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비규환 중신 회의2021.05.04.
긱스 부인은 황후가 건네는 금괴를 살펴보았다.
“드레스가 어느 수준인지 보고 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만 혹, 잔금을 남기지 않고 이 금괴 하나를 다 써도 괜찮을까요? 황후 폐하께서 후하시더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 좋을 듯하여 여쭙습니다.”
“그러라고 가져온 것이니 남기지 말고 쓰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황후는 냉수를 마셔 속을 달래며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요?”
“……황후궁에 배분된 예산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황후궁에 배분된 예산이 없다?”
“에흐몬트 황궁은 연말에 다음연도 예산안을 책정하는데, 전년도엔 황후 폐하께서 계시지 않았으니 아마도 예산안을 편성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당연하다는 의미요?”
“물론 아닙니다. 긴급 추경 제도로 얼마든지 예산 재편성이 가능하지요. 문제는 추경에 관한 권한이 황제 폐하께만 부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때, 시녀가 드레스 상점의 주인이 도착함을 알렸고 아델과 긱스 부인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는 예의 웃는 얼굴로 긱스 부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현명하게 잘 처리해주시오, 부인.”
“걱정 마십시오. 한데 황후 폐하, 어딜 가려 하십니까?”
황후가 해사하게 웃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노부인마저 간담이 서늘해질 것 같은 미소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지는 법이 없지. 걱정 말고 이따 봅시다. 오늘, 나의 궁에서 거하도록 하시오.”
황후는 한쪽 눈을 접어 웃으며 속삭인 뒤 성큼성큼 멀어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긱스 부인은 홀린 듯이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부인.”
시녀가 다가와 그녀를 호명할 때까지 긱스 부인은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작게 웃으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안내해 주게.”
“예, 따라오십시오.”
* * * 아델은 곧장 황제궁으로 향했다. 그곳은 황제의 침실과 국정을 운영하는 총 회의실이 위치한 곳이었다. 화려한 황후궁에 비해 정갈하고 실용적이라는 느낌이 물씬 드는 공간이었다. 현재 중신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지 황제궁 앞엔 제각각의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즐비하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황후의 등장에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아델은 가볍게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중신 회의가 있나 보군?”
정문을 통과하며 아델이 묻자 문지기는 정중히 그렇다고 답했다. 황후의 방문을 전해 들은 시종들이 서둘러 달려 나와 인사를 올리자 아델은 단도직입적으로 방문의 목적을 말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싶구나.”
“예, 황후 폐하. 잠시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면 폐하께 여쭙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응접실?”
“예.”
고개를 끄덕이던 황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중신 회의장엔 대기실이 없느냐?”
“물론 대기실이 있습니다만, 안내해 드릴 응접실에 비하여 안락하지가 않습니다.”
“상관없다. 에흐몬트의 중신 회의장도 한번 보고 싶으니 그곳으로 안내하여라.”
황후는 반론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고, 시종은 그녀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그 무렵, 중신 회의장. 권태로운 표정으로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황제는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무성의한 손길로 들춰 보았다. 그의 오른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데스포네 공작이 목을 길게 빼 황제 앞에 놓인 서류를 힐끔거렸다. 서류의 내용이 잘 보이지 않자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리던 그는, 맞은편에서 저를 보고 있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투명한 안경을 쓴 남자의 이름은 테세우스 발드르. 발드르 공가의 수장이며 광활한 영지의 주인인 그는 올해 스물아홉의 젊은 신료였다. 젊은 나이였으나, 그는 역대 발드르 공작 중 단연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데스포네 공작과 시선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올해 스물일곱이 된 리오넬 발드르가 있었다.
발드르 공제(공작의 동생)인 그는 타고난 무인으로, 현재 황실근위대 단장직과 에흐몬트 국방부 장관직을 겸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기사들은 그를 ‘단장님’이라, 중신들은 그를 ‘국방부 장관’이라 불렀다. 데스포네 공작은 발드르 형제를 번갈아 보며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저놈들 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뜻을 같이했다면 무척 아끼고 예뻐해 주었을 텐데. 하긴, 그 발드르 선대 공작의 아들들이니 그와 생각이 같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데스포네 공작이 발드르 형제를 응시하며 상념에 잠겼을 때였다.
“폐하! 제발, 제발 스트라이커(공격형 마법사: 탑의 핵을 직접 공격 가능)와 키퍼(수비형 마법사: 탑이 커지는 속도, 혹은 지상으로 내려오는 속도를 지연시킴)들을 보내 주십시오. 다 죽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의 상념이 한 남자의 절규에 깨졌다.
‘쯧. 애처럼 징징거리며 울고 있어. 시끄럽게.’
데스포네 공작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막아도 막아도 끊임없이 몰려나옵니다. 이젠 비행형 마수까지 출몰하고 있는데 더는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스트라이커와 키퍼가 탑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거참, 우리는 어디 놀고 있는 줄 압니까?”
울음 섞인 호소의 허리를 툭 끊은 것은, 데스포네 공작 오른편에 앉아 있던 레녹스 푸아티에였다.
“지금 1, 2급 탑이 영지에 세워진 분들도 아무 말 안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칼뱅 백작령에 세워진 것은 고작 4급, 4급 탑이라고요.”
“그게 지금 직경이 더 넓어졌다고 하지 않았소?! 비행형 마수까지 출몰했단 말이오! 4급이 아니오!!”
“4급이라고 문서에 적혀 있는데 아니라고 말하는 게 어딨습니까?!”
레녹스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칼뱅 백작은 울분을 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아주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폐하!!! 일단 기사들을 때려 박아서 마수나 막고 있으십시오, 칼뱅 백!!”
무릎을 꿇었던 칼뱅 백작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레녹스를 노려보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영지가 쑥대밭이 되고 있어 읍소하는 사람에 이기적이라니.”
레녹스와 칼뱅 백작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행형 마수가 출몰하는 중대형 탑이 영지에 세워졌다면 재앙이 맞습니다. 오죽하면 영주가 직접 이곳으로 달려와 읍소하겠습니까? 이기적이라니! 분란이 될 만한 말은 삼가시오, 푸아티에 백!”
발드르 공작이 레녹스를 향해 경고했다. 그에 레녹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대놓고 발드르 공작의 말을 비웃자 몇몇 귀족들이 반발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공가 발드르의 수장이시오! 예를 다하시오, 푸아티에 백!”
“어디 감히 코웃음을 친단 말이오?!”
귀족들이 반발하자 레녹스 푸아티에는 사납게 눈을 치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평민 출신임에도 승계 가능한 백작 지위를 거머쥔 그는 분명 출중한 실력의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감히 발드르 공작에 견줄 위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데스포네 공작과 디안 푸아티에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이었다.
“제가 무슨 틀린 말을 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레녹스가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묻자 귀족들의 이목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턱을 괴고 상황을 관망하던 카를은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발드르 형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테이블 언저리를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법사단 부단장이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으리라 보오.”
그에 푸아티에 백작이 입술을 끌어 올려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칼뱅 백.”
“……예, 폐하.”
“영지 일은 유감이오.”
“제발……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폐하. 폐하의 수많은 백성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칼뱅 백작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자비를 구하는 눈물이 그의 옷깃을 적시는 동안, 레녹스 푸아티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제 이득이 사라지는 것을 왜 폐하께 묻는지, 원.”
“……지금 뭐라고 했느냐?!!! 레녹스 푸아티에!!!!”
칼뱅 백작의 화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고함 소리가 회의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레녹스 푸아티에는 마주 벌떡 일어나 소리를 쳤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뭣이?!!”
회의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리오넬과 테세우스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레녹스를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동시에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칼뱅 백작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이 사태를 말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푸아티에 백, 그만하게.”
레녹스를 말린 것은 그의 고성을 참지 못한 데스포네 공작이었다. 레녹스는 그의 제지에 곧바로 응했다.
“예, 공작 전하.”
반면 칼뱅 백작은 벌겋게 물든 얼굴로 연신 씩씩대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회의장의 공기는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 같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상황을 관망하던 리오넬이 깊은 한숨을 몰아쉰 뒤 침묵을 깼다.
“폐하, 칼뱅 백작령에 비행형 마수가 출몰한다면 우선적으로 마법사 지원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인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황궁에 마법사단이 상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레녹스가 곧장 항의했다.
“우리가 놀고먹는 줄 아십니까?!!”
그러자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몇몇 귀족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마법사단은 왜 있는 것인가?! 황궁에만 상주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는 가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이오?!!!”
“우리가 고작 4급짜리 탑을 파괴하러 간 사이에 황궁에 1급 탑이 내려오면 어찌하렵니까?! 예?!”
“억지 작작 부리시오!!”
다시 싸움이 벌어지려 하자 이 회의 자체가 지겨워진 황제가 탁상을 세게 두드렸다.
“그만! 끝도 없겠소.”
황제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오늘 회의를 이쯤에서 일단 마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도저히 마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데스포네 공작과 푸아티에 백작이 적극 동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들이 일어나자 회의는 파장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리오넬과 테세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칼뱅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회의가 그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때, 시종이 황제에게 다가가 말을 전했다.
“폐하. 황후 폐하께오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후?”
나갈 채비를 하던 중신들은 멈칫하며 황제와 시종을 바라보았다.
“예. 지금 회의장 대기실에서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던 카를은 도로 자리에 앉으며 명했다.
“멀리 갈 것 있느냐? 중신들이 나가거든 이곳으로 모셔라.”
“알겠습니다.”
그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던 레녹스 푸아티에가 슬그머니 입을 끌어 올려 웃었다. * * * 한편 한창 중신회의가 한창일 무렵, 회의장 밖 대기실에서 황후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듣고 있는 듯 움직임을 멈춘 채 소리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육중한 문을 뚫고 대기실까지 중신들의 고성이 들려오자 대기실을 지키던 시종 두 사람은 민망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역시 황후는 고성이 들려오자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방금 소리를 지른 이가 누구인가?”
“레녹스 푸아티에 백작이신 듯합니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문 너머의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의자를 미는 소리가 소란하게 들려왔다. 회의가 끝난 듯하자 황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손도 대지 않았던 찻잔을 들어 올린 뒤,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며 오만한 표정으로 중신 회의장 문을 응시했다. 보고 있던 시종들이 입을 떡 벌릴 만한 태세 전환이었다. 잠시 후, 육중한 문이 열리자 중신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중신 회의장은 구조상 대기실을 통과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에, 중신들은 나오는 족족 황후와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황후와 눈이 마주친 중신들은 서둘러 인사를 올리느라 바빴다. 인원이 많아 일일이 인사를 받기 어렵던 아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이제 우아하게 일어나서 인사를 해 볼까?’ 하는 찰나였다.
“질부!”
아델이 제 귀를 의심할 정도로 황당한 호명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