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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폭풍전야 (18/127)

18화. 폭풍전야2021.06.01.

한참 집무를 보고 있던 황제는 집무실에 들어선 시녀를 보며 반사적으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디안이 직속 시녀를 보내는 건 보통 좋지 않은 일 때문이었다.

16553287238128.jpg“무슨 일이냐?”

16553287238132.jpg“폐하. 다름이 아니오라, 궁주님께서 황후궁에 불려 가셨습니다.”

그 말에 카를은 눈살을 찌푸렸다.

16553287238128.jpg“황후가 디안을 불렀다고? 무슨 일로?”

16553287238132.jpg“궁주님께서 예산 추경서 보냈으나, 황후 폐하께서는 두 번이나 다시 해 오라 명령하셨습니다. 황후궁으로 가시며 어찌나 두려워 떠시는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폐하께 찾아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폐하.”

두려워 떤다. 그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황제의 가슴 한쪽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마치 거인에게 목이 졸린 듯 숨이 막혔다. 카를 울리히의 가슴 한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가 있었다. 그런 것이 왜 가슴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 속엔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깊고 검은 바다로 내몰린 것 같았다. 죄책감이란 이름의 파도가 그를 덮쳐 왔다. 과거의 목소리가 생생히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16553287238132.jpg‘훗날 네가 황제가 되면 말이다……. 그땐 나를 네 어미로 인정해 주지 않겠니?’

  카를은 입술을 세게 악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16553287238132.jpg“……황제 폐하?”

16553287238128.jpg“…….”

16553287238132.jpg“폐하…….”

16553287238128.jpg“시끄럽다.”

16553287238132.jpg“죄, 죄송합니다!”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로레인은 몹시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16553287238132.jpg‘카를!!’

  찢어지는 듯, 숨이 넘어가는 듯, 마치 단말마 같은 부름. 가슴 속 깊고 검은 바다가 기어이 거칠게 뒤집혔다. 카를은 이를 악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6553287238128.jpg“황후궁으로 불려 갔다고.”

16553287238132.jpg“예, 폐하.”

일렁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두려울 정도로 섬뜩해서 로레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지나쳐 거친 걸음을 옮겼다. * * * 디안은 눈을 깜빡였다.

16553287261315.jpg“……상아궁에 배정된 금액을 황후궁으로 이관……한다고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 그녀에게 아델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꼬았다.

16553287261319.jpg“그동안 황후가 해야 할 역할을 그대가 대신하고 있었지 않나?”

16553287261315.jpg“…….”

16553287261319.jpg“그리고 그 예산은 황후의 역할을 하기에 받은 것 아니오? 내가 황후의 일을 가져옴에 있어 당연히 그 명목으로 배정된 예산 역시 함께 이관받아야 하겠지. 그런데 언짢다니?”

16553287261315.jpg“…….”

아델은 몸을 기울이며 빛나는 금빛 눈동자로 디안의 얼굴을 응시했다.

16553287261319.jpg“언짢지 않았네. 다만, 좀 답답했지.”

이런 전개는 디안의 예상에 없었던 것이었다. 황후의 긴 손가락이 상아궁의 예산 내역을 톡톡 두드렸다.

16553287261319.jpg“그간 노고가 많았소. 인제 와 그간의 사용 내역서를 일일이 작성하라고는 하지 않겠네. 그건 내가 하면 되니 그대는 상아궁에 배정된 예산을 황후궁으로 모두 이관하게. 보아하니 황제께서 그 권한을 그대에게 위임한 모양이던데.”

황후는 제안도, 부탁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가 권한을 줄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힘이 되어 줄 친정도, 아군 한 사람 없음에도 그녀는 황후였다. 디안은 지난 3년간 당연하게 누려 왔던 권리를 황후의 단 한마디 명령으로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 황궁에서 어떠한 직함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그 사실이 너무 분했다. 이런 순간이 올 수 있음을 그토록 대비하고 또 대비하였음에도 역시 상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었다.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눈이 붉게 물들고 열이 홧홧하게 올라 하얗고 투명하던 얼굴도 붉게 변했다.

16553287261315.jpg“황후 폐하.”

울분이 섞인 목소리에 지금까지 아델의 얼굴에 스며 있던 미소가 싸늘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16553287261319.jpg“왜, 불만이라도 있는가?”

치켜뜬 금빛 눈동자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뒤에서 대기하던 시녀들마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벽에 딱 붙을 만큼. 그러나 디안은 이를 악물고 그 시선을 받아 냈다.

16553287261319.jpg“디안 푸아티에.”

황후가 싸늘하고 냉혹한 어조로 마치 경고하듯 그녀를 불렀으나, 디안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델과 디안의 시선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팽팽하게 대치했다. 디안은 악에 받쳐서 생각했다. 이 궁, 이 응접실, 그 자리! 황제의 옆, 그의 옆에서 만인을 내려다보는 그 지존의 자리! 내 자리인데! 내 것이었는데!! 네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가져야만 하는, 내 것이었어!!! 지금 이 순간 혼자의 힘만으로는 황후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음이 한스러웠다. 붉게 물든 하늘색 눈에서 분노에 찬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디안의 눈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던 아델의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6553287238132.jpg‘후계의 자리에서 내려오너라.’

  빌어먹을. 왜 지금 그때가 떠오르는가?!! 제 것을 빼앗긴 자의 눈물에 모순적이게도 과거의 자신이 겹쳐졌다.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정부를 몰아세우던 황후가 별안간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긴 숨을 몰아쉬었다. 갑작스럽게 힘이 빠진 듯한 모습에 긱스 부인이 눈썹을 모으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아델은 다시 한번 길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16553287238132.jpg‘아델라이드. 황태녀의 자리를 반납하라.’

  참 쉽고도 간단한 한마디였다.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쳐다보며 울고 있는 디안 푸아티에를 응시하며 아델은 바싹 말라 버린 입을 억지로 열었다. 입 안이 소태를 삼킨 것처럼 썼다.

16553287261319.jpg“나로 인해 네 자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느냐?”

16553287261315.jpg“…….”

디안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지만, 그 눈물에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아델은 최선의 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16553287261319.jpg“잘 들어라, 디안 푸아티에.”

16553287261315.jpg“…….”

16553287261319.jpg“나는 에흐몬트의 황후다. 감히 나의 권위에 도전치 마라. 어떤 방식으로든 황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겠다. 빼앗겼다고 생각지 말라. 그대가 본래 가졌던 것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도록.”

아델에겐 이것이 최선이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상아궁 거주 명령서를 찢고 퇴거를 명하려 했으나, 아델은 간신히 그 생각을 접었다. 황후의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 그럼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인정해 주겠다. 이것은 디안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럼에도 디안은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아델을 노려보았다. 아델은 황후의 권위를 제외한 나머지를 인정하겠다고 했으나, 디안에겐 그 ‘황후의 권위’마저 그녀의 일부가 된 지 오래였다. 그것은 제 것이었다. 그러니 아델의 제안은 시작부터 틀렸다.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턱이 덜덜 떨렸다.

16553287261315.jpg‘폐하, 폐하. 왜 안 오세요, 폐하!’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수긍하기는커녕 분노하여 파르르 떠는 디안의 모습에 아델의 표정에도 살얼음이 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별안간 황후의 응접실 문이 예고도 없이 거세게 열렸다. 감히 누가 황후의 응접실 문을 허락도 없이 여는가!? 아델이 단번에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노려보는 순간, 디안이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16553287261315.jpg“죄송해요, 황후 폐하!”

갑작스럽고 동시다발적인 일이었다.

16553287261315.jpg“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용서해 주세요.”

……네? 황당해진 아델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 지금 뭐라니? 한편, 카를의 시선은 바닥에 바싹 엎드린 디안에게 닿아 있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금발, 작고 가녀린 등, 떨리는 음색. 카를은 천천히 눈을 치켜떠 의자에 앉아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16553287238128.jpg“황후,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저음의 목소리엔 진득한 분노와 어둠이 스며 있고, 침잠된 보라색 눈동자에선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아델은 황제의 시선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디안과 분노한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16553287261319.jpg“일어나게, 푸아티에 영애!! 지금까지 나와 잘만 이야기하다 뭐 하는 건가?!”

16553287238128.jpg“황후!!”

16553287261319.jpg“폐하야말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지지 않고 받아치는 황후에게 황제가 성난 짐승처럼 다가갔다. 그의 얼굴엔 언뜻 광기마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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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레인이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디안을 서둘러 일으켰다. 하얀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흥건하고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다.

16553287261315.jpg“폐하, 제가 황후 폐하께 사과를…….”

곧 끊어질 것 같은 가녀린 목소리. 카를은 이를 악물고 디안을 응시하다가 황후를 돌아보았다.

16553287238128.jpg“디안을 상아궁으로 데려가라.”

16553287238132.jpg“예, 폐하.”

로레인은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는 디안을 부축했고, 디안은 반쯤 실신한 사람처럼 늘어진 채로 응접실을 나갔다. 응접실의 공기가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처럼 얼어붙었다.

16553287238128.jpg“다들 나가라. 황후와 독대하겠다.”

황제의 명령에 벽에 붙어 있던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긱스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델을 응시했다.

16553287238128.jpg“오랜만이군.”

황제의 싸늘한 인사에 긱스 부인은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1655328732832.jpg“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 폐하.”

16553287238128.jpg“그대는 그대로군.”

1655328732832.jpg“…….”

16553287238128.jpg“한결같아. 황후의 옆자리에서 제힘보다 약한 이들이 짓밟히는 것을 그저 지켜보지. 재미있는가?”

16553287261319.jpg“나가 있으시게.”

듣다 못한 아델이 날카롭게 명령하자 황제는 언성을 높였다.

16553287238128.jpg“그게 재미가 있으신가?!”

16553287261319.jpg“나가 있으시게, 긱스 부인!!”

아델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황제는 죽일 듯한 시선으로 아델을 노려봤고, 그녀 역시 황제를 깨트릴 듯이 마주 보며 턱에 힘을 주었다. 긱스 부인의 주름 고랑이 더 깊게 파였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정중히 두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린 뒤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넓고 화려한 응접실엔 황제와 황후, 두 사람만이 남았다. 두 사람은 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16553287238128.jpg“지금 뭐 하는 것인가, 황후?”

16553287261319.jpg“폐하야말로 무얼 하시는 겁니까?”

16553287238128.jpg“재밌소? 어떻게 해서든 그대보다 힘 약한 이의 목을 잡아 비틀어 살려 달라 빌게 만들고. 참으로 악취미로군.”

16553287261319.jpg“그런 적 없습니다.”

16553287238128.jpg“내가 직접 그 장면을 봤는데, 변명 같은 소리를 해.”

16553287261319.jpg“문이 열리자마자 엎드리더군요. 그리고 제게 빌기 시작했습니다. 폐하께서 오심과 동시에 말입니다.”

16553287238128.jpg“그것참 대단한 우연이군?”

황제는 아델을 비웃으며 비아냥댔다. 아델은 뜨겁게 치미는 울분을 한숨으로 토해 내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틈에 황제는 탁상 위에 있던 것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상아궁 예산 내역이었다.

16553287238128.jpg“탐이 나나?”

16553287261319.jpg“…….”

16553287238128.jpg“디안이 가진 것이, 탐이 나?”

16553287261319.jpg“선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폐하시군요. 황후궁의 예산안을 보셨습니까? 예산 추경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16553287238128.jpg“…….”

16553287261319.jpg“모르시지요? 그것조차 상아궁에 일임하셨더군요. 황제의 정부에게 돈을 받아 쓰는 황후라? 그걸 바라셨습니까?!”

아델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거친 손길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추경 내역서를 꺼내 탁상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16553287261319.jpg“황후궁 예산 추경안입니다. 보시지요! 준마 한 마리 값은 될까 싶습니다. 황후궁 예산 추경이 여염집 생활비를 나누는 것보다 빈한할 일입니까?”

황제는 황후가 내려놓은 예산안을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그녀의 말대로 추경 된 예산은 고작해야 준마 한 마리 값 정도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카를은 긴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자 다시 그 장면이 떠오른다. 깊고 검은 바다는 아직 잠잠해질 줄을 몰랐다.

16553287238128.jpg“……그래서 디안을 부른 거요?”

16553287261319.jpg“다시 해 오라 명했더니 직접 왔더군요.”

16553287238128.jpg“그게 부른 것이지.”

16553287261319.jpg“그렇습니까?”

기가 찬 어조로 되묻는 아델을 향해 카를이 위협적으로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젯밤처럼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16553287238128.jpg“그대 모후 고트로프의 태후가 내게 거짓말을 했군.”

16553287261319.jpg“…….”

16553287238128.jpg“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딸이라더니……. 모국에서 쫓겨났으면서 깨달은 것이 없소?”

16553287261319.jpg“제가 고트로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시지요.”

16553287238128.jpg“잘 들으시오, 황후.”

카를은 아델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경고했다.

16553287238128.jpg“깃펜에 달린 깃털처럼. 화병에 담긴 꽃처럼.”

그저 있음. 누군가 에흐몬트의 황후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기계적인 답.

16553287238128.jpg“……그리 사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수리에서 시작된 전율이 아델의 온몸을 내달려 발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황제도 손에서 느껴지는 전기에 깜짝 놀라 손을 놓으며 아델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울림과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한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일 만큼 강렬한 빛에 카를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델은 빠르게 몸을 돌려 테라스로 달려 나갔다. 밖에서 불어 대는 거친 바람에 테라스 유리문이 덜컹거렸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바람이 온몸을 강타했다. 아델은 테라스 난간을 붙잡은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16553287238132.jpg“꺄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사람들이 우왕좌왕 허둥대는 소란이 온 황궁을 뒤흔들고 있었다.

16553287238132.jpg“하늘, 하늘이!!!”

늦여름 햇살로 찬란하던 맑은 하늘에 누군가 검붉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았다. 피가 번지듯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 그리고─

16553287238132.jpg“타, 타, 탑입니다!!!!!!”

16553287238132.jpg“탑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죽음 그 자체인 검은 재앙이, 정확히 에흐몬트 황궁을 향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16553287261319.jpg“깃펜에 달린 깃털처럼, 화병에 담긴 꽃처럼. 그리 살라?”

검은 재앙을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노려보며 아델은 방금 들었던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황궁은 혼돈 그 자체였다. 다시 한번 천둥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상황을 직감한 황제가 서둘러 응접실을 박차고 나가자, 긱스 부인이 놀란 얼굴로 달려 들어와 소리쳤다.

1655328732832.jpg“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탑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황후 폐하. 일단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긱스 부인이 아델의 어깨에 숄을 감싸 주며 그녀를 이끌었지만, 황후는 이를 거절하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3287261319.jpg“아니. 그럴 것 없소.”

아델은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소매를 꽉 동여맨 단추를 툭툭 풀어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금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1655328732832.jpg“황후 폐하?”

긱스 부인이 갑작스러운 황후의 행동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으나 아델은 답하지 않았다. 핏빛 하늘과 끔찍한 검은 재앙이 처음으로 반가웠다. 아델은 날렵하게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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