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저는 폐하만 있으면 돼요2021.05.11.
잠시 후, 디안이 중신 회의장으로 들어서며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산뜻한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폐하!”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를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황금빛 머리카락, 말간 얼굴과 옅은 하늘색의 눈동자. 요정처럼 작은 체구. 그녀는 취향마저 그의 생모를 닮았다. 옅은 하늘색의 드레스가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디안은 굳어 있는 황제의 얼굴을 보자 더욱 환하게 웃었다.
“어찌 부르셨어요?”
“황궁 예산안은 가져왔느냐?”
그는 곧장 그것부터 물었다. 황제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웃음 한 번, 다정한 눈빛 한 번 보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결혼식, 첫날밤, 연회를 모두 쟁취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디안은 정중한 태도로 황제 앞에 예산안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지난 3년간 황후의 역할을 했던 사람은 바로 디안 자신이었다. 그녀는 사실상 황후가 가진 모든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카를은 디안이 가져온 예산안을 들어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아델의 말처럼 황후궁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았다.
“왜 황후궁 예산에 대한 긴급 추경을 하지 않았느냐? 이 역시 황후를 맞을 준비에 포함되어 있었을 텐데.”
황제의 나직한 추궁에 디안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제가 하지 않았어요?!”
카를은 말없이 예산안의 한곳을 가리키며 서류를 내밀었다. 그것을 확인한 디안은 벌떡 일어나며 발을 동동거렸다.
“어떡해요, 폐하. 세상에, 죄송해서……. 잊어버렸어요. 한다고 생각해 놓고 깜빡했어요.”
그리고 삽시간에 두 눈이 붉게 물들인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혼비백산했다.
“죄송해요, 폐하. 죄송해요.”
“그만.”
기어코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것이 툭툭 떨어지자, 카를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만 울어라. 넌 눈물이 너무 많아.”
“예, 폐하. 제가 미숙했어요. 황후께서 언짢아하시겠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폐하.”
“추경을 해 주면 될 일이다.”
“그래도요…….”
카를은 어깨를 수그리고 잘게 떨며 눈물을 닦아 내는 여자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황제의 묘한 시선을 느낀 디안이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저…… 폐하,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세요?”
“…….”
침묵이 이어지자 디안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젖어 있던 눈가도, 입술도 바싹 말라 버렸다. 저도 모르게 눈을 몇 번이나 연달아 깜빡일 무렵,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후 본연의 권한은 이미 황후궁으로 이관되었다. 더불어 내가 너에게 위임했던 궁내부 권한을 회수하겠다. 추후 황후에게 위임할 것이다.”
쿵, 하는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디안은 책상 아래 감춰진 손으로 치맛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언젠가 닥칠 일이었다. 카를 울리히는 언젠가 이 말을 입에 담을 남자였다. 예측하여 스스로 대비하였음에도 어쩔 수 없이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을 그에게 내비칠 수는 없었다. 디안은 그동안 무수히 연습했던 대로 입술을 끌어 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실 저도 준비를 하던 참이었어요. 제가 감히 황후께 일을 알려 드리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전년도 자료는 언제든 궁금해하실 테니까요. 그런 것들을 준비 중이었답니다.”
“그래?”
“예, 물론이에요. 다만 긴급 추경은 당장 되어야 하는 부분이니 이 부분까지만 제가 일을 처리하는 것은 어떨까요?”
황제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그녀는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웃으며 답하면, 카를 울리히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하리라.
“……가진 것을 내놓으라는 명인데 어찌 웃을 수 있는 것인가?”
역시. 디안은 애달픈 어조로 황제를 불렀다.
“폐하.”
“그래.”
“저는, 폐하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 제가 가진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닌걸요.”
디안은 눈을 접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황제의 뺨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쓰다듬었다. 카를은 예민한 늑대 같은 사람이라 아주 신중해야 했다. 그가 손길을 쳐내지 않자 디안은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황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저는, 폐하만 있으면 돼요.”
주문처럼 속삭이며 황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디안은 적당한 시점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흐트러진 옷을 가볍게 정리하다가 마침 생각이 떠오른 사람처럼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참! 폐하……. 황후께서 긱스 부인을 불러들이셨다고 해요.”
그런데 언짢은 기색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황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알고 있다.”
“네?”
그것은 그녀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 * * 한편, 긱스 부인은 황후궁으로 돌아온 아델을 맞이했다. 노련한 노부인은 오늘 처음 본 황후의 기분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녀는 따뜻한 차와 냉수를 동시에 내어 왔고, 아델은 차가운 물을 먼저 마셔 버렸다.
“따뜻한 레몬차입니다. 한 잔 드셔 보시지요.”
긱스 부인이 직접 차를 따라 내밀자 아델은 그녀에게서 찻잔을 받아 들었다. 상큼하면서도 향긋한 차향에 긴장했던 근육이 천천히 이완되는 것 같았다.
“드레스 대금은 치렀소?”
“예. 하오나 상의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대금이 모자라던가?”
“그럴 리가요.”
“그럼 무슨 문제가 있소?”
긱스 부인은 아델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려한 금사로 꾸며진 붉은 실크 드레스.
“입고 계신 드레스는 직접 고르셨습니까?”
아델은 긱스 부인의 시선을 따라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골랐느냐고? 입혀 주던 시녀들이 이것을 입겠느냐 묻기는 했지.’
“골랐다기보다는…… 괜찮다고 했지.”
“주문한 드레스의 디자인은 보셨습니까?”
“보았소.”
“그것 역시도 마찬가지로 일일이 고르셨다기보다는 허락을 하셨겠지요.”
아델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흐몬트식 의복은 생소하기도 하고, 모국에 있을 때도 의복의 디자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소.”
긱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완성된 드레스를 돌려보내고 다시 주문하겠습니다. 당분간만 기성복을 입어 주십시오.”
“이 디자인이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오?”
아델의 물음에 긱스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극히 황후 폐하처럼 보이는 디자인입니다.”
“한데 굳이 왜?”
“말 그대로 지극히 황후 폐하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입고 계시는 그 드레스는 마치…….”
“마치?”
“마치, 선대 황후 폐하의 옷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만 같습니다.”
아델이 그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이오?”
그래. 그게 문제이겠는가? 선대 황후들의 왕관도 물려받는데, 옷의 디자인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선대 황후 폐하를 떠올리게 하는 드레스는, 황제 폐하를 자극할 겁니다.”
“?”
“되도록 입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로울 것이 없다?”
“네. 그렇습니다. 선대 황후 폐하와 지금의 황제 폐하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으셨습니다.”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긱스 부인을 응시했다. 긱스 부인은 선대 황후의 수족이라 했다. 황제에 의해 쫓겨났던 이였으니,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녀를 믿을 만할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아델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 * * 상아궁으로 돌아온 디안은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기분이 언짢아 보이자 시녀들은 슬그머니 몸을 피했다. 디안은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도록 두꺼운 암막 커튼을 겹겹이 친 다음, 고치에 몸을 만 애벌레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주저앉았다. 풍성한 금발이 귓가로 쏟아지자 마치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고립감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이 치밀었다. 눈물이 쏟아져서 치마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도저히 이 눈물을 어떻게 멈춰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계속 울었다. 왜 우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저 눈물이 쏟아져서 울고 또 울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왜, 왜, 왜 안 생기는 거야, 도대체 왜…….”
생겨야만 했다. 아이가 꼭 필요했다. 디안이 서 있는 곳은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위태로운 자리였다. 극지의 검은 바다를 떠도는 빙붕과도 같은 처지였다. 보라. 얼마나 쉬이 황후에게 권한을 빼앗기는지! 아델라이드. 그 여자가 한 것이 뭐가 있기에?!
“황녀로 태어나서, 모든 것을 그냥 가졌지. 어떤 노력도 없이……. 불공평해.”
그녀는 끅끅거리며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에 얼룩지고 일그러졌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디안은 눈을 감고 긴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눈물과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낸 디안은 입술을 꾹 물며 두껍게 쳐진 커튼을 걷어 냈다. 창살처럼 곧장 내리꽂히는 빛에 눈이 부셨으나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몸을 돌려 다시 환해진 방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단단한 결심이 엿보였다. 에흐몬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상아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방. 그러니 이곳은 에흐몬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일 것이다. 진줏빛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 황금빛 몰딩, 한 폭의 명화가 수놓아진 천장, 수천 개의 수정을 엮어 만든 샹들리에.
“뺏기지 않을 거야.”
뺏기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그녀가 이룩한 성전이고 두 손으로 피를 내어 얻어 낸 노력의 결실이었다.
“카를 울리히도, 이곳도, 어느 것 하나 내어 주지 않겠어. 껍데기뿐인 황후 따위에 절대로 밀려나지 않을 거야.”
디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상아궁. 그곳은 내 생모가 살아 보고 싶어 했던 곳이다.’
카를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폐하는 나를 버리지 못해. 흥분할 필요 없어.”
디안은 황제의 생모인 베아트리체 부인을 닮기 위해 노력했다. 외모, 말투, 행동, 좋아하는 음식까지. 스스로가 디안 푸아티에인지 베아트리체 부인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디안은 언제 울었냐는 듯 차분해진 얼굴로 책상에 앉았다. 이날을 위한 준비를 얼마나 했던가?
“로레인!”
디안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로레인이 서둘러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황실 예산안을 가져와. 예산 추경을 할 것이다.”
“예, 궁주님.”
디안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악의가 번득였다. * * * 거대한 흑단목 마차 안에 장신의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하면 형제가 둘 다 그림처럼 근사할까, 저런 아들들을 낳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아들을 줄줄이 낳겠네! 나이 지긋한 부인들은 이렇게 속닥거렸다. 젊은 영애들의 선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발드르 형제는 말 그대로 에흐몬트 사교계의 꽃이었다. 뭐, 두 사람 모두 신경도 쓰지 않는 소리지만 말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테세우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입가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허수아비 황후를 만들고 싶어서 굳이 바다 건너 고트로프의 황녀를 황후로 추천했던 사람이 데스포네 공작인데, 어째 실패한 것 같지?”
창밖을 응시하던 리오넬도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황후를 떠올렸다. 아니, 에흐몬트로 온 황후를 처음으로 맞이했을 때부터 어쩐지 그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 언뜻 야성적이기까지 한 금안을 해사하게 휘어 웃으며 말을 몰던 황후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러나 황제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상아궁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경악했던가. 일개 귀부인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한 황후의 행보에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나, 그녀는 보란 듯이 모두의 예상을 깨부수었다. 연회장에서, 그리고 중신 회의 대기실에서 본 황후는 조금의 위축됨도 없이 여유롭고 당당했다. 권력자 특유의 정제된 미소와 위압감은 인위적이었으나 빈틈이 없었다. 말을 타고 소녀처럼 웃던 여인과 같은 이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러나 실로 완벽한 황후의 모습을 볼 때마다 리오넬의 가슴은 이유 없이 선득해졌다. 세찬 폭풍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나무를 지켜보는 심정이 이러할까? 그때, 테세우스가 턱을 가볍게 문지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분위기를 한 손으로 쥐락펴락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 모습을 보니 어째서 고트로프 태후가 기를 쓰고 제 딸을 바다 건너로 보내 버리려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더군. 새로 즉위한 황제가 이제 갓 열네 살이라 하니, 기센 누이는 황권 강화에 도움이 안 되었겠지.”
리오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폐하께서는 칼뱅 영지의 탑도 그대로 두실 모양입니다.”
“비행형 마수가 출몰하면 인근이 삽시간에 쑥대밭이 되는데 걱정이다.”
테세우스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차엔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리오넬은 창문을 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검푸른 머리카락이 흩날려 이마에 어지럽게 달라붙었다. 그러자 제 얼굴을 쓸고 지나가던 검은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팔짱을 낀 채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동생을 테세우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짝 주름진 미간, 그늘져 어둡게 보이는 눈, 굳게 다문 입.
“리오넬.”
형의 부름에 리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고민 있어?”
“…….”
질문에 대한 답을 보류한 채 리오넬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으나, 지금의 리오넬에겐 의미 없는 장면일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