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이름을 부르고, 말을 낮출 거야2021.06.22.
대기실의 파란은 황후의 집무실까지 들려오지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아델에게 전달되었다.
‘얘네 다 왜 이래?’
순서대로 들어와 면접을 보는 지원자들의 태도가 갑자기 미묘해진 것이다. 앞선 지원자들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데, 그것이 참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 아델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랄까, 넋이 나간 것 같기도, 의욕이 없는 것 같기도 한 지원자들이 연달아 들어왔다. 하지만 아델은 이내 그런 의문도 털어 버렸다. 지긋지긋한 면접이 드디어 끝났다. 태도가 어쨌건 간에 방금 줄줄이 들어왔던 면접자들은 다 탈락이다. 아델은 사서 고생을 했다고 중얼거리며 면접자 인적 사항을 한쪽으로 밀어 버리고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다 끝났다.”
노곤한 어조로 중얼거리는데 막 지원자를 돌려보내고 들어온 긱스 부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 지원자가 한 사람 남았습니다.”
“다 끝난 것 아니었소?”
긱스 부인은 대답 대신 손에 쥐고 있던 빳빳한 서류를 내밀었다.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아델은 몸을 일으키며 서류를 받아 들었다. 빠른 속도로 서류를 훑던 황후의 시선이 어딘가에서 정지했다.
“마지막 지원자를 들라 할까요?”
서류를 뚫어져라 보던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로로 가득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어느새 바짝 조여져서 냉혹한 짐승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긱스 부인이 다시 대기실로 나오자 리오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긱스 부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 문을 직접 열어 주었다.
“들어오라 하십니다.”
리오넬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손이 자꾸만 저릿저릿해서 등 뒤로 감춘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테세우스가 보았다면 왜 이렇게 긴장을 했느냐고 웃었을 것이다. 리오넬은 옷매무새를 만진 뒤 열린 문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아델은 화려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열린 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긱스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여유로운 보폭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 마지막 지원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긴 다리로 성큼 걸어 들어온 그가 아델을 향해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곧고 반듯한 자세, 흔들림 없는 시선. 제복을 입고 있었을 땐 기사의 표본처럼 보였는데, 딱 맞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으니 다른 사람처럼 우아하게 느껴졌다. 아델라이드는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황후 폐하.”
정중하게 인사 건넨 리오넬이 황후의 강렬한 시선을 마주 보았다. 화려한 의자에 느긋한 자세로 기대어 앉아 있지만, 황후는 조금의 틈도 없어 보였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검은 폭포처럼 흘러내렸고, 치켜뜬 금빛 눈동자는 오싹할 정도로 선명했다. 이토록 화려한 궁에서 마주한 그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
“리오넬 발드르 경.”
귀를 사로잡는 저음이었다. 느릿하게 리오넬을 호명한 황후는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둔 채로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리오넬이 자리에 앉자 긱스 부인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차를 대접하지 않음을 양해 바라오. 다른 지원자들도 똑같이 대우했소.”
“물론입니다.”
지겹게 반복했던 말을 던진 아델은 ‘자, 이제 한번 해 봐.’라는 시선으로 리오넬을 응시했다. 대화를 주고받고 질문을 하는 것도 지원자가 한둘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원자들이 지긋지긋할 만큼 몰려들자 아델은 어느 순간부터는 입을 닫아 버렸다. 황후가 말문을 닫고 빤히 쳐다보는 순간, 지원자 대부분이 탈락했다. 버벅거리다가 좌초당하고, 당황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다가 침몰했다. 그래도 몇몇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 할 말을 했는데, 마음에 들 정도의 태도를 보인 사람은 탈탈 털어 다섯 손가락도 채 되지 않았다. 아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리오넬은 그녀의 강렬한 시선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황후가 원하는 것은 유희가 아님을. 그 확신이 드는 순간, 차가운 이성이 머리를 잠식했다. 리오넬은 미사여구를 모두 던져 버리고 본론을 꺼냈다.
“조력자가 필요하십니까, 황후 폐하?”
그 말에 황후가 천천히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표정한 얼굴과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에도 리오넬은 굴하지 않았다.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십니까?”
“추상적으로 돌려 말하지 말고, 명확하게 말하시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이곳에서 믿을 만한 권력과 손을 잡고, 이미 궁을 차지한 누군가에 대항하여 힘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보좌관을 물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바로 했다. 그녀는 아니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잠시 황후의 태도를 재어 보던 리오넬은 가슴을 반듯하게 펴며 말했다.
“누구를 선택하시든, 저를 택하신 것보다 못한 선택이실 겁니다.”
확신에 찬 것도, 강압적인 어조도 아니었다. 너무나 담담하여 마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델은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초연한 리오넬의 태도에 잠시 멍해졌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황후의 웃음에도 리오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델은 웃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넬 발드르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달려왔다.
“이보시오, 경. 아니, 장관이라 불러야 하는가?”
“편안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아무튼 지금 진심으로 내 보좌관이 되고 싶다, 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왜?”
황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지적했다.
“이곳에 온 지 얼마지 않아 정세를 완벽하게 읽지는 못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발드르 직계가 내 보좌관이 되어 얻을 이득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지. 가신 가문 혹은 이득이 맞아떨어지는 다른 가문의 사람을 포섭하여 후보로 보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직접 온 이유가 무엇인가?”
황후의 질문에 리오넬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알고 계신 탑에 대한 정보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탑에 대한 정보?”
“그렇습니다.”
“황후의 보좌관이 되어 잃을 것보다 탑에 대한 정보로 얻는 이득이 더 크다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한 줌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아델은 ‘흐음’ 하며 턱을 매만졌다.
“내게 보좌관을 뽑으라 제의한 사람이 그랜드 공작이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길,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발드르 공가에서 사람이 온다면 더 볼 것도 없이 그를 선택하라 하더군.”
리오넬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다른 누굴 선택하든 본인을 택하는 것보다 못한 선택이라니. 감히 나조차 해 본 적 없는 말이었소.”
“오만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일 것입니다, 황후 폐하.”
정중한 얼굴로 그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별안간 석양이 길게 들어와 아델라이드 뒤로 쏟아졌다. 그녀에게 한 번 걸러진 햇살이 리오넬에게 닿았다. 아델의 그림자가 리오넬의 목 끝을 적시고, 그녀에게 걸리지 못한 붉은 햇살이 얼굴에 닿았다. 검푸른 눈과 머리카락, 붉은 햇살을 받은 아름다운 얼굴을 홀린 듯 응시하던 아델은 문득 이자가 보좌관이란 직책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편한 대로 그댈 부르면 된다 했소?”
갑작스러운 질문에 리오넬은 의아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리오넬.”
소리 없이 밀려온 강렬한 석양처럼, 황후는 한순간에 리오넬을 압도했다. 단지 이름을 부른 것으로 말이다.
리오넬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며 정지했다.
“황궁의 누군가에 대항하여 내 위신을 세울 목적으로 보좌관을 뽑는다. 아주 정확하게 이해했소. 한데 그러려면 보좌관은 내 연인 행세까지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소?”
황후가 붉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자, 음영 진 금빛 눈동자가 달처럼 휘었다. 리오넬은 그 웃음에 숨을 삼키며 입 안의 여린 살을 세게 물었다.
‘발드르 공가에서 사람이 온다면 더 볼 것도 없이 그를 선택하십시오.’
아델은 이 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랜드 공작이 붙인 단서처럼 ‘그럴 리는 없겠지만’이란 말에도 동의했다. 공가의 직계가 와 봐야 득을 볼 리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왔고, 심지어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했다. 그러니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난 말을 낮출 거야.”
속삭이는 듯 다정한 어조에 리오넬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델이 고개를 기울이자 검은 머리카락이 밤처럼 쏟아졌고, 달처럼 노랗게 빛나는 눈이 마치 영혼을 끌어당기듯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낮출 거야, 리오넬. 그래야 달라 보일 것이거든.”
“…….”
“이래도 괜찮다면, 좋아. 그대를 내 보좌관으로 임명하지.”
보좌관으로 임명하겠다는 말은 마치 주문 같았다. 리오넬은 그제야 간신히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보좌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상관없다?”
“상관없습니다.”
빈틈없이 나오는 대답에 아델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사흘 내내 면접을 보느라 지쳤던 몸이 거짓말처럼 가뿐해졌다. * * * 소식을 전달한 시종은 침을 꿀꺽 삼키며 초조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꼭 제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서 식은땀이 흘렀다.
“……누가 지원했다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시종을 노려보던 황제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자 시종은 황급히 대답했다.
“리오넬 발드르 경이 응했다 합니다.”
“황후의 정부 자리에?”
“예? 어…….”
황제의 적나라한 표현에 시종은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그자가 응했고, 황후는 그를 선택했나?”
“그것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오서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신 것이 아닌지라……”
황제의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알게 모르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것이 기어이 튀어나왔다. 카를은 자꾸만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을 내보낸 뒤 테라스로 나갔다. 사위는 캄캄했다. 가을은 낮보다 밤에 먼저 찾아왔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자 알 수 없이 술렁이던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는 여름보다는 겨울이, 낮보다는 밤이 좋았다. 뜨겁고 더운 것보다는 혹독하게 추운 것이 낫고, 화창하게 환한 것보다는 몸을 가릴 어둠이 편안했다. 이 밤을 떠올릴 만큼 새카만 머리카락과 요요한 금빛 눈동자.
“…….”
밤처럼 쏟아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정체를 알 수 없는 단내가 자꾸만 코끝에 맴돌았다. 카를은 숨을 참았다. 그날, 황후가 응했다면 그는 그 향기에 취해 디안을 물리고 아델과 밤을 보냈을 것이다. 오만하게 치켜뜬 눈이 어떻게 이지러지는지,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고귀한 피를 타고나 당연한 듯 지존의 자리를 움켜쥔 여자. 그 여자가 어떻게 흐트러지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뇌리에 새기듯 지켜보았을 것이다. 카를의 가슴 속 검은 바다가 다시 출렁였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봄꽃 향내가 자꾸만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는 어두운 시선으로 휘영청 한 달을 노려보았다. 먹먹한 어둠을 가르고 요요히 빛을 뿌리는 노랗고 노란 달.
“그저 있음. 그저 존재함.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깃펜에 달린 깃털, 화병에 담긴 꽃이 뭐가 나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손에 쥘 수 있을 때 언제든 쥐어지는 것이야말로 편안한 삶 아닌가? 이곳에서 권력을 잡고 자리를 다지기 위해 굽히고 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그의 제안이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카를의 눈이 어둡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꾸만 주위를 맴돌던 달큰한 향이 기어이 폐부로 스민 듯했다.
“이빨을 보이고 발톱을 드러낸 짐승을 어떻게 길들여야 할까. 산야를 헤치고 다니는 검은 짐승에게 목줄을 걸고 손바닥 위의 음식으로 길들이려면……. 우선 이빨과 발톱을 모조리 뽑아야겠지.”
그런데 이빨과 발톱을 모조리 뽑혀 굴복한다면, 그것은 과연 맹수라 부를 수 있는 존재일까. 그가 원하는 것은 거친 산야을 군림하는 야성 어린 왕인가, 이빨 뽑힌 채 가련하게 죽어 가는 짐승인가. 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을 밀어내며 카를은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따라붙는 달빛이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