타의 말에 집중했다. 황후가 진지한 태도로 듣자 엘리자베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황후에게 몸을 기울였다.
“현재 이곳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은 데스포네 공작입니다. 한 손엔 마법사단을 장악하여 권력을, 나머지 한 손엔 디안 푸아티에를 이용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반발하는 세력이 없을 것 같습니까?”
“그에 대적하는 자들이 내가 내는 공고에 응할 것이란 뜻입니까?”
엘리자베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보좌관은 대대로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로 이용되었습니다. 한낱 정부라는 의미만 남았다면 이곳 에흐몬트 사람들은 과감히 그 자리를 보다 저급한 단어로 갈음했을 겁니다.”
“만약 내가 보좌관을 들인다면……. 공께서는 누구를 추천하시겠습니까?”
황후의 질문에 그랜드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몇몇 가문의 이름을 읊어 주었다. 아델은 공작의 말을 뇌리에 새겼다.
“그리고 설마 그럴 리는 없겠습니다만, 혹시라도 발드르 공가에서 지원자를 보낸다면, 더 볼 것도 없이 그를 선택하길 추천드립니다.”
“발드르 공가?”
아델의 질문에 그랜드 공작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연락하십시오. 한나 긱스 백작 부인을 통해서 쉽게 연락이 가능할 것입니다, 황후 폐하.”
* * * 한나 긱스. 선대 황후와의 인연으로 그랜드 공작의 유모이자 대모가 될 수 있었던 그녀는 오랫동안 황궁의 실세로 군림해 왔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상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무너졌다. 디안 푸아티에. 화병에 담긴 한 떨기 백합 같은 그녀를 본 순간 긱스 부인은 숨을 삼켰다. 선대 황후의 역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의 근원. 디안 푸아티에는 카를 울리히의 생모와 너무도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황제는 곧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어느 날 긱스 부인에게서 모든 권한을 회수해 버렸다. 황제의 권한 대행은 디안 푸아티에가 하게 되었다. 황후가 공석인 상황에서 황제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디안의 첫 번째 명령은 황궁에서 기거하고 있던 긱스 부인에 대한 퇴거였다. 그랜드 공작이 그 명령에 대해 직접 항의했으나, 황제 카를은 그것이 제 뜻이었다는 것을 밝히며 디안의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나 긱스는 퇴임식도 치르지 못하고 궁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던 관록의 노부인은, 새로 등극한 황후의 부름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목깃을 세운 정장 드레스, 한 올도 남김없이 틀어 올린 은백발. 호리호리한 체격의 긱스 부인의 푸른 눈동자는 설원에 반사된 시퍼런 하늘 같았다. 아델라이드가 짙은 어둠을 떠올리게 한다면, 긱스 부인은 뼛속까지 시린 설원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시오. 나의 요청에 응해 주어 고맙소.”
“저의 기쁨입니다, 황후 폐하.”
긱스 부인은 황후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고개를 드시오.”
천천히 고개를 들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황후의 응접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코끝이 시큰하고 눈가가 뜨거워져서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숨을 삼켰다. 이곳은, 그녀의 인생이었다. 깊고 옅은 주름 고랑마다 서리처럼 내려 있던 냉정함과 깐깐함은 그저 이 공간에 왔다는 이유 하나로 옅어지고 있었다. 아델은 노부인이 과거에 잠길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잠시 뒤, 현실로 돌아온 긱스 부인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황후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오랜만에 이곳에 오니 감개무량하여…….”
“선대 황후께서 사용하시던 그대로겠군?”
긱스 부인은 소파를 살짝 쓸어 보며 말했다.
“이 소파도 제가 고른 물건이었습니다. 한데 너무 옛날 물건들이라 이젠 바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그에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오묘한 금빛 눈동자가 길게 휘어지고 입술이 누운 달처럼 기울어지자 창백한 뺨에 광대가 솟았다.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에 긱스 부인마저도 멍하니 황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 황후가 속삭였다.
“부인께 그런 일들을 좀 맡기고 싶소만?”
“흠흠.”
“안 되겠소?”
“저야 감사하나, 황제 폐하께서 탐탁지 않게 여기실 겁니다.”
“부인은 괜찮다는 말이오?”
그 물음에 긱스 부인은 그렇지 않아도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다시 한번 세우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말씀드렸듯 제 기쁨입니다, 황후 폐하.”
“고맙소.”
“저에게 시키실 일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시켜 주십시오. 저는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답니다.”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궁법 총서에 대해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긱스 부인과 논의해야 할 일은 예상치 않게 발생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와 기가 막힌 일에 대해 알린 것이다.
“황후 폐하, 저…… 최근 주문한 드레스가 지금 도착을 했는데요.”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것이…… 저기…….”
시녀가 한참이나 머뭇거리자 소파에 앉아 있던 긱스 부인마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려워 말고 제대로 고하거라.”
황후의 담담한 요청에 시녀는 결심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
“황궁 재정청에서 황후 폐하의 드레스 대금을 치를 수 없다고 말했다 합니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뭐?”
이게 말이야 소야? 황후의 드레스 대금을 줄 수 없다니, 이런 거지꼴을 봤나! 목구멍에서 육두문자가 튀어 나가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아델은 혀를 씹는 기분으로 간신히 입을 틀어막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자, 그러니까 내 드레스가 왔는데 황궁 재정청에서 드레스 대금을 치를 수 없…….”
말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황후는 결국 입을 다물며 눈을 감았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은 평온해 보였으나, 그녀 주위로 넘실거리는 기운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후, 천천히 드러나는 황금색 눈동자엔 야성이 어려 있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치민 시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황후는 시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긱스 부인을 바라보았다.
“황후궁으로 불러 개인적으로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 낫겠소?”
공포에 질린 시녀와 달리, 관록의 노부인은 냉정한 표정과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문이 나 봤자 황후 폐하의 위신만 떨어지니 궁으로 불러 대금을 치르시는 것이 낫습니다. 웃돈을 챙겨 주어 입막음도 하시지요. 다만 폐하께서 직접 만날 이유는 없습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너는 가서 그들을 데려오너라.”
“예, 황후 폐하.”
시녀가 꽁지에 불이 붙은 짐승처럼 후다닥 응접실에서 나가자, 아델은 자신의 방으로 가 비상금을 꺼냈다.
“이걸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이야.”
금괴 하나를 꺼내 든 아델은 그것을 실크 주머니에 넣었다. 묵직한 주머니를 으스러져라 쥔 가는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해 보자 이거지.”
번뜩이는 황금보다 빛나는 눈을 치켜뜬 아델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