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대와 밤을 보내고 싶은데2021.07.03.
잠을 자려던 아델은 폭군 같은 기세로 침실 문을 열고 나타난 카를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문을 두드린 것도, 만남을 청한 것도 아니고 그냥 들이닥쳐?
“지금 뭐 하는……!”
“그대와 밤을 보내고 싶은데.”
그의 말에 아델이 찌푸렸던 눈을 크게 떴다. 황제의 눈빛, 속에서 끓어 나온 듯한 울림이 술잔에 가득 찬 술처럼 위험하게 넘실거리다 흘러넘쳤다. 뒤따라 들어온 긱스 부인은 황제의 선언에 머뭇거리며 황후의 얼굴을 응시했다. 관록의 노부인조차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나가. 주위를 물려라.”
황제의 간결한 명령이 떨어지자 당혹스러워하던 노부인조차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델을 씁쓸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델은 긱스 부인이 문을 닫고 나가는 장면을 선득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소리 없이 문이 닫히는 순간, 위태롭게 서 있던 카를이 사냥감을 압박하는 맹수처럼 거친 걸음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침대에 앉아 있는 아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원하면 가지는 사람이다. 망설일 이유도, 욕망을 참을 이유도 없었다. 그 상대가 설령 황후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대와 밤을 보내고 싶어 왔는데, 꼭 나를 죽일 것 같은 눈빛이군.”
“후회하게 될 거라 말하신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초야를 치르자? 인제 와서?”
“배우자로 인정부터 하라던 말이 떠올라서.”
“…….”
“그러려면 이게 우선 아닌가?”
카를은 한쪽 무릎으로 침대 끝을 짚고 올라가, 앉아 있는 아델에게 몸을 기울였다. 고개를 숙이자 달콤한 봄꽃 같은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황궁에서 제대로 된 힘을 가지려고 발버둥을 칠 모양인데. 멀리 돌아갈 필요가 뭐 있나? 이것 또한 황후의 의무지. 의무를 다하고 힘도 가져. 내가 손에 쥐여 줄 테니까.”
카를은 아델의 어깨를 손으로 천천히 밀었지만, 뒤로 밀려야 할 황후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줌의 열망도, 흥분도 묻지 않은 시리도록 차가운 황후의 얼굴에 카를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까다롭네.”
“…….”
“의무는 다하지 않고, 황후로서 힘을 차지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델은 끔찍한 기분에 몸서리쳤다. 좋든 싫든 그는 그녀의 배우자였고, 초야는 당연한 의무였다.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인데……. 기분이 너무나 더럽다. 일그러지는 황후의 얼굴을 보며 카를이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한 말 중, 무엇이 그리도 못 받아들이겠소? 무엇이 그토록 굴욕적인가? 이 제국에서 그대가 숙일 사람이 나 이외에 또 있나?”
그 말에 아델은 으르렁대며 맞받아쳤다.
“황후는 황제에게 무조건적으로 숙여야 한다니, 처음 듣는 소리군요. 에흐몬트에서는 황후가 그런 존재입니까?”
카를은 그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매서운 눈매로 아델을 재어 보듯 응시하던 그가 문득 거짓말처럼 웃었다. 어두운 밤을 닮은 웃음에 아델이 잠시 당황한 사이,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가볍게 잡아 아주 신중하게 들어 올렸다. 무례한 태도면 황후는 틀림없이 화를 낼 테니. 이윽고 아주 하얗고 작은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수를 연상케 하는 이의 발이 이렇게 작고 희다니. 카를은 한 손에 가뿐히 들어오는 발목을 움켜쥐고 아델을 응시한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밤을 누비는 악마가 있다면 그와 같은 모습이리라. 자색의 눈동자가 아델의 금빛 시선을 사로잡은 사이, 그가 오목하게 들어간 여린 곳에 입을 맞췄다.
물컹하고 부드러운 것이 젖은 소리를 내며 발목에서 떨어졌다. 아델의 발을 놓고 몸을 일으킨 황제가 그녀의 표정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속삭였다.
“자, 내가 고개를 숙이고 그대 발에 입을 맞췄소. 이제 됐소?”
아름답고 오만한 그녀의 얼굴은 태생부터 황족이었던 자다웠다. 완벽한 혈통의 무결한 황족. 그녀는 누구에게도 굴종할 필요가 없었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육식동물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인 카를이 아델라이드의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뺨에서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로 손을 미끄러뜨리자 세상을 쥔 것 같은 쾌감이 몰아쳤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며 뇌리를 떠나지 않던 그녀의 붉은 입술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런 다음 턱을 눌러 벌어진 입속에 그것을 밀어 넣을 작정이었다. 서리같이 서늘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놔.”
“…….”
“목, 놓으라고.”
아델은 그가 제 목을 움켜쥐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아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카를은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린 그때, 별안간 금빛 눈이 휘며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 매혹적인 웃음에 카를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아델이 황제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카를의 눈에 서서히 불쾌한 감정이 차올랐다.
“주제를 모르는군.”
신랄한 비아냥에 아델은 웃어 버렸다. 음산한 웃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이윽고 웃음을 갈무리한 아델은 형형한 눈빛으로 카를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끊어 내듯 말했다.
“날 모르는 건 당신이지.”
감히 내 목을 조르고 나를 협박해. 목에 가해졌던 압박에 아델라이드의 온몸이 끓어 올랐다. 울분에 찬 얼굴로 화를 내는 아델을 보며 카를도 실소했다. 그는 느긋한 태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닌데. 널 모르는 것은 너 같은데.”
개소리하지 마. 아델은 그렇게 말할 뻔했다.
“가진 것이라곤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가 다면서 이렇게 자존심을 세우며 이빨을 드러내다니. 무슨 생각인가?”
빌어먹게도 아델은 그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싱긋 웃으며 아주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숙여. 굽혀. 내게 무릎 꿇어.”
독 같은 속삭임에 아델은 씹어뱉듯 답했다.
“안 해.”
“…….”
“안 한다고.”
카를은 아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모르나 보다. 제 표정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잔뜩 흐트러진 황후의 모습을 보니 열기가 식었음에도 만족스러웠다.
“뭐…… 아쉬운 건 그대일 테니까.”
저벅거리는 걸음 소리가 멀어지더니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델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자도 무슨 상황인지 묻지 않고 아델을 홀로 둔 채 도로 나갔다. 꼭꼭 닫은 문틈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새어 들어오는지 몸이 떨렸다. 양손으로 팔을 문지르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아델은 문득 자신의 얼굴이 축축하게 젖었음을 깨달았다. 뜨거운 물기가 지금도 계속 뺨을 적시고 있었다. 홧홧한 목덜미가 어찌나 뜨거운지 아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새삼 목이 메었다. 아델은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이제야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다. 바보처럼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정말 홀로 왔다는 것을. 늘 홀로 걸어왔다고 자신하다니, 이 얼마나 알량한 착각이었던가? 늘 앞서 걸었기에 시야에 아무도 없었을 뿐,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그녀의 곁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지 마라. 너희가 다 따라오면 탑 대항본부는 누가 지키나?’
다 두고 왔다. 누군가는 버리는 것이냐 물었다. 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버린 것이었다. 그들을 다 두고 오면서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전에도 홀로 왔던 길이니 내 걱정은 마라.’
늘 홀로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뒤를 지킨 수많은 신의와 의리, 선의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공기처럼 처음부터 존재하여 감사함을 잊고 있었다. 오만하게도, 잃고 난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그들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젠 누구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고 왔기 때문이다. 아델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쉬지 못해 꺽꺽댔다. 그녀는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온몸을 덜덜 떨며 괴로워했다. 외로웠다. * * *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락의 끝자락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그 틈에 어둠에서 기어 나온 악마가 등을 끌어안았던 것일까?
‘그놈의 자존심!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요? 잠~깐 숙이는 거 그게 뭐가 어려워요?’
앗! 이런!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빌어먹을, 가위눌렸다.
‘자~존~심을 세워~서~ 지위도 잃고요~ 눈 한 번 딱 감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을 크~~게 만들어요~’
요망한 목소리로 누군가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른다. 남들은 칼을 입에 물거나 피를 질질 흘리는 귀신이 목을 조르거나 머리 위에서 춤을 춘다던데, 아델을 괴롭히는 건 고작 이따위 노래였다.
“으윽.”
있는 대로 몸에 힘을 주며 용을 쓰자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우 진짜!!”
뻣뻣하게 굳어 용을 쓰던 아델은 기어이 가위에서 벗어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별…… 거지 같은 가위에 다 눌리고.”
가위에 눌린 것인지, 내면의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짜증 난다고 중얼거리며 아델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직도 몸이 덜덜 떨려서 양팔을 문질러 댔다. 끝도 없는 나락을 들여다보며 몸서리치다 어느 틈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젠장! 결혼을 물릴 수도 없고. 물린다고 돌아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제를 모른다는 말이 자꾸만 가슴을 긁어서 아델은 제 가슴을 벅벅 문질렀다. 악마 같은 황제의 얼굴이 떠오르자 머리도 거칠게 흔들었다. 그때였다.
“황후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한나 긱스입니다.”
술렁이던 가슴이 차게 식었다.
“들어오게.”
그녀는 어제와 다름없는 얼굴,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슨 일 있나?”
싸늘한 어조의 물음에 긱스 부인이 잠시 침묵했다. 시간이 길게 늘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황후궁 예산 추경을 없었던 일로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내려졌습니다.”
“…….”
진짜 빌어먹을 새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졸렬하고 치졸한 복수가 날아와 목구멍에 처박혔다. 심지어 그것은 상아궁에서 온 소식이었다. 그렇게 황후궁 예산 추경 무산 소식이 마른 들판에 번진 불처럼 황궁을 덮칠 무렵, 황후궁에서도 지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리오넬 발드르를 황후의 보좌관으로 임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