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황후와 금괴2021.05.15.
탁 트인 드넓은 평야를 빠르게 훑고 지나간 마차는 어느 순간 키가 큰 교목림 지대에 들어섰다. 내리쬐던 황금빛 햇살이 키 큰 나무에 가리자 바람은 한순간 서늘해졌다.
“황후 폐하 말입니다.”
“…….”
“그분이 이 정체된 판을 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테세우스의 눈도 깊어졌다.
‘정체된 판.’
리오넬의 표현은 정확했다. 황제는 마법사 집단에 이권을 몰아 줌으로써 귀족들의 목줄을 잡아 쥐었다. 귀족들은 행여나 자신의 영지에 탑이 내려올까 전전긍긍하며 황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혹시라도 탑이 세워지면 마법사의 도움 없인 살아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2인 이상의 마법사가 황제의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이라는 기가 막힌 법 조항도 있다.
“물론 황후 폐하의 입장에서 현 상황은 탐탁지 않겠지만…….”
테세우스는 말끝을 흐렸다. 죽음과도 같은 핏빛 하늘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도래하는 검은 재앙. 역설적이게도 그 재앙이 에흐몬트 황제의 권력을 다지는 핵심이었다. 황제는 백성의 피와 공포를 발판삼아 절대군주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아델은 긱스 부인에게 아직 수도에 남아 있을 칼뱅 백작을 불러 달라 명했다. 긱스 부인이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간 뒤, 아델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아무리 에흐몬트의 황후라 한들, 뒷배가 되어 줄 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아직 에흐몬트 정계의 권력 구도조차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에흐몬트어가 유창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배울 때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 언어를 굳이 왜 배우냐며 투덜거렸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니 삶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렵네…….”
어둠 속을 손끝으로 더듬어 걷는 기분이었다. 문득 보좌관을 들이라던 엘리자베타의 말이 떠올랐다.
‘황후의 보좌관은, 주로 남성입니다. 제 모후께선 제 부친인 선대 황제께서 정부를 갈아치울 때마다 보란 듯이 보좌관의 수를 늘리셨지요.’
“보좌관, 보좌관이라…….”
고트로프에서, 아버지가 정부를 들일 때마다 어머니도 보란 듯 정부를 들였었다. 때론 연회에서 각자 정부를 파트너로 대동하기도 하였는데, 아델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이 싫었다. 양쪽 모두 저것이 뭐 하는 짓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에흐몬트에서는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던 엘리자베타의 말이 함께 떠올랐다.
‘그럴 리는 없겠습니다만, 혹여라도 발드르 공가에서 지원자를 보낸다면, 더 볼 것도 없이 그를 선택하길 추천드립니다.’
발드르 공가를 떠올리자 필연적으로 그가 떠올랐다.
‘리오넬 발드르.’
폭풍이 몰려오기 직전의 고요한 밤바다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마주친 것은 고작 몇 번이지만, 무인 특유의 날카롭고도 담담한 그의 눈빛은 왠지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군마를 타고 대지를 달리던 시간이 떠오르자, 아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탁 트인 드넓은 대지를 마음껏 달렸던 그때가 에흐몬트에 와서 유일하게 즐거운 순간이었다. 잠시 그를 떠올리던 아델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밀어냈다.
“일단은 조금 더 이곳 문화부터 알아봐야지. 하란다고 덜컥 할 수는 없어.”
아델은 눈을 감고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어찌 되었든 황후와 황제는 좋든 싫든 한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역사상 황제와 황후가 대립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계가 극으로 치달았을 때의 일이고, 무엇보다 서로의 힘이 비등비등할 때의 이야기다. 이곳에서의 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앞뒤 분간 없이 황제와 척을 졌다간 정말 깃펜에 달린 깃털 꼴을 못 면할지도 몰랐다. * * * 낡은 마차 안. 유능한 학자이기도 한 칼뱅 백작은 늘 기품 있는 모습을 유지하던 신사였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은 본인 스스로조차 상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작은 자신의 외양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영주가 영지를 두고 직접 달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영지의 상황이 급박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최소한 스트라이커 한두 명 정도는 보내 주지 않을까, 키퍼 한 사람 정도는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기를 쓰고 간신히 들어간 중신 회의장에서 백작은 동정은커녕 수모를 겪었다. 말은 화살처럼 날아와 심장을 부쉈고, 눈빛은 칼날처럼 날아와 온몸을 갈가리 찢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황제의 냉정한 표정을 본 순간, 그는 깨달았다. 황제에게 칼뱅 백작령은 없어져도 별 상관없는 곳이라는 것을. 마수에게 뜯겨 죽어 가는 백작령 백성들은 황제에게 조금의 동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황제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 나갈 수 있도록 검이 녹슬지 않게 관리해라.’
세게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식들을 앉혀 놓고 그렇게 말했던 과거로 돌아가 사정없이 자신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황후의 부름을 받은 것은 악에 받쳐 시꺼멓게 썩어 가는 심장으로 되돌아갈 채비를 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잠시 후. 황후의 부름을 받은 칼뱅 백작이 황후궁에 도착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황후의 부름에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버려 망연자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시녀가 차를 내어 왔으나 찻잔을 들어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긱스 부인의 정중하지만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황후 폐하 드십니다.”
칼뱅 백작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열린 문 너머로 황후가 걸어 들어왔다. 칼뱅 백작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고, 아델은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편안하게 앉으시오, 칼뱅 백.”
이런 독대가 처음인지 보는 사람이 불편해질 만큼 연신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는 백작에게 아델이 단도직입적으로 부른 이유를 말했다.
“탑이 언제 세워졌소?”
“!”
황후의 질문에 백작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황후가 그것을 왜 묻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비행형 마수가 출몰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출몰하게 된 것이오? 탑의 직경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소?”
멍하니 황후를 바라보던 칼뱅 백작의 눈에 서서히 빛이 차올랐다. 벼랑 끝에 내몰렸던 설움과 울분이 그녀의 물음에 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비행형 마수를 보자마자 달려온 것입니다. 스트라이커는커녕 키퍼도 배치되어 있지 않아서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마수들을 막아 내고 있습니다. 이가 다 빠진 노인부터 이제 갓 변성기에 들어선 아이들까지, 모두……. 제발 황후 폐하.”
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지옥을 뒤로하고 소식 없는 황궁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백작의 주름진 얼굴엔 고통이 가득 묻어 있었다.
“스트라이커는커녕 키퍼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니?”
아델이 의아해하며 묻자 칼뱅 백작은 황후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견 형식으로 지원받는 구조입니다. 탑의 급수에 따라 중앙에서 지원을 받습니다.”
“4급이면 중대형인데. 아예 지원이 없었단 말이오?”
“2급인데도 지원이 미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일대는 다 죽으라는 뜻인데.”
“제발, 살려 주십시오, 황후 폐하.”
황후에게 빌어 봐야 소용이 없음을 백작도 알고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백작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살려 주십시오, 황후 폐하. 백성들이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마수의 거친 발톱과 이빨에 걸음이 느린 아이들과 여자들이 뜯겨서 죽어 갑니다. 영지의 수련된 기사들은 탈진하여 죽고, 싸우다 죽어 버렸습니다.”
“황후 폐하 앞에서 너무 잔인한 말은 삼가십시오.”
옆에서 대기 중이던 긱스 부인이 그를 제지했다. 곱게 자란 황후가 충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한 탓이었다. 백작은 울음을 삼키며 눈물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아니. 지옥을 순화하여 표현했음을 모르지 않소.”
“…….”
고개 숙여 눈물을 닦아 내던 백작이 고개를 들어 황후를 바라보았다.
긱스 부인의 염려와 달리, 황후는 차분한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은 괴로움이 묻은 백작의 얼굴을 마주 보며 지옥을 떠올렸다. 핏빛 하늘, 기괴하게 들려오는 마수의 울음소리, 연기, 사람들의 비명과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 피 웅덩이. 자식 잃은 어미는 주저앉아 통곡하고, 부모 잃은 아이는 죽은 부모의 시체를 자꾸만 흔들지. 제발 일어나라고 울면서. 그리고 그것들은, 탑을 박살 내기 전까지 악착같이 기어 나와 불쌍한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지. 황후의 눈이 매서워졌다. 탑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나타났다. 끔찍한 시기였다. 그리고 혼란한 시기를 지나,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탑의 마력에 반응하는 마법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스트라이커와 키퍼는 기존의 기사들과 더불어 탑을 거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 되었다. 하지만 몇몇 인간은 이렇게 끔찍한 위기를 기회라고 여겼다.
‘네가 세상의 모든 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니? 그냥 잠깐 눈을 감고, 귀 닫고 있어. 그럼 내 너에게 세상을 가져다 바치마. 저 탑은 우리에겐 기회야.’
‘어머니.’
‘그래.’
‘어머니께서 죽어 가는 이들을 못 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
‘죽어 가던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못 봐서 이렇게 잔인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세상을……. 제게 가져다 바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날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그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결국, 어머니는 아델에게서 황태녀의 지위를 거두어 갔다. 찰나의 회상 끝에 아델은 현실로 돌아왔다. 백작의 흰 서리가 내려앉은 듯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은 전혀 손질되어 있지 않았고, 얼기설기 주름이 진 얼굴은 홀쭉하게 패여 있었다. 백발의 노백작은 거칠고 핏기없는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가 애써 웃어 보였다.
“황후 폐하.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한시라도 빨리 영지로 돌아가 봐야 할 듯하여 이만 일어나고자 합니다.”
황후라는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새벽 별처럼 사라져 버리자, 아득한 절망감이 노도처럼 밀려들어 등 뒤를 강타하는 것 같았다. 목 안이 타는 듯 뜨겁고 메말라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힘이 빠져 후들거리는 무릎을 두 손으로 짚고 간신히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인 백작이 삐걱거리는 몸을 돌렸을 때였다.
“가까운 인근 영지로 영지민들을 피난시키시오.”
백작이 고개를 돌려 황후를 보았을 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비행형 마수를 막을 가장 좋은 은신처는 동굴이나 지하 공간이니, 그런 곳으로 노약자들을 대피시키시오. 탑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피신하여 여러 영주와 합세하면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고 중앙에도 압박을 가할 수 있으니 효과적일 거요.”
“……예, 황후 폐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말이오.”
황후가 씁쓸한 어조로 덧붙이자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녀의 말대로 사실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백작은 그리 말했다. 황후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보였기에. 힘없이 뒤돌아서는 백작을 바라보는 아델의 마음이 수면에 떨어진 돌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저 사람에게 당장 유효한 도움을 줄 힘이 없었다. 단지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보려 그를 부른 것일 뿐. 그것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델은 잠시 백작을 멈춰 세운 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금괴가 든 상자를 열었다. 2개를 주머니에 넣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2개를 더 집어넣었다. 이렇게 쓰다간 비상금이 금방 동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델은 백작의 품에 그것을 안겨 주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황후 폐하?”
“큰 도움 못 되어 미안하오. 그 정도면 다른 영지에 영지민을 잠시간 부탁할 값은 될 거요.”
백작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가 번뜩이는 금괴 네 덩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려는 백작에게 기어코 그것을 안겨 준 황후는 서둘러 노백작을 내보냈다.
“한시가 바쁘다 하지 않으셨소? 돌아가시오.”
“……처음 보는 저에게…… 이리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감격한 칼뱅 백작은 눈물을 하염없이 쏟으며 황후궁을 나섰다. * * *
“황후께서 그를 왜 부르셨을까?”
늦여름 풍경을 바라보며 던진 테세우스의 질문에, 리오넬은 처리하던 서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상황이 궁금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황제께서 칼뱅 백작령을 버린 것은 의외다. 칼뱅 백작은 황가에 복종할 사람인데.”
이번엔 리오넬도 시선을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저도 그것이 의외입니다, 형님. 지금까지 황제께서 버린 땅들은 대부분 황제께 복종하지 않았던 가문의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황제가 칼뱅 백작령을 버린 이유에 대해 고민하던 형제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각자 하던 일로 고개를 돌렸다.
“군주가 백성을 버리는 이유를 헤아려야 한다니. 우습군요.”
서류처리가 끝났는지 리오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가진 것만으로 일단 해결되겠어?”
“해결이 안 되면, 도와주시려고 그러십니까?”
“도와 달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일단 해결되니 걱정 마십시오.”
리오넬이 해결하겠다고 한 것은 휘하 소속 근위기사들의 봉급이었다. 벌써 석 달이나 급여가 지급되지 않았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이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리오넬은 일단 자신의 재산으로 기사들의 생활비를 지급할 생각이었다.
“너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떠올리곤 하지.”
테세우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다행이다. 나도 칼뱅 백작께 돈을 좀 드릴 생각이라 넉넉하지가 않았거든.”
“발드르 공작께서 넉넉하지 않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됐고. 나가 보자. 칼뱅 백작의 마차가 들어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