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키스를 할 것이니 눈 감으시오2021.05.22.
“이 밤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황제의 질문에 아델은 짧게 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저녁을 드실 시간이 아닌가 해서 왔어요. 함께 저녁을 드시면 어떻겠습니까?”
좀 더 은유적인 표현이 있겠지만, 아델에겐 이것이 최선이었다. 외워 둔 정답을 말하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내뱉은 말에 황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잠시 놀란 듯하던 황제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렇지 않아도 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말씀하세요.”
“칼뱅 백작을 왜 불러들였소?”
그는 웃는 얼굴로 갑작스럽게 황후를 추궁했다. 시종에게서 전해 듣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내용이었다.
“…….”
아델의 붉은 입술이 당황한 듯 반쯤 벌어지자 황제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그를 왜 불렀소, 황후?”
황제의 눈빛은 혹독한 북풍을 머금은 것 같았다. 차갑고 냉혹한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델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상황은 어떤지, 궁금하여 불렀습니다.”
“그대가 왜?”
“황후인 제가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이 이상합니까?”
“단지 궁금해한 것만이 아니던데?”
“……무슨 말씀입니까?”
“그의 영지는 탑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으나, 나는 그를 구원하지 않았소. 구원해 달라 달려온 이를 그냥 돌려보냈지. 그런데 황후께서는 다시 그자를 불렀소. 듣자 하니 금괴를 준 것 같다던데.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칼뱅 백에게 금괴를 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황제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갔단 말인가? 아델이 당혹스러움에 말문이 막힌 사이, 황제는 그녀를 더 몰아붙였다.
“홀로 선량한 역을 하고 싶은 거요? 황제와는 달리 황후께서는 인심이 후하시더라, 이 말이 듣고 싶어 그러오?”
그의 신랄한 비난에 아델은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해졌다.
“그를 불러 상황이 어떤지를 묻고, 영지민을 피난시킬 자금을 위로금으로 준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제는 황후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정체된 공기가 깨질 것 같다. 던진 시선에 서로 깨질 것 같았다. 잠깐 눈 감고 귀 닫아,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두운 밤 붉은 동백 꽃잎 같은 입술이 하얀 이로 짓이겨졌다. 카를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붉게 문질러지는 입술이 그의 어딘가를 건드리는 듯했다.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움직임에 등불이 위험하게 흔들렸다. 황제가 천천히 소파 테이블을 돌아 황후에게 다가갔다. 금빛 눈동자는 뒤로 숨는 법이 없었다. 올 테면 와 보라는 듯한 맹렬한 시선이 짙은 밤과 왜인지 닮았다. 카를은 아델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서서 깊고 어두운 시선으로 황후를 내려다보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지자,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아델은 어디로도 갈 곳이 없었다. 등 뒤에 소파 등받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론 눈 감고 귀 닫아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시오, 황후.”
고트로프 태후가 아델에게 누누이 하던 충고를 베끼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이었다. 순간, 황제의 얼굴에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델은 어금니를 세게 물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었습니다.”
“그럼 나는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델이 억눌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카를은 화를 내는 아델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재미있군’ 하고 중얼거렸다.
“황후가 되었다고 일면식도 없는 내 백성이 꼭 그대 백성처럼 느껴지나 보군. 단번에 말이오.”
“…….”
입을 달싹이던 아델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목 뒤가 홧홧하게 뜨겁다. 가슴이 울렁여서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현명하게 한번 살아 보겠다고 온 길이었건만, 도저히 더는 있을 수가 없어서 비켜 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오른 어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놀라 눈을 번뜩 떴을 때, 황제는 한쪽으로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 보던 그가 움푹 파인 쇄골을 빤히 바라보았다. 손가락 굵기는 될까 싶을 만큼 뼈가 가늘다. 쥐고 세게 움켜쥐면 부서지지 않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충동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깨와 어깨가 아슬아슬하게 부딪힐 것 같은 거리. 카를의 코끝이 황후의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 아델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숨을 멈췄다. 턱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아 이가 부서져라 악물었다. 카를은 우물 같은 쇄골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선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던 여자가 맞나? 이렇게 단 냄새가 나는 여자가, 그 여자가 맞나? 황제는 소파 팔걸이를 양손으로 잡고 상체를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코끝이 부딪히기 직전, 카를은 고개를 비틀었다. 그대로 숙이면, 밤 중 동백 같은 입술에 닿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눈. 어두운 밤을 가로지르는 맹수 같은 금빛 눈동자에 카를의 움직임이 멎었다. 초점도 맞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으나, 그 눈빛만큼은 선명했다. 카를은 비틀었던 고개를 바로 했다. 다문 입술, 힘이 들어간 턱, 매섭게 치켜뜬 눈, 경직된 어깨. 아델라이드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를은 고개를 기울이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분노한 아델마저 잠시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카를이 속삭였다.
“왜?”
“…….”
“왜 그런 눈이오?”
“…….”
“나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서 이렇게 매혹적인 모습으로 이 밤에 내게 온 것이 아니오? 안아 달라 청하면, 안아 주겠소. 첫날밤을 오늘 치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 말에 아델은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황후가 황제에게 잘 지내보자는 의미엔 그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 표정, 태도, 이죽거리며 놀리는 듯 던지는 배려 없는 말에 분노가 치밀었다. 기분이 말 그대로 더러워졌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을 강타하는 모멸감에 아델은 치를 떨었다. 카를은 시시각각 무너지는 아델의 표정을 뇌리에 각인하듯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를 할 것이니 눈 감으시오.”
“그만.”
아델은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부릅떠 황제를 노려보듯 바라보자 카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매만졌다. 동시에 아델이 그 손을 탁, 쳐냈다.
“그만!!”
울창한 밀림 속 표범의 눈이 이러할까? 야성이 채 가시지 않은 선연한 금빛 눈동자가 황제의 목을 옭아매었다. 카를은 그녀의 눈빛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묘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이 매끈하고 날렵한 검은 짐승의 목덜미를 눌러 굴복시키면, 야성 어린 금빛 눈은 어떻게 변할까? 아델은 그의 몸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한 걸음 좁혀 황후에게 바짝 붙어섰다. 몸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황제가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나는 그대가 한때 고트로프의 황태녀였다는 것을 알고 있소. 과연 황제에 어울리는 눈이야. 하지만 황후. 이곳의 황제는 나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난 말이지.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여자가 좋소. 다시는, 내가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마시오. 아시겠소?”
카를은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예의 냉혹한 말투로 명령하듯 일갈했다.
“난 저녁 생각이 없으니 돌아가 황후궁에서 저녁을 드시오. 내 말, 명심하고 가슴에 새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 * * 하늘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도 흔들림 없던 아델라이드의 튼튼한 다리가 힘이 빠져 후들거렸다. 노도처럼 몰려와 등 뒤를 강타한 모멸감에 아델라이드의 이성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형용할 수 없는 더러운 감정이 머리카락 한 올, 솜털 한 올까지 잠식한 것 같았다. 분노가 치밀어 눈이 뜨거워졌다. 그의 숨이 닿았던 목덜미를 잡아 뜯듯 손으로 문질러 내며 아델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섞였던 그의 숨을 몰아내고 싶었다. 아델은 정신없이 황제의 방을 벗어나 끝도 없는 복도를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온몸이 젖은 듯 여름인데도 추웠다. 허전한 목덜미에 찬 바람이 드는 것 같아서 아델은 연신 목을 손으로 문질러 댔다. 허공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황후 폐하?”
정신없이 길을 걷던 아델이 불현듯 멈춰 섰다.
“황후 폐하?”
다시 한번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델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반쯤 풀어졌던 눈매가 바짝 조여졌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나긋나긋한 음성, 걱정을 해 주는 듯한 어조, 은은한 향수 냄새. 디안 푸아티에.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꼽으라면 그녀일 것이다.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떻지?’
아델은 반쯤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턱에 힘을 주었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곳은 황제의 방과 연결된 복도. 디안은 물끄러미 아델을 보다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아델은 다시 치미는 모멸감에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황후 폐하, 추우신가요?”
아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디안은 그녀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저런, 팔을 떠시잖아요. 어깨도 떨리시네요.”
황후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후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무언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아델은 이를 세게 물고 말했다.
“비켜라.”
그게 최선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면역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디안에게 이 상황은, 마주하기를 고대하며 수없이 상상해 왔던 장면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황후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제아무리 맹수라도 상처 입어 피를 흘리고 있다면 약한 힘으로도 쉽게 제압이 가능한 법. 디안은 황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 조언을 따르셨던 모양이네요. 그런데 뭔가 잘 안 되셨나 봐요. 그래서 도망을 가시나요?”
“뭐?”
아델이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렸으나, 디안은 해사하게 웃으며 한마디를 더 했다.
“목을 가려요. 붉잖아요, 황후 폐하. 그럼.”
디안은 한 걸음 우아하게 물러났다. 사뿐하게 무릎을 구부려 인사를 올린 그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반짝이는 시종 시녀들의 눈이 집요하게 두 사람을 훑고 있었다. 아델은 멀어지는 디안을 잡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지금 그녀를 돌려세워 화를 내면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질 테니.
‘그래서 도망을 가시나요?’
거대한 종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두통이 몰려들자 아델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상상해 본 적조차 없는 종류의 타격이었다. 도망치듯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던 순간,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뒤따르던 시녀가 잡을 틈도 없이 앞으로 몸이 쏠렸다. 아델은 이를 악물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눈을 감음과 동시에 어깨를 받치는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황후 폐…….”
소리를 지르던 시녀도 말끝을 흐렸다. 아델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강인한 힘이 균형 잃어 앞으로 쏠렸던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뒤로 밀었다. 아델이 다시 균형을 잡고 서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괜찮으십니까?”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델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달빛 비친 밤바다 같은 검은 눈동자가 고요히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리오넬 발드르…….”
아델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번쩍 정신을 차렸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근육이 바짝 조여들었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필사적으로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발을 헛디뎠군. 고맙소.”
감사를 건넨 아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리오넬은 스쳐 지나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았다. 보고할 것이 있어 황제궁을 찾은 참이었다. 다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황후를 보고 옆으로 물러났지만, 그녀의 모습이 어딘지 이상했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어찌나 위태로워 보이던지, 그는 황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러다 넘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던 순간, 아니나 다를까 황후가 휘청였고 리오넬은 재빨리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붙잡았던 어깨가 놀랄 정도로 가늘었다. 손바닥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