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 밤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2021.05.18.
형제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칼뱅 백작의 마차도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마부가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온 백작의 얼굴엔 채 지워지지 못한 눈물 자국이 가득 남아 있었다. 리오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칼뱅 백.”
칼뱅 백작은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황후께서 왜 부르셨던 겁니까?”
목 안이 졸린 듯 간신히 숨을 들이켠 백작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백작님. 왜 그러십니까?”
성큼 다가선 리오넬이 백작의 마른 어깨를 붙잡았다. 노백작은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비참한 몰골로 무시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무겁고 뜨거운 것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올라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 백작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형제 앞에 내밀었다. 리오넬과 테세우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내민 것을 내려다보자 백작은 직접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번쩍이는 황금 네 덩이. 두 사람은 곧장 시선을 들어 백작을 바라보았다.
“이걸 주셨소. 이것으로 주변 영지에 영지민을 부탁하라고 하시더군요.”
노백작의 주름 고랑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금괴 주머니를 다시 품속에 갈무리한 뒤 애써 웃어 보였다.
“두 분께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인사를 하러 들른 참이었으니 이대로 곧장 영지로 돌아가겠소. 황후 폐하의 말씀처럼 한시라도 빨리 영지민들을 피난시켜야 해서 마음이 급하오. 그동안 고마웠소이다.”
그리고 정중히 몸을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마차에 오르려 몸을 돌렸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칼뱅 백.”
테세우스가 그를 급히 불렀다. 그리고 집사가 들고 있던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받아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칼뱅 백작에게 안겨 주었다.
“직접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칼뱅 백작은 고개를 저으며 젊은 공작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러지 마시오, 공작. 이 늙은이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니.”
“영지민을 피난시키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미 자금을 다 끌어 쓰시지 않았습니까?”
백작의 목을 옥죄고 있던 감정의 끈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백작은 공작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삶은 때론 강한 사람조차 무너트린다. 천재지변의 재앙 앞에 평생 강직하게 체면을 지켜 오던 백작도 무릎을 꿇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젊은 공작의 앞섶을 적셨다. 테세우스는 묵묵히 백작의 울음을 받아 주었다.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오열이 차츰 잦아들 무렵, 늦여름의 햇살이 바닥에 길게 눕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곧 해가 질 것인데, 내일 출발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리오넬의 물음에 백작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가야지.”
그는 테세우스와 리오넬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결심이 깃든 노백작의 표정에 리오넬은 백작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대기 중이던 가문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백작을 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라.”
“예, 각하.”
“조심히 가십시오. 그리고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고맙소.”
백작은 황후와 공작에게 받은 무거운 성의를 품에 안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이내 출발했고 리오넬의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리오넬과 테세우스는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마차가 길게 늘어지는 햇살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황후께서 의외이시군.”
황후의 신분에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인근 영지로 피난시킬 자금…….”
“고트로프에도 탑은 있었을 테니 혹 탑에 관해 좀 더 아실까?”
리오넬은 황후를 다시 떠올렸다. 호리호리하고 가녀린 체구 때문인지 선뜻 그녀와 탑을 연결 짓기 어려웠다. 귀족들에게 보여 주었던 냉정한 모습과 백작에게 선뜻 건넨 위로금 또한 쉽게 연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환영처럼 어른거리자, 리오넬은 상념을 밀어낸 뒤 몸을 돌렸다. * * * 긱스 부인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지진이 났나 했다. 하지만 천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시시각각 들려오자 ‘아, 이것은 다리를 떠는 소리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누가 감히 황후 폐하 안전에서 정신 사납게 다리를 떨고 있는가?!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으로 주위를 훑던 깐깐한 부인은 시녀 중 누구도 다리를 떨고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황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을 새초롬하게 뜬 황후는 우아하게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설마 저분이 다리를 떨고 있지는 않으리라. 삭삭삭삭삭삭삭삭. 빠르고 경쾌한 빠르기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삭삭삭삭삭 사사삭삭삭삭. 가만 보니 황후의 풍성한 치맛자락이 가볍고 빠르게 진동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우아하고 빠르게 다리를 떨고 계셨던 것이다.
“흠흠.”
전직 그랜드 공작의 유모였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과거 어린 엘리자베타의 행동을 제지할 때 종종 쓰곤 했던 방법이었는데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
다리를 떨어 대던 아델도 헛기침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멈칫했다. 고국에서도 종종 이런 방식의 제지를 받아 본 탓이었다. 아델은 고개를 갸웃하며 긱스 부인을 쳐다보았다.
“…….”
그녀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아델은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하며 다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사사사사사사사삭삭삭.
“커흠흠.”
“…….”
아델이 반사적으로 긱스 부인을 바라보자 이번엔 부인도 눈에 힘을 주며 황후를 마주 보았다. 전직 유모와 전직 말괄량이가 팽팽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안 되나?”
긱스 부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델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여기도 다리 떨면 운이 없다, 뭐 이런 소리가 있는 거요?”
그에 긱스 부인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고민이 있으십니까?”
“…….”
아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대답 대신 한숨이 돌아오자 긱스 부인은 대기 중이던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찬장을 열어 두통에 효과가 좋은 허브를 꺼내 말없이 차를 우렸다. 상쾌한 차향이 코끝에 닿아 오자 아델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온몸에 힘을 쭉 뺐다. 달그락거리며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 쪼르르 찻물 흐르는 소리가 평화로웠다. 이곳은 이토록 평화롭건만…….
‘제발, 살려 주십시오, 황후 폐하.’
애끓는 목소리가 불쑥 떠오르자, 아델은 작게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머릿속으로 마수가 쓸고 지나간 피비린내 나는 지옥이 펼쳐졌다.
“황후 폐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델은 눈을 번쩍 떴다. 긱스 부인은 그녀 앞에 차를 내밀었고, 아델은 뜨거운 줄도 모르고 차를 마셨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좋아서 연거푸 몇 잔을 비운 아델이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큰 술잔에 따라 주게.”
“찻잔에 있으니 차인 것이지요.”
“어디에 담든 차는 차이지.”
긱스 부인이 찻잔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은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고작 금괴를 주는 것 말고는 없더군.”
“……하실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칼뱅 백은 충분히 감사하며 돌아갔습니다.”
“할 수 있는 범위라…….”
그 말에 아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차를 마시는 동안 해가 기울고 어둠이 몰려들었다. 아델은 자신의 등을 끌어안는 어둠에 기대었다. 낮게 내리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뇌리에 새겨진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굽혀. 가끔은 숙일 줄도 알아야 해. 네 잣대가 세상의 기준이 아니란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너는 똑똑하다. 하지만 세상은 말이다, 똑똑한 자들이 이룩하고 현명한 자들이 쟁취하는 곳이란다. 그러니 현명하게 행동하렴.’
황제와 그의 정부가 저지르는 모욕과 무례를 참아 내야 하는 것도, 도움이 절실한 이에게 고작 돈 몇 푼을 쥐여 줄 수밖에 없는 것도 모두 그녀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다. 황후인 그녀가 이곳에서 힘을 획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현명한 행동이란 무엇인가? 사실 아델은, 늘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 그나마 제 사람들이라도 있던 고트로프와 이곳 에흐몬트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자 반발심에 속이 메스꺼웠으나, 아델은 억지로 그 마음을 꾹꾹 밟아 눌렀다.
“이보오, 긱스 부인.”
마지막 등불에 불을 붙이던 긱스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불씨를 안전하게 꺼트린 뒤 황후의 맞은편 소파에 우아하게 앉았다.
“예, 황후 폐하.”
아델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나직하게 물었다.
“황제 폐하는, 어떤 사람이오?”
* * * 야심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이르지도 않은 저녁. 아델은 황제에게 만남을 청했다. 제안은 긱스 부인이 한 것이었다. 저녁 먹을 시각이니 지금 간다면 저녁을 먹으며 가벼운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이면서. 이곳에서 잘 지내기 위한 현명한 행동. 그것은 일단 황제와 잘 지내 보는 것이었다. 오자마자 기분 나쁜 일을 겪었으나,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아델라이드 고트로프였다면 아마 카를 울리히와 잘 지내려는 노력 따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에흐몬트. 아델라이드는 더 이상 고트로프의 황녀가 아니었다. 지금 황제를 배척해 봐야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델은 긱스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황제에게 만남을 청했다. 어머니 말씀처럼 굽히고 숙여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선대 황후를 떠올릴 만한 드레스는 모두 버렸다. 대신 긱스 부인이 추천해 준 가벼운 남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은 옆으로 땋아 내렸다. 드러난 목 언저리가 허전했다. 긱스 부인은 아델의 얼굴에 가벼운 화장도 해 주었다. 원래 화장이 그러한지, 아니면 디안 푸아티에의 조언처럼 황제가 창백한 낯을 싫어하는지 볼에도 발그레한 빛깔이 덧입혀졌다.
“아름다우십니다.”
부인은 진심으로 아델을 칭찬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스스로가 보아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묘하게 기분이 더러워서 아델은 입술을 꾹 물며 시선을 내렸다.
“왜 그러십니까, 황후 폐하?”
“……아무것도 아니오.”
황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황후궁을 나섰다. 황제가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러면 진짜 기분 엿ㄱ…….”
“예?”
“아무 말도 안 했네.”
에흐몬트 언어를 배울 때 제일 먼저 욕부터 배웠던 것이 무의식에서 종종 튀어나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황후는 시치미를 뚝 뗐고 시종은 미심쩍은 눈으로 황후를 응시했으나 더 캐묻지는 못했다. 아델은 허전한 목덜미며 분칠한 얼굴이며, 땋아 내린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태어나 처음 꾸며 본 사춘기 소녀의 설레고 몽글몽글한 마음은 아니었다. 허전한 목덜미를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윽고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열리고 시종이 나타나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어서 오십시오, 황후 폐하.”
* * * 카를은 시종에게서 소식을 전해 듣던 중이었다. 황후와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때마침 그녀가 방문하자 어깨를 으쓱하며 시종을 내보냈다. 그가 집무실 책상에서 일어나 손님 접대용 소파 상석에 앉자 시종은 문을 열었고, 곧 열린 문 너머로 황후가 걸어 들어왔다. 카를의 시선이 고아한 자태로 들어오는 아델에게 닿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채색의 간결한 드레스였다. 붉디붉은 황후의 드레스가 아니라, 소탈하고 소박한 느낌마저 드는 간결한 디자인이었다. 한쪽으로 쏠린 검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닿자, 자연스럽게 창백할 만큼 하얀 목덜미와 쇄골이 눈에 들어왔다. 일렁이는 등불이 만들어 낸 짙고 긴 그림자에 쇄골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황금빛 눈동자와 선명한 선의 붉은 입술. 이 밤에 이렇게 보니, 그녀는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카를은 앉은 자리에서 그녀를 맞이했고, 아델은 천천히 걸어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황제는 고개를 기울이며 황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맞춰 왔다. 시선을 잡아끄는 요요한 아름다움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황제가 보라색 눈을 길게 휘어 웃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이 밤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