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오지 않는 마법사, 맞서는 기사 (19/127)

19화. 오지 않는 마법사, 맞서는 기사2021.06.05.

16553287479922.jpg

  수도엔 비상령이 내려졌다. 수도 가까운 곳에 탑이 내려와도 심각한 문제인데, 하물며 황궁으로 내려오고 있다니! 황궁은 들쑤셔 놓은 벌집 같았다. 황족과 황궁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관료와 중신들에 대한 대피령이 먼저 내려졌으며, 고용인들도 차례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황궁을 빠져나가는 그 시점, 국방부 장관이자 기사들의 수장인 리오넬 발드르는 탑이 내려오고 있는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리오넬 발드르가 이끄는 황실 근위대 1, 2군 정예 기사들이 소대별로 속속 모이고 있었다. 명실공히 제국 제일의 정예들로, 마법사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도 2급 탑의 마수를 무려 한 달이나 막아 낸 전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리오넬은 내려오는 탑의 직경을 가늠했다.

16553287479927.jpg“……4급, 혹은 5급 정도로 보입니다.”

달려 내려오는 거대한 탑을 함께 올려다보던 부단장의 말에 리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87479932.jpg“정원으로 내려오니 다행이다. 건물 위로 내려오는 것이었다면 막기가 더 어려웠을 거다.”

비록 황궁의 자랑인 장미정원은 쑥대밭이 되겠지만 말이다. 콰콰콰쾅!!!! 내리치는 섬광과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거세게 불어닥치는 바람에 나무들이 꺾일 듯 휘어지며 우는 소리를 내자 관록의 기사들도 두려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만 같은 붉은 하늘은 가장 깊숙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리오넬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기사들을 향해 단단한 목소리로 외쳤다.

16553287479932.jpg“올려다보지 마라! 두려움은 상상하는 것만큼 커지고, 두려움이 큰 만큼 검은 무뎌지는 법이다!”

그의 말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기사들은 재빨리 고개를 내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리오넬은 신속하게 지형을 살피며 빠르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16553287479932.jpg“1군 2소대, 앞으로! 3, 4소대 2소대 뒤를 보완하라!”

리오넬은 에흐몬트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인 동시에, 뛰어난 상황판단으로 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하는 데 능했다. 마법사의 협조 없이 마수를 저지해야 하는 수많은 상황을 맞닥뜨렸음에도 그가 이끄는 기사단의 피해가 최소에 그친 것은, 기사들 개개인의 역량뿐 아니라 리오넬의 존재 덕분이었다. 기사들에게 리오넬은 무조건적인 충성과 믿음의 대상이었다. 리오넬의 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기사들이 개인의 공격 범위를 유지한 채 교차로 서자, 마치 도넛 모양의 체스판과 같은 거대한 대열이 만들어졌다. 기사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달려 나오는 마수를 막아 낼 것이다. 리오넬은 대열에서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16553287479932.jpg“우리의 목표는 탑이 파괴되는 그 순간까지 몰려나올 마수를 막아 내는 것이다!! 대열, 위치로!!”

이제 완연히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검은 재앙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오넬은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속삭였다.

16553287479932.jpg“마법사들은 아직인가?!”

16553287479927.jpg“예, 각하. 아직입니다.”

저렇게 빠르게 탑이 내려오고 있음에도 마법사가 아직이라니! 아마 기사들이 죽을 만큼 죽고 난 다음에야 나타날지도 모른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이지만, 리오넬은 그런 일을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러나 마법사가 지척에 있는 황궁에서까지 기사들에게 무의미한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었다.

16553287479932.jpg“당장 마법사단 관저로 달려가 마법사들을 불러와라!”

16553287479927.jpg“알겠습니다.”

리오넬의 명령에 부단장이 재빨리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하지만 리오넬도, 달려가는 부단장도 마법사들이 이 소환 명령에 얼마나 착실히 응할지는 미지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숙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분했다. 결국 저 까마득한 재앙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기사의 검이 아니라 마법사들의 마력뿐이었기 때문이다. * * * 탑의 마력에 반응하여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을 통칭 ‘마법사’라 일컫는다. 에흐몬트는 자국의 마법사들을 황실 마법사단에 소속시켜 관리했고, 황실 마법사단은 무력 집단이지만 국방부에 소속되지 않고 황제의 직속 관할로 편재되어 있었다. 마법사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공격형 마법사를 ‘스트라이커’, 수비형 마법사를 ‘키퍼’라 칭했다. 황실 마법사단장은 아우구스 울리히 데스포네 공작이며, 부단장은 레녹스 푸아티에 백작이다. 레녹스 푸아티에는 1급 스트라이커로 명실공히 에흐몬트 최상위 마법사였다. 평민 출신임에도 승계 가능한 백작 지위를 얻은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레녹스 푸아티에 백작은 헐레벌떡 달려온 근위대 부단장 앙리 자칼을 시큰둥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16553287499449.jpg“그래서?”

부단장의 살벌한 눈길에도 레녹스는 느긋한 손길로 로브 단추를 잠그며 다시 한번 물었다.

16553287499449.jpg“지금 당장 오라고?”

앙리 자칼은 눈에 힘을 단단히 주며 씹어뱉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16553287479927.jpg“국방부 장관님의 명이오. 마법사단은 지금 당장 탑이 내려오고 있는 장미정원으로 집합하시오.”

16553287499449.jpg“지금은 곤란한데? 게다가 우리는 황제 폐하 직속 관할이라서 굳이 국방부 장관의 명을 들을 필요가 없어. 모르는 거 아니잖아?”

16553287479927.jpg“…….”

16553287499449.jpg“아이~ 정말, 단추를 잘못 끼웠네.”

레녹스는 비뚤어진 로브를 보여 주며 히죽 웃었다.

16553287499449.jpg“잠깐만, 잠깐만~ 나도 급한 거 알아. 가 준다잖아.”

그러나 말과는 달리 연신 히죽거리는 그의 손길은 느긋했고, 거울을 봐 가며 로브를 매만지는 모습 어디에서도 다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앙리 자칼은 두 주먹을 있는 대로 힘껏 쥐었다.

16553287499449.jpg“아 참, 자칼 경. 이번에 봉급이 나오지 않았다지? 자네야 물론 자칼 백작가 차남이니 상관없네만, 혹 자네 부하 중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자가 있다면 내 단추라도 하나 떼어 줄까? 금박을 입혀서 제법 값이 나갈 것 같은데.”

16553287479927.jpg“그따위 말을 할 시간에 빨리 준비나 해라, 레녹스 푸아티에.”

앙리 자칼이 깊게 잠긴 목소리로 경고하자 레녹스는 거울에서 몸을 돌려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16553287499449.jpg“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앙리 자칼. 지금 내 도움이 절실하잖아? 내가 늦으면 늦을수록 기사단의 피해는 커질 텐데. 안 그래?”

16553287479927.jpg“황궁에 탑이 내려왔는데, 마법사들은 괜찮을 것 같은가? 황궁 마법사단 역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레녹스는 긴 눈을 휘어 웃으며 주머니에서 금박 입힌 단추 하나를 꺼내 발아래로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단추가 한쪽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16553287499449.jpg“난 아냐.”

16553287479927.jpg“…….”

16553287499449.jpg“마법사들이 추후 어떤 문책을 받는다 해도, 난 아냐. 세상이 지옥이면 어때, 그 지옥에 내가 없으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앙리 자칼. 내 비위를 거스르지 마. 끝까지 안 가는 수가 있으니까.”

레녹스는 앙리의 어깨를 툭 치고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앙리 자칼은 울화가 치밀어 눈을 감았다. 기가 막히지만, 디안 푸아티에와 데스포네 공작을 등에 업은 레녹스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 수모를, 이 모욕을 도저히 어찌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가슴이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아무리 리오넬 발드르가 기사단을 이끈다 해도 마법사들이 오지 않으면 1차 저지선인 기사들만 피를 흘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 꼴을 하루 이틀 보았던가? 탑은 곧 땅에 닿을 것이고, 기사들은 죽기 살기로 마수를 막아 내야만 할 터였다. 개인적인 모욕과 수모를 견디는 것이 전우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나으리라.

16553287479927.jpg“푸아티에 경!”

앙리 자칼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커다랗게 외쳤다. 그의 외침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레녹스 푸아티에가 몸을 반쯤 돌렸다. 앙리 자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16553287499449.jpg“왜?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놀리는 듯한 어조였으나 앙리는 더 이상 그의 비위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머리가 점점 숙여지자 레녹스의 하늘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짜릿하다.

16553287479927.jpg“마법사들의 협조를 구합니다.”

아, 짜릿해. 이 핏빛 하늘이 얼마나 감사한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검은 재앙은 레녹스 푸아티에에게 축복이요, 신의 선물이었다. 저 새까만 재앙이 황궁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봤을 때,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 덕분에 귀족 기사가 머리까지 조아리지 않는가? 하지만 이 정도론 좀 부족하지. 레녹스는 몸을 돌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앙리 자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며 말했다.

16553287499449.jpg“이 정도로 무례가 갚아지겠어?”

16553287479927.jpg“…….”

16553287499449.jpg“무릎이라도 꿇어야지. 그렇지 않나, 자칼 경?”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앙리는 눈을 감고 어금니를 부서져라 세게 물었다. 레녹스가 그런 그의 어깨를 좀 더 힘있게 내리눌렀다. 젊은 부단장의 어깨가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녹스는 이 장면을 뇌리에 박제라도 하겠다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앙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쿵.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콧대 높은 황실 근위대 부단장의 오른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이어 왼 무릎도 바닥에 닿았다.

16553287479927.jpg“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이러다 온몸이 녹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레녹스는 짜릿한 전율에 눈을 질끈 감으며 환희했다. 봐도 봐도 새롭고 즐겁다. 레녹스는 배 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웃기 시작했다. 핏빛 하늘, 검은 재앙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참으로 기괴했다. 하지만 모두가 지옥인들 어떠하랴. 나 홀로 꽃밭이면 그곳이 피 웅덩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 * 긱스 부인은 도대체 무얼 하시는 거냐며 난감해했다. 가장 먼저 피신하셔야 할 분이 나갈 생각은커녕 몸에 딱 맞는 훈련복까지 찾아 입으셨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타는데 등 뒤로 길고 날씬한 검을 동여매시는 것이 아닌가? 관록의 노부인도 이 상황은 도저히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델은 어차피 그녀를 이해시킬 마음이 없었기에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해 주었다.

16553287554337.jpg“도망갈 것 없소. 붉은 하늘이 무서우면 이불 뒤집어쓰고 낮잠이라도 주무시오.”

16553287554341.jpg“도대체, 무얼 하시려고…….”

16553287554337.jpg“금방 다녀오겠소. 따라오지 말고. 명령이니.”

16553287554341.jpg“황후 폐하!!!”

아델은 간절함이 묻은 긱스 부인의 외침을 뒤로하고 날랜 흑표범처럼 빠르게 궁을 벗어났다. 황궁은 어수선했다. 아델은 떼를 지어 빠르게 이동하는 고용인들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혼란한 상황, 검은 훈련복 차림의 여자가 황후일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기 어려웠기에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황후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늘은 이미 핏빛의 향연이었다. 창공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늘 가까이에 있으나 차마 닿을 수 없는 하늘은 인간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음유시인들은 신들의 세상을 노래하고, 천문학자들은 별의 움직임을 읽었다. 저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나타난 탑은 하늘을 한순간에 두려움으로 바꿔 놓았다.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은 지옥과 다름없는 공포의 현신이었다. 압도적인 재앙 앞에 인간의 육신은 너무나 연약했다. 재앙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만 아델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짜릿한 기분, 온몸 구석구석 잠들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은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마치 죽어 있던 육신이 새 생명을 얻은 것만 같았다. 어린 독수리가 날개를 펼쳐 처음 활강하는 기분이 그러할까? 어린 표범이 처음 산야를 가로질러 달릴 때의 기분이 그러할까? 당시 10살이었던 아델은 그날 마법사로 각성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늘 마력의 짜릿한 감각을 누르려 애썼다. 비극적인 재앙 앞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찰나의 희열도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델은 더 빠르게 움직였다. 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더 거세게 불어닥쳤다. 나무들이 부딪히며 우는 소리를 내고 물건들이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다행히도 탑의 진앙은 건물 위가 아니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마법사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고, 기사들만 보였다. 둥근 원형 대열을 갖춘 채 탑을 올려다보는 기사들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아델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 * 거대한 탑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빠르게 내려올 때면 무시무시한 세기의 상승기류가 만들어진다. 부단장 앙리 자칼이 마법사들을 데리러 간 그 시점, 기사들은 강력한 상승기류에 온몸으로 맞서고 있었다. 만발했던 늦여름 장미들이 뿌리째 뽑혀 하늘 높이 치솟았고, 인근 건물의 창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기사들은 이리저리 날아드는 파편들 때문에 탑이 내려오기도 전에 피를 흘려야만 했다.

16553287479927.jpg“단장님!!”

부관의 외침에 리오넬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자 그를 향해 날아들던 유리 조각이 바람에 휩쓸려 치솟아 올랐다.

16553287479932.jpg“위에서 떨어지는 낙하물을 조심해라!!!! 유리 조각을 조심해!!!”

소대장들이 그렇게 신신당부해도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리오넬은 부하들에게 날아드는 유리 조각을 직접 검으로 쳐내며 외쳤다.

16553287479932.jpg“키퍼는 아직인가?!!!”

탑이 만들어 내는 그늘 탓에 기사들이 모여 있는 장미정원은 어두운 밤 같았다.

16553287554368.jpg“키에에에에에엑!!!”

16553287554368.jpg“크아아아아악!!!”

기괴한 울음소리가 거센 바람 소리에 섞여 들리자 기사들의 두려움도 한층 커졌다. 탄탄한 육체마저 삼킬 것 같은 거센 소용돌이, 검은 공포, 기괴한 괴수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지옥을 연상케 했다. 리오넬은 마법사들이 제시간에 오리란 희망을 버렸다. 매번 그랬듯 기사들의 희생이 불가피할 터였다. 이번에도 그의 검이 부하들을 한 명이라도 더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며 리오넬은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16553287479932.jpg“발검!!!!”

그의 커다란 외침에 소대장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고, 나머지 기사들도 빠르게 검을 꺼내 들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가로질러 압도적인 크기의 탑이 땅에 닿으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지옥의 시작이다. 리오넬은 두 눈을 부릅뜨고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켰다. 고막을 찢을 듯한 바람 소리에 청각이 둔하게 마비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끔찍한 소음들을 가르고 가을바람처럼 낮고 청량한 목소리가 불현듯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16553287554337.jpg“왜 보고만 있는가?”

16553287479932.jpg“?!”

리오넬은 이 상황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음성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긴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려 리오넬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16553287577301.jpg

  몸에 딱 맞는 검은 훈련복 차림의 여인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건성건성 움켜잡더니 능숙하게 돌돌 말아 틀어 올렸다. 건장한 기사들 사이에 있으니 자그마한 체구가 유난히 가녀려 보였다. 그녀는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금빛 눈동자로 리오넬을 응시했다.

16553287479932.jpg“황후 폐하?”

아델라이드 황후가 재앙 한복판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16553287577309.jp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