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황후와 보좌관2021.07.06.
황후의 보좌관이 되는 영광……을 획득한 사람은 발드르 공가 역사상 리오넬이 유일할 것이다. 아무튼 발드르 공제가 황후의 보좌관이 되었다는 소문이 황후궁 예산 추경 무산 소식과 더불어 황궁을 휩쓸자, 궁은 말 그대로 들썩거렸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공가 식솔들은 자랑스러운 작은 도련님이 황후의 보좌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럼 이제 우리 도련님 결혼은 어떻게 하시지?”
“발드르 공제이신데 결혼이야 하시겠지.”
“그런데 지원을 직접 하셨다고 했어.”
“……왜? 우리 도련님이 뭐가 아쉬워서?”
“혹시 공작님께서 강요하신 것은 아닐까?”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공제의 행보에 많은 사람이 애먼 테세우스를 탓하기에 이르렀다. 공사 구분이 엄격한 테세우스가 공작가의 이득을 위해 동생을 내몬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와 리오넬을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집사는 이 결정이 오로지 리오넬 개인의 판단이라 단언했다.
“왜 이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집사가 황후의 소환을 받아 입궁을 준비하는 리오넬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
“이렇게 수세에 몰렸는데,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역시. 공작님의 뜻이 아니라 도련님의 뜻이었군요.”
“형님이 내게 그런 명령을 내릴 사람인가?”
그 말에 집사는 허허롭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지만,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보좌관이라니? 그걸 왜 우리 도련님이 한단 말인가, 도대체 왜! 하지만 집사는 리오넬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다녀오지.”
“……예.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집사는 애타는 마음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리오넬은 무슨 일이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쟁취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닮은 듯 달랐다. 테세우스가 정도만을 찾아 걷는 외골수적 기질이 있다면, 리오넬은 어느 틈에 지름길을 찾아내는 재기를 발휘하곤 했다. 그리고 리오넬이 찾아낸 지름길은 공가의 주인인 테세우스가 밟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작금의 보좌관직에 응한 일이다.
“아무튼…… 잘 해내고 오십시오, 도련님.”
집사는 들릴 리 없는 말을 기도처럼 읊조리다가 몸을 돌렸다. * * * 한편, 황후궁. 아델라이드 황후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좋다며 모든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카우치 소파와 한 몸이 된 듯 유유자적하게 누워 발만 까딱이고 있었다. 긱스 부인이 선대 황후를 모시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으나, 아델라이드 황후는 이런 것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방탕에 젖어 무아몽중을 헤매는 폭군 같은 모습이 잘 어울린다니,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물론 다른 말도 함부로 황후에게 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아직 물갈이하지 못한 상황인지라 황후궁의 시녀들은 대부분 디안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디안은 생각보다 시녀들에게서 그럴듯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시녀들이 황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황후가 폭거를 행사하기 때문이냐 하면, 그보다는 생물적, 본능적 두려움에 가까웠다.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숨기고 느른하게 누워 있다고 해도, 언제 발톱을 내밀고 이빨을 드러내 우악스럽게 목덜미를 잡아 누르고 물어뜯을지 모를 일 아닌가? 황후는 평소 시녀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들이 종종거리며 일할 때면 모든 행동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곤 했다. 샛노란 시선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만큼 강렬했다. 창백한 얼굴에 박힌 금빛 시선을 보노라면 정말 맹수가 사람으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심마저 들었다.
“우리를 주시하고 계셔.”
“궁주님께 말을 전하는 것도 알아내실 것 같아.”
아델은 겁에 질린 토끼처럼 자꾸만 자신의 눈치를 보며 종종거리다 나가는 시녀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다가 눈을 감았다. 제 앞에서 움직이는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녀들이 상아궁으로 달려가 이곳의 일을 고해바치는 횟수는 좀 줄었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긱스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답했다.
“최근 일주일 사이엔 상아궁에 방문한 자가 없습니다.”
“하긴, 뭐. 고해바칠 일도 없긴 했소. 그나마 그럴듯한 건이 어젯밤 일인데.”
황후는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언짢은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황후 폐하.”
“말하시오.”
“아직은 황제 폐하와 척질 시기가 아닙니다.”
“내가 초야를 거부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하시오?”
“……죄송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더불어 자칫 그로 인한 화살이 황후 폐하께 돌아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
황후는 말이 없었다. 주제넘다는 말도, 그만하라는 말도 없이 그저 누워 있을 뿐이었다. 긱스 부인은 황후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방을 나왔다. 노부인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예사롭지 않은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자 노부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시선을 돌리자 빛이 들이치는 복도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노부인은 우아한 태도로 몸을 돌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황후의 부름을 받은 리오넬이 온 것이다. * * * 방탕하게 누워 있던 아델은 리오넬이 왔다는 소식에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누워서 방문객을 맞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들라 하게.”
아델이 문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간결하게 명령하자 시녀들이 문을 열었다. 방의 모든 창이 열려 있던 터라 열린 문 쪽으로 순식간에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바람이 몰아친 자리에 단정한 정장 차림의 리오넬이 나타났다. 아델라이드는 누운 자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르게 앉은 자세도 아니었다. 그녀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편안하게 기댄 채로 리오넬을 맞이했다. 격 없는 태도였으나 특별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긴 눈을 달처럼 휘며 매혹적으로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가까이 있던 시녀들도 숨을 들이켰다.
황후는 사람을 홀릴 미소를 지으며 산뜻한 가을바람 같은 어조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다, 리오넬.”
황후의 미소에 넋을 놓았던 시녀들은 결국 입까지 크게 벌리고 말았다. 그녀가 하대할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리오넬조차 귓가를 파고드는 다정한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리오넬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표정을 관리했다.
“황후 폐하.”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다.
“다과는 어찌할까요?”
시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델은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저는 차를 마시겠습니다.”
무언의 질문을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그의 대답에 아델은 가벼운 어조로 시녀들에게 말했다.
“차 두 잔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오너라.”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가는 와중에도 시녀들은 끊임없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이제 곧 발 없는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시녀들이 나가고 두 사람만 남자, 황후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렇게 격식 없는 태도가 불편하진 않소?”
“말을 낮추실 것이라 하셨지 않습니까?”
아델은 리오넬의 표정을 가볍게 살핀 뒤, 팔짱을 풀며 말했다.
“나의 하대를 거북해하지 않아 보이니 마음이 편하군.”
“거북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시원시원해서 좋네.”
그때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다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갔다. 하지만 황후도, 리오넬도 아름답게 차려진 다과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자, 그럼 우리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다정한 내용, 서늘한 말투와 단호한 어조. 섞이기 힘든 것들이 절묘하게 섞인 화법을 구사하며 황후가 고개를 기울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리오넬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황후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마주하고 있을 때면 리오넬의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온통 그녀에게 쏠리곤 했다. 리오넬은 억누른 숨을 고른 다음,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황후는 찻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리오넬은 황후의 모습을 침착하게 살폈다. 황후궁 예산 추경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워낙 치욕스러운 일이라 분노한 황후를 만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지만,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저 모든 것이 치열한 이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리오넬은 격 없는 황후의 태도에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마음을 바짝 조였다. 그사이, 찻잔을 들어 올린 아델 역시 모락모락 오르는 김 사이로 리오넬의 모습을 살폈다. 놀라울 정도로 수려한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고, 자세도 마찬가지였다.
“리오넬.”
“네, 황후 폐하.”
“발드르 공작이 보내서 온 거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물음에 리오넬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지원한 것입니다.”
빈틈없는 대답에 아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이어 물었다.
“공작한테 물어봤을 것 아냐.”
“그렇죠.”
“허락했고?”
“…….”
그에게서 답이 없자 아델은 손을 휘저으며 얼른 질문을 정정했다.
“아무튼 발드르 공작의 허가가 있었다면 그대 뜻과 공가의 뜻이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이렇게 판단해도 되는 것이겠지?”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리오넬은 정중히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명확한 답에 황후는 긴 눈을 휘어 웃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흘 내내 내 인내심이 동나고 있었어. 면접 때 말이야.”
“…….”
리오넬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면접을 보는데 웬 사과를 쪼개려는 놈이 있질 않나, 중요한 것은 쪼개지도 못했어. 괜한 짓을 했다고 자책하던 차에, 긱스 부인이 내게 마지막 지원자가 있다고 하는 거야.”
사과를 쪼개지도 못한 놈은 정말 웃겼어. 아델은 그때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대가 나타났지. 아주 갑자기. 아무튼, 내가 왜 이렇게 말하냐면 말이지.”
“…….”
“보좌관으로서 그대가 아주 흡족하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황후는 리오넬의 검푸른 눈을 꿰뚫어 보듯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천천히 발음했다. 흡족하다는 말이 그의 가슴에 날아와 깊게 박혔다. 리오넬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잘 지내 보자고, 리오넬.”
“……예.”
한 박자 늦은 그의 대답에 황후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급격한 표정 변화에 리오넬이 눈을 깜빡이자 황후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대하고 친한 척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쉽지 않아.”
그리고 과장되게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잘 지내 보자고 하면 최소한 그보다는 길게 대답이 나와야지. 황후가 일방적으로 리오넬 발드르에게 구애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면 아주 곤란해.”
음산한 어조로 따지듯 말했으나, 분위기는 가벼웠다. 이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리오넬의 표정에도 금이 갔다. 표면적인 관계이니 가볍게 응수할 만도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아델이 빨리 무슨 말이든 해 보라는 듯 눈짓하자, 차마 황후를 마주 보지 못하고 한참을 난감해하던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황후 폐하.”
만족했는지 표정을 풀며 황후가 눈을 길게 휘어 웃었다.
“자, 그럼 먼저 들어 볼까? 발드르 공가에서는 내가 어떤 역할을 해 주길 바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