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양심 없는 황제2021.06.26.
리오넬이 돌아간 뒤, 아델은 가볍게 저녁을 먹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손발이 하얗게 부르틀 정도로 욕조에서 몸을 풀며 현기증이 돌 만큼 노곤해졌을 때 침대로 기어들어 가면 의식이 점점 사라지는 나른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잠에 빠져드는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은 어떤 피로 회복제보다도 탁월해서 아델은 물에서 나가지 않고 버텼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긱스 부인이 들어왔다.
“아, 그렇지 않아도 곧 나가려 했소.”
“예, 그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있소?”
황후가 탕에서 나오자 긱스 부인이 재빨리 가운을 어깨에 둘러 주며 찬기가 들기 전에 젖은 머리카락을 큰 수건으로 감아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긱스 부인은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황제의 방문을 알렸고, 아델은 반사적으로 눈매를 굳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가운을 여며 준 노부인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어찌할까요?”
긱스 부인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이런 점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고, 가장 먼저 황후의 의사를 물었다.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틀렸다. 따뜻한 목욕으로 나른해진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조여졌다. 황후는 성큼성큼 욕실을 박차고 나가며 간결한 어조로 대꾸했다.
“리오넬 발드르가 왔다 갔으니 뭐든 묻고 싶어 오신 것 같은데. 무엇이 궁금하신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들어 봐야 하지 않겠소?”
* * * 카를은 황후의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델라이드 황후는 선대 황후와는 다른 침실을 사용 중이었다. 만약 선대 황후가 사용했던 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면 그는 견디지 못하고 돌아갔을지 모른다. 잠시 후, 침실 문이 열리더니 가벼운 홈드레스 차림의 황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목욕 중에 오신 것이라서 말입니다.”
맞은편 소파에 앉는 황후에게서 갓 목욕한 사람 특유의 비누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녀는 참 묘한 사람이었다. 볼 때마다 다른 사람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제 폐하?”
아델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던 카를은 그제야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묘한 감정이 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누굴 보좌관으로 지정할 것이오?”
타인에 대한 일말의 배려나 이해란 황제에겐 무의미한 것이 틀림없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 그때 긱스 부인이 차를 내어 온 덕에 아델은 찻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비웃음이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면 황제는 찻잔엔 시선조차 주지 않고 황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요. 그런데 폐하.”
의식적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델이 황제를 응시했다.
“제가 그것을 폐하께 보고해야 합니까?”
“누굴 선택할 것이오?”
카를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뻔뻔하리만치 싸늘한 얼굴로 다시 한번 대답을 강요하는 황제를 향해 아델은 이번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제게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누굴 선택하든, 제 마음입니다. 묻지 마세요.”
“리오넬 발드르를 선택할 것인가?”
황제가 대놓고 리오넬을 거론하자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렇다면요? 안 됩니까?”
“다른 이로 선택하시오.”
“어째서요?”
“발드르 공가는 황가에 반목하는 자들이오. 그런데 그런 자를 보좌관으로 들이겠다? 황가를 우습게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지. 본분을 잘 살피시오.”
“…….”
아,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몸이 작아 양심만 몸 밖에 둔 것도 아니고 둘 곳이 없어 쓰레기통에 처박은 것도 아닐 텐데. 원래 이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이런 취급을 해도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깃펜에 달린 깃털처럼, 화병에 담긴 꽃처럼. 제가 그리 살길 원하십니까?”
아델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심장께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황후는 나직하게 물어 왔다. 그녀의 질문에 카를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것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죠. 제가 그리 살길 원하십니까?”
산야를 누비는 왕의 목에 목줄을 걸고자 마음먹은 황제는 황후의 질문에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그렇소.”
아델라이드는 새파랗게 타올랐다. 황제의 요구는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단단히 뿌리내린 아델라이드라는 자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부속품. 액세서리.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이왕이면 있는 것이 보기 좋은, 딱 그 정도의 존재.”
황후의 입에서 쏟아진 날것 그대로의 표현에 카를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기 의견은 내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는 수동적인 존재.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편안한 상대. 제가 딱 그 정도의 존재가 되길 바라시는 것이군요.”
날카로운 말에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그사이 아델은 들썩이는 가슴을 누르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번뜩이는 눈동자는 황제에게 못 박혀 있었다. 필사적인 싸움에선 먼저 눈을 피하는 자가 지는 것이다. 한 번도 굴복해 본 적 없는 금빛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투지에 카를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눈앞의 황후는 상대가 누구건 간에 이 싸움에서 물러나거나 질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역시, 이 싸움에서 물러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카를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래. 딱 그 정도를 원하지.”
아델은 김이 오를 만큼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소태를 삼킨 것처럼 입안이 쓰고 입술이 바짝 말라서 뜨거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누굴 선택할 것이냐고요?”
“…….”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종용하는 그를 향해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답했다.
“리오넬 발드르. 그를 선택하겠어요.”
“황후!”
“‘나의 연인에게 관심 두지 마시오. 나 또한 그대의 연인에게 관심 두지 않을 터이니.’”
“…….”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카를이 어금니를 세게 물며 사납게 아델을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눈을 길게 휘며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제 연인에게 관심 두지 마세요.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요.”
“뭐 얼마나 보았다고 연인이오? 그저 내게 시위하는 것 아니오? 어차피 그대에게 돌아갈 화살을 일부러 겨눠 좋을 것이 없을 텐데.”
“뭘 얼마나 보았느냐고요? 길고 오래 볼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한눈에 들어올 수도 있죠.”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자 진주같이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황후는 열이 올라 발그레한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폐하. 시위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흘 동안 수많은 이를 살펴보았으나 제 눈에 들어오는 자가 그였을 뿐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엄동설한 북풍 같았다. 서로 던진 시선이 깨질 수 있다면 이미 조각조각 나 서로의 살갗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카를은 어금니를 더욱 세게 물며 위험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소?”
“폐하야말로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라 했어.”
“저는 부속품, 액세서리 따위가 될 생각 없습니다. 제 본분을 다하라고요? 폐하께서 저를 동등한 배우자로 인정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교차점이 없는 평행선에 선 것 같았다. 아니, 그러했다. 묻는 답에 대한 대답 대신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었다. 서로가 조금도 양보해 줄 수 없는 것을 원하니 그럴 수밖에. 결국 카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친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넘어가기 직전, 불현듯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아델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현명하게 생각하시오, 황후.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등 뒤로 꽂히는 말은, 놀랍게도 처음 들어 본 말이 아니었다. 문이 요란하게 닫히자 아델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현명하게 생각해라, 아델.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어머니. 여기, 어머니와 닮은 자가 있습니다. 제 운이 그러하여 이런 사람만 맞닥트리는 것인지, 그런 사람만이 지존의 자리에 앉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현명……? 도대체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 * * 카를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자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함께 서 있던 긱스 부인도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시녀들이 있든 말든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카를은 불현듯 긱스 부인 앞에서 멈춰 섰다. 목 끝까지 깃을 세운 정장 드레스와 한 올도 남김없이 틀어 올린 은백발.
“그대가 충성하는 것은 사람인가, 자리인가?”
“……황제 폐하.”
카를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긱스 부인의 어깨를 세게 붙잡더니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천한 시녀의 배를 빌어 태어난 내가 황제가 되어 고깝겠지. 사내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엘리자베타 황녀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말. 그런 것 다 알아. 그래서 참 의외야. 황후가 당신을 불렀을 때, 나는 당신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거든. 왜냐? 나의 황후니까. 그런데 오더라고. 내가 디안을 도와 달라 했을 땐 그렇게 가차 없이 거절하던 당신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황후의 부름엔.”
“…….”
“꼭 뭐처럼 뛰어오더라고.”
증오 어린 말에 긱스 부인은 눈을 세게 눌러 감으며 작게 탄식했다.
“그러니까, 황후에게 전해. 내 제국, 내 궁에서 잘 지내려면 이곳의 주인인 내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야 당신도 황후의 옆에 있을 수 있잖아? 안 그런가, 유모?”
“…….”
할 말을 다 끝냈는지 카를은 긱스 부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자세를 바로 한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어둑한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 버렸다. 긱스 부인은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저, 부인.”
보다 못한 시녀들이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허리를 세운 긱스 부인은 빠져나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단정하게 넘기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결벽적으로 보일 만큼 단정한 태도에 시녀들은 기가 질려서 입을 다물었지만, 긱스 부인은 꼿꼿한 자세로 황후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황후 폐하, 한나 긱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 * 황후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황후 폐하.”
“할 말 있으면 하시오. 듣고 있으니.”
긱스 부인은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황후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치켜떴다.
“할 말 있소?”
긱스 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말을 고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는 선대 황후 폐하께서 임명하셨던 황궁 총관리인이자 그랜드 공작 전하의 유모였습니다.”
“알고 있소.”
“저는 동시에 한 명의 아기를 더 돌보았지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일이었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극히 드뭅니다.”
“?”
“저는, 현 황제 폐하의 유모이기도 했습니다.”
그 말에 아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 말을 지금 왜 하는 것이오?”
“……그분 마음속 깊은 곳엔 아직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습니다.”
“…….”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였으나 끝내 사랑받지 못한, 올바른 사랑이 아니라 비틀린 사랑을 받아 웅크린 아이 말입니다.”
긱스 부인은 허락을 구한 뒤 조심스럽게 황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길고 긴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선대 황제의 사생아였던 남자아이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