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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검은 재앙과 황후 (20/127)

20화. 검은 재앙과 황후2021.06.08.

리오넬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황후를 따라온 이가 없는지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황후는 호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드레스 차림이 아닌지라 기사 대다수가 이 사람이 황후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황후는 리오넬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달려 내려오는 탑을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16553287647859.jpg“위험합니다! 돌아가십시오! 레파트 경!”

다급해진 리오넬은 그녀의 여린 몸을 가리듯 최대한 바람을 막아선 채 황후의 답을 듣기도 전에 부관을 지명했다. 거친 바람 소리에 거의 악을 쓰듯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16553287647864.jpg“예!”

16553287647859.jpg“지금 당장 황후 폐하를 모시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라!”

부는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레파트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후에게 다가갈 무렵이었다.

16553287647873.jpg“왜 마법사들은 없는가? 탑이 이렇게 가까이 오는데 파괴하지 않아? 땅에 닿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황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리오넬에게 물었다. 하지만 리오넬은 그 물음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16553287647859.jpg“빨리 이동하십시오, 황후 폐하! 위험합니다!”

이곳의 위험은 단순히 탑뿐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른 팔뚝 길이만 한 유리 파편이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갑옷도 입지 않은 황후가 저 파편에 맞는다면 그대로 몸이 잘리고 말 것이었다. 도대체 피신하지 않고 이 지옥에 왜 뛰어들었는지!! 저 여린 몸에 자그마한 상흔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리오넬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황후의 몸을 완전히 가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든 유리 파편이 그의 검과 맞부딪히려는 그 순간이었다.

16553287647859.jpg“?!”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들던 유리 파편이 투명한 무언가에 부딪혀 부드럽게 밀려나며 바람에 휩쓸렸다.

16553287647859.jpg“키퍼?”

리오넬은 드디어 마법사들이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레파트 경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두리번거리며 마법사들을 찾았다.

16553287647873.jpg“이제야 오는 거야? 저 속도로?”

마법사들이 오고는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마력이 정말 그들의 것일까? 일단 거리가 굉장히 멀었고, 황후의 말처럼 다급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리오넬은 몸을 돌려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탑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의미 모를 말을 던졌다.

16553287647873.jpg“5급에 가까운 4급이니 굳이 기다릴 것 없겠어.”

그리고 리오넬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가녀린 황후와 날카로운 장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그녀가 꺼내 든 길고 날씬한 흑검은 주인과 무섭도록 어울렸다. 황실 근위대의 모든 기사가 숨을 죽인 채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3287647859.jpg“뭘 하시려는 겁니까?!”

다급하게 그녀에게 다가서며 묻는 리오넬에게 황후는 서늘한 목소리로 깔끔하게 답했다.

16553287647873.jpg“탑 제거.”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후가 몸을 낮춘 채 한 마리의 흑표범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내리치는 천둥과 섬광, 붉은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고 있는 검은 재앙을 향해.

16553287647864.jpg“단장님!!”

레파트 경이 놀라 리오넬을 부름과 동시에 리오넬도 황후를 바짝 뒤쫓았다. 황후의 몸이 상승기류에 훌쩍 들리려 하자 리오넬이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방해에 아델은 혀를 차며 마력으로 그의 손을 밀어냈다.

16553287647873.jpg“걱정 마. 방해하지 마라.”

그가 마력에 뒤로 밀려난 사이, 황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탑을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오른발을 강하게 굴러 상승기류에 제 몸을 실었다.

16553287667597.jpg“안 돼!!!”

16553287667597.jpg“황후 폐하!!!!!!”

처음 목격하는 충격적인 장면에 기사들은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곳곳에서 비명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리오넬마저도 넋을 놓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후 아델라이드가 끝도 없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리오넬은 자신을 밀어내던 마력의 느낌을 떠올렸다. 바람 소리에 정확히 듣지는 못했으나, 그녀는 분명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리오넬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16553287647859.jpg“황후 폐하께서 떨어질 것을 대비하라!”

리오넬의 명령에 기사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혹시라도 황후가 떨어지면 받아 낼 준비를 했다. 뒤늦게 도착한 마법사단도 이 황당한 광경에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기 바빴다.

16553287667613.jpg“황후 폐하께서 상승기류에 휩쓸리셨다고?!”

레녹스 푸아티에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소속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16553287667613.jpg“탑 주위에 원형 진을 만들어라!!! 키퍼, 마력을 넓게 펼쳐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든 물체를 받아 내! 황후 폐하께서 떨어지면 무사히 받아 내라 이 말이야, 알겠어??!!!”

16553287667597.jpg“예!!!”

레녹스 푸아티에의 명령에 검은 로브를 입은 키퍼들이 일사불란하게 탑 주변으로 모여들어 둥글게 섰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16553287667597.jpg“?!”

처음엔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으로 보였다.

16553287667597.jpg“!!!!”

그러나 그것이 일렁이는 불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불은 탑 전체로 무섭게 옮겨붙고 있었다.

16553287667597.jpg“타, 탑이!!!!”

뜨거운 화기가 얼굴에 치밀었다. 태양이 강림한 것 같은 열기에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이제 탑은 하나의 거대한 불기둥처럼 보였다. 어찌나 거세게 타오르는지 눈이 멀 것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16553287667597.jpg“황후 폐하!!!!”

16553287667613.jpg“마력으로 어떻게든 불길을 잡아 봐!!”

마법사들이 어떻게든 불길을 억제하기 위해 애썼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저 화염은 태울 것을 모두 태운 뒤에야 꺼질 것이다.

16553287647864.jpg“단장님, 어찌합니까?!”

날아가 버린 황후, 무시무시한 불기둥에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오직 리오넬만이 냉정했다. 그는 차분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불기둥을 살피며 황후의 모습을 여러 번 되돌이켜 보고 있었다.

16553287647864.jpg“단장님!”

16553287647859.jpg“기다려.”

16553287647864.jpg“……예?”

16553287647859.jpg“기다려 봐.”

몸에 딱 맞는 훈련복, 벨트로 등 뒤에 고정한 검, 그를 밀어내던 강한 마력. 리오넬의 눈이 가늘어졌다.

16553287647873.jpg‘비행형 마수가 나온 탑도 4급으로 분류하오?’

  중신 회의장 대기실에서 황후는 분명 그렇게 물었었다. 레파트 경은 아연실색하여 멍하니 불기둥을 바라보았다. 리오넬마저 기다리라 하니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끝도 없이 타오를 것만 같던 백색 불꽃이 갑작스럽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장미정원에 모인 기사들과 마법사들 모두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하늘 끝자락이 옅은 분홍빛으로 바뀌기 시작할 무렵, 백색 불꽃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리오넬은 무언가를 포착했다. 지금까지 굳건히 제자리에 서 있던 그가 있는 힘껏 탑 아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낙하하고 있는 황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 * * 아델은 온몸에 힘을 뺀 채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점점 푸르게 변하는 하늘이 보인다. 탑을 파괴하고 추락할 때, 순식간에 멀어지는 하늘은 오직 그녀만이 아는 장관일 것이다. ‘그러다 죽으면 어쩝니까? 언제 바닥이 가까워질지 알고요?!’라고 묻던 부하에게 아델은 ‘내 취미에 찬물 끼얹지 마라.’라고 답했었다. 탑 속에서는 조금만 힘을 써도 마력이 증폭되기에 마지막 순간 속도를 줄여 땅에 착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보는 사람은 무서워도 말이다. ‘자, 이제 멋지게 착지를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몸을 뒤집어 땅을 바라본 아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남자가 겁도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절박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받아 내리란 의지가 깃든 아름다운 얼굴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델은 재빨리 마력을 이용해 온몸을 위로 끌어당겼다. 두 팔을 벌리고 있던 리오넬도 황후의 낙하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자 천천히 팔을 내렸다. 빛무리처럼 보이는 불꽃이 산산이 조각나 하늘로 너울너울 춤추듯 사라지고, 핏빛 하늘은 색이 옅어져 분홍빛으로 변하는 와중이었다. 황후는 옅은 장밋빛 하늘과 빛무리를 뒤로한 채 마치 강림하듯 서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리오넬과 아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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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갑고 창백한 낯빛의 황후가 사뿐히 땅에 발을 디뎠다. 그와 동시에 탑은 마지막 불꽃과 함께 사라졌고, 하늘 끝자락엔 푸른 물이 들기 시작했다. 바람마저 멈춘 이 순간, 폐허가 된 장미정원엔 고요가 찾아왔다. 모두의 시선을 장악한 아델이 리오넬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풀려 버린 머리카락이 검은 폭포처럼 한쪽으로 쏟아졌다.

16553287647873.jpg“두 팔로 낙하하는 나를 받으려고 한 것이오?”

16553287647859.jpg“그러려고 했습니다.”

16553287647873.jpg“그랬다간 팔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오. 검을 쓰는 기사가 말이오.”

아델은 제 팔이 어떻게 될지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은 채 미련하게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던 넓은 어깨를 힐끗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제껏 떨어지는 그녀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은 있어도 여차하면 그녀를 받아 내겠다며 달려온 사람은 없었다. 아델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53287647873.jpg“아무튼 호의는 고맙게 받겠소. 더불어, 어제 일도.”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리오넬이 벌써 저만치 걸어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간밤 잔뜩 흐트러진 얼굴로 도망치던 사람이 아니었나? 어떻게 하루 만에 저렇듯 웃을 수 있단 말인가? 가느다란 어깨의 감촉이 아직 손바닥에 생생했다. 리오넬은 아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난밤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손을 말아 쥐었다. 황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한 방법으로 탑을 깨부순 황후의 이름을 연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델은 성큼성큼 걸으며 한쪽에 서 있는 레녹스 푸아티에를 힐끔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델을 바라보는 그의 한 손엔 증폭기로 보이는 검을 들려 있었다. 아델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16553287647873.jpg“검, 집어넣지. 필요 없을 듯하니.”

레녹스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16553287647864.jpg“황후 폐하께서…… 혼자 탑을 제거하신 것…… 맞죠?”

누군가의 물음이 폐허가 된 장미정원 위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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