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깃펜에 달린 깃털처럼2021.05.08.
그것은 막 회의장 문턱을 넘던 발드르 형제마저 눈을 크게 뜨며 시선을 돌릴 말이었다. 순식간에 이목이 한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온 데스포네 공작이 화통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한번 황후를 불렀다.
“질부! 이런 곳에서 뵈니 반갑습니다.”
리오넬과 테세우스는 반사적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이 무례하고 황당한 호명에 과연 황후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비단 두 사람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다른 귀족들 역시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공을 던진 데스포네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황후는 공작의 인사를 받기는커녕 고요한 눈빛으로 데스포네 공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공단 인형처럼 느껴질 만큼 무기질적이었다.
“…….”
고요한 밤바다를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고요하여 평화롭다가, 어느 순간 묘한 두려움이 일기 마련이다. 황후의 침묵은 곧 기묘한 불안으로 바뀌어 대기실의 공기를 흔들었다. 살얼음이 낀 듯한 냉기, 시계 초침 소리만 요란하게 들리는 불안한 정적,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 황후는 웃음기 한 점 없는 눈으로 공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과 창백한 안색, 어깨에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금빛 눈동자. 묘한 분위기에 끌려 황후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소름을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분위기가 황후의 온몸에서 넘실거렸다. 아델은 자신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더불어 상대가 느끼는 미묘한 공포를 귀신같이 알아챘다. 대기실의 분위기가 기묘해지는 순간, 아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만개하는 듯한 황후의 미소에 곳곳에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분위기를 바꾼 뒤, 아델은 데스포네 공작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모국어가 아닌지라 부끄럽게도 에흐몬트 언어가 익숙하지 않아 묻습니다. ‘질부’가, ‘황후’를 뜻하는 단어인가요? 아우구스 울리히 데스포네 공?”
그러나 데스포네 공작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가운 어조로 답했다.
“언짢으셨다면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저는 그저 울리히 황가의 어른으로서, 친근함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너그러이 받아 주실 줄 알았는데…… 용서하세요.”
“친근함을 표시하고 싶었다 한들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앞으로는 신중하시길 바랍니다.”
황후는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데스포네 공작이 사족을 덧붙이기 전에 다른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만나 뵙게 되어 모두 영광입니다.”
아델은 줄줄이 겹쳐 서 있는 중신들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결혼식과 연회 모두 정신이 없었던 터라 마치 처음 보는 듯한 사람들이 많았다. 아델의 시선이 잠시 발드르 형제에게 머물렀다. 테세우스에서 리오넬에게로 시선을 옮겨 왔을 때, 아델은 리오넬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밝은 곳에선 푸르게 보이던 눈동자가 실내에선 검게 보였다. 그는 홀린 듯 황후를 마주 보다가 눈을 살짝 내리깔듯 묵례했고, 아델은 그런 그에게 보일 듯 말 듯 웃어주었다. 아델은 시선을 돌려 하얗게 질려 있는 칼뱅 백작을 바라보았다. 초췌한 몰골을 보아하니, 레녹스 푸아티에와 고성을 주고받았던 사람이 틀림없어 보였다.
“칼뱅 백.”
“……예?”
칼뱅 백작은 갑작스러운 황후의 부름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일면식도 없는 백작을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황후는 그를 바라보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비행형 마수까지 나온다 했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던 칼뱅 백작은, 그녀의 물음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지역 단위마다 배치된 마법사가 없소?”
그 질문엔 옆에 있던 레녹스 푸아티에가 불쑥 대답했다.
“마법사는 중앙에서 관리합니다, 황후 폐하.”
아델이 고개를 돌려 레녹스를 보자, 그는 그녀를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때, 시종이 나오더니 정중히 황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옆으로 물러나며 황후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아델은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대가 마법사 집단의 수장이오?”
“아, 저는 부단장입니다.”
레녹스가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델은 레녹스의 반듯한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묘한 어조로 물었다.
“비행형 마수가 출몰한 탑을 에흐몬트에서는 중급으로 분류하오? 듣자 하니 마법사를 파견하지 않겠다던데. 아,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었소. 들리더군.”
황후의 질문에 레녹스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빠르게 폈다. 그리고 황후가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걱정스럽겠지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황궁엔 절대 마수나 탑 따위가 얼씬 못하도록 제가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물론 스트라이커랍니다.”
“그렇소?”
“예.”
황후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냉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잘 알겠소.”
“…….”
레녹스를 비롯한 중신들은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지 모를 찝찝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녹스가 데스포네 공작에게 조용히 물었다.
“제가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글쎄.”
데스포네 공작은 묘한 눈길로 황후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테세우스가 걸음을 옮겼다.
“리오넬, 가자.”
황후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리오넬은 테세우스의 뒤를 따라 몸을 돌렸다. 물결처럼 함께 걸음을 옮기는 여러 중신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황후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데스포네 공작이 ‘질부’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을 입에 담은 것도, 레녹스가 황후의 하문에 성의 없이 엉뚱한 답을 내놓은 것도, 결국 그녀를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그러한 도발에 동요하기는커녕 더없이 자연스럽고 귀족적인 대처로 제 존재를 다시 한번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잠시의 침묵과 오연한 눈빛, 냉정하고도 정제된 태도. 그것은 실로 지배자로 타고난 자의 것이었다. 리오넬은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려 황후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 * * 세로로 긴 테이블의 상석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 황제는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황후를 바라보았음에도 가벼운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아델은 넓은 회의장을 천천히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회의장의 실내장식 따위는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긴 탁상을 따라 걷는 동안 그녀의 신경은 온통 얼음 화살 같은 황제의 시선에 닿아 있었다. 뺨에 와닿는 냉기는 혹한의 동토 같고, 막히는 숨은 타는 듯한 사막 위 뜨겁고 메마른 공기를 떠올리게 했다. 사막의 열기와 극지의 냉기가 두 사람 사이를 어지러이 맴돌고 있었다. 아델은 적당한 위치에서 멈춰 섰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는 현재 두 사람의 관계를 대변하는 듯했다.
아델은 아랫배에 힘을 단단히 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가 그와 같을 것이다. 한 줌의 배려도, 한 줌의 이해도 없는 차가운 시선과 표정에 아델의 눈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드레스 대금과 관련한 것을 논의하러 온 길이었다. 그가 괘씸했으나 그렇다고 싸우기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당장은 황제인 그와 싸울 힘도 없었다. 하지만 야멸차리만치 싸늘한 표정을 마주하니 아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녀는 직접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당황하였으나 아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잠깐 독대를 청해도 될까요?”
“그러시오. 차 마시겠소?”
“대기실에서 마셨습니다.”
“다과는 필요 없다. 다들 물러가라.”
두 사람의 대화엔 조금의 틈도 없었다. 시종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달칵, 문 닫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문이 닫히자마자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황제가 물었다. 물론 그런다고 주눅 들 아델도 아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녀는 황제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되물었다.
“국혼을 청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의미요?”
“저를 도대체 왜 황후로 책봉하셨습니까? 국혼을 먼저 청한 것은 폐하셨습니다.”
“…….”
황후의 물음에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것 같기도 하고, 입 안의 말을 내뱉어도 될지를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결심한 듯 눈썹을 한 번 까딱인 카를이 고개를 기울이며 황후를 응시했다. 햇살이 높은 콧대에 걸려 긴 그늘을 만들었다. 산골짜기처럼 그늘진 눈으로 황제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저 있음.”
“…….”
“그저, 존재함. 마치…….”
황제는 깃펜을 들어 올려 화려한 깃털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이 깃펜에 달린 깃털처럼, 그저 존재함. 있는 것만으로 그대는 그대의 모든 의미를 다한 것이오.”
그것은 언뜻 다정한 말로 들렸다. 그저 있는 것만으로 의미를 다했다라. 아델의 시선이 깃펜의 풍성한 깃털에 닿았다.
‘깃펜에 달린 깃털처럼, 그저 존재함.’
깃펜의 촉도, 몸통도 아닌 깃털. 깃털 없는 깃펜을 본 적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글씨를 쓰는 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황후로서 자리나 지켜라, 이런 의미인가요?”
한때 고트로프의 황태녀였던 아델라이드의 자존심이 와락 구겨졌다. 구겨진 자존심이 잘게 찢어진 종이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저 차갑기만 하던 기류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것조차, 진정 원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소?”
“그럼 제 위신을 굳이 왜 깎아내리셨습니까?”
“그런 적 없소.”
단호한 답에 아델은 피식 웃어 버렸다. 결혼식과 연회에서 그녀가 겪은 수모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델은 조금 더 선명한 말로 그를 몰아세웠다.
“제가 디안 푸아티에를 해코지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서 하셨던 일입니까?”
지금까지 반론을 해 오던 황제도 그 물음엔 침묵했다. 결국 그런 이유였던 것이다. 도대체 일국의 황제란 자가 제정신이냐고 퍼붓고 싶었다. 조목조목 그가 했던 추태들을 탁상 위로 끄집어내어 반박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황제와 입씨름을 한다고 한들 득이 될 것이 있을까. 잠깐 속이야 시원하겠으나, 현재 아쉬운 쪽은 아델 그녀였다. 치미는 분노를 꾹꾹 밟아 누르며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황제가 비스듬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선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생활을 원하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옆으로 쏟아진 갸름한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창백했다. 밤하늘의 창백한 달빛처럼, 황후의 분노는 요요히 빛났다.
“황후로서 존재함을 원하신다니 다행이군요. 저 역시도 그것을 원합니다. 저는 에흐몬트 황후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할 겁니다.”
“…….”
“하니 폐하께서는 부디 제가 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협조를 해 주십시오.”
“어떤 협조를 말하는 것이오?”
“우선,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 자문을 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황궁을 관리하고 있는 이를 불러 묻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디안 푸아티에더군요. 제가 그녀를 불러 자문을 구하는 것은 어렵겠죠.”
카를도 할 말이 없었다. 정부를 불러 자문을 구하는 황후라니? 모두의 비웃음을 살 일이었다.
“하여 선대 총관리인이었던 한나 긱스 백작 부인에게 자문을 구하고자 합니다.”
어차피 긱스 부인이 황궁에 들어온 것이 곧 소문날 테니 아델은 미리 선수를 쳤다.
“한나 긱스?”
“폐하께서 그녀를 궁 밖으로 내보내셨다기에 양해를 구하는 겁니다. 다만 총관리인으로 두지는 않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카를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반박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황후궁에 예산이 없더군요. 긴급 추경을 부탁드립니다.”
아델은 사무적인 어투로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번에야말로 황제는 말을 잃었다. * * * 황후가 나간 문을 바라보던 카를은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에흐몬트 황후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 드레스가 환영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후우…….”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해도 가슴은 불안하게 술렁였다. 황제가 되었음에도 과거의 잔상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사락거리는 붉은 드레스 자락. 굽이치는 붉은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싶었던 아이의 작은 손은 결국 치맛자락에 닿지 못했다.
‘가엾은 내 아들. 황후께서는 끝내 너를 인정하지 않으실 거야.’
생모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붉은 드레스를 즐겨 입었던, 완벽해 보이던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카를은 깊고 긴 한숨을 내쉰 뒤 회의장으로 들어온 시종에게 명했다.
“디안을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