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저도 이제 개싸움을 해 보려고요2021.07.10.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리오넬의 질문에 황후는 말해 보라는 듯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면 편안한 친구, 혹은 연인을 대하는 모습이지만, 냉혹한 금빛 눈동자는 리오넬을 만난 이후 단 한 순간도 느슨하게 풀린 적이 없었다. 리오넬은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할 말을 정리한 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에흐몬트 현 정세가 어떠하며 문제는 무엇인지, 발드르 공가는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 하여 황후와 손잡고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말했다. 나중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을 만큼 민감한 사안은 세심하게 추려 배제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황후는 중간중간 의문이 드는 점은 질문까지 해 가며 리오넬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긴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들은 내용을 복기하며 숙지하는 것이 그야말로 모범생의 표본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황후가 침묵하며 생각을 고르는 동안, 리오넬은 차게 식은 차를 물처럼 들이켰다.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건지 말을 다 끝낸 뒤에야 목이 말랐다.
“이거도 먹어.”
그때, 황후가 불쑥 다과 쟁반을 그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에흐몬트에서 이게 제일 맛있더군.”
“…….”
“……먹기 싫으면 말고.”
“굳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후 폐하.”
“다과 먹어 보라고 쟁반 밀어 주는 게 무슨 무리야?”
“…….”
“난 원래 이랬어.”
여기 와서는 그럴 일이 없었던 것일 뿐이지. 긱스 부인은 황후와 감히 함께 앉을 수는 없다는 듯 늘 서 있거나 일을 했고, 다른 시녀들은 디안 푸아티에의 그림자란 생각이 드니 꺼림칙했다. 황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쟁반에 있던 다과 하나를 입에 쏙 넣어 와삭와삭 깨 먹기 시작했다. 입에 넣은 다과를 꿀꺽 삼키고 입가심으로 차를 마신 뒤, 여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공가에서는 마법사단으로 쏠린 권력의 추를 어느 정도 끌어당겨 오고 싶다, 이 뜻이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더불어 작금의 탑 대항 방식에도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에흐몬트에서는 탑에 관한 모든 정보를 마법사단이 독점하고 공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탑은 권력이 되지.”
어머니가 원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탑은 기회야! 황권이 아닌 신권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 힘을 잘만 이용하면 황제? 아니, 황실은 신이 될 수 있어.’
“정보를 독점하고 공유하지 않는다. 심지어 반드시 필요한 구조마저 입맛에 따라 한다. 마법사단이 살생부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군.”
“……황후 폐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델은 리오넬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에 대한 답은 이미 그대가 면접을 보러 왔던 날 내게 말하지 않았나?”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이곳에서 믿을 만한 권력과 손을 잡고, 이미 궁을 차지한 누군가에 대항하여 힘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보좌관을 물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누굴 선택하든 그대를 선택하는 것보다 못하리라고.”
“예, 그랬습니다.”
“실망시키지 마. 나는 그댈 선택했으니까.”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리오넬은 망설임 없이 답했고, 아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다행히도 우리가 당면한 목적은 같아. 난 우선 마법사라는 점을 이용해 에흐몬트 정계에서의 입지를 쌓아 볼 테니 협조하도록. 그리고 그 전에.”
지금까지 여유만만한 태도로 웃던 황후의 기류가 삽시간에 음산해졌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이며 팔짱을 낀 채,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긱스 부인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황후 폐하.”
“부인, 지난번에 가져왔던 서류를 가져오시게.”
모호한 지칭이었으나 긱스 부인은 두 번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에 리오넬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황후와 긱스 부인을 번갈아 응시했다.
“황후궁 예산 추경 무산 건에 대해 대응하려 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건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발드르 공가에서 직접 황제 폐하께 공식적으로 이의제기를 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어제오늘 들었던 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군.”
황후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하지만 그렇게 신사적으로 항의해서야 어디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있겠냐고. 그렇게 치졸한 방식으로 내게 모욕을 줬으니, 최소한 나도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마음 같아서는 비속어를 섞어 가며 신랄하게 쏟아내고 싶지만, 아델은 체면을 생각해서 참았다. 그녀는 현재 반쪽짜리 황후였다. 예산 추경이 무산되면서, 돈이 필요한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좋아. 공가에선 그렇게 공식적으로 항의를 해 주고.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해야지.”
바람처럼 달려갔던 긱스 부인이 번개처럼 돌아와 아델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아델은 그것을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읽은 뒤 리오넬에게 건네주었다. 리오넬은 그녀가 건네주는 종이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어?”
은근히 물어 오는 어조에 리오넬은 종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맞불을 놓으시려는군요.”
보좌관의 눈치 빠른 답에 고트로프의 마녀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답.”
황제궁에서 뺨 맞고 상아궁에다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 했는데. 같이 손잡고 짝짜꿍 속을 뒤집으니, 더는 둘을 구분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 * * 황후와 보좌관이 대화하고 있던 그 무렵, 통행 허가를 받은 상인 무리가 황후궁에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시녀들이 상단주로 보이는 사람에게 손사래를 쳤다.
“잠시만요! 상단을 부른 적 없어요!”
지금 황후 폐하께서는 상단을 부를 정신이 없다고. 하지만 상단주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빛내며 박력 있게 말했다.
“예, 압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원하시는 물건만 고르시면 됩니다. 일종의 선물이지요.”
“……선물?”
‘어쩐지 더 물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시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상단주는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요! 선물입니다.”
“……누가 보낸 겁니까?”
“디안 푸아티에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결제는 상아궁에서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
시녀들은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 네가 말해.’
‘죽을 일 있냐. 네가 말해라.’
서로에게 미루던 시녀들은 결국 긱스 부인을 통해 황후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황후궁 예산 추경이 무산된 뒤, 상아궁에서 황후에게 ‘선물’을 보냈다. 심지어 카드도 있었다. 긱스 부인에게서 카드를 전달받은 아델은 숨도 쉬지 않고 그것을 읽어 내렸다.
“무슨 내용입니까?”
긱스 부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리오넬도 황후를 주시했다. 그녀는 아름답게 꾸며진 카드를 테이블 위에 툭 떨어뜨린 뒤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힘이 잔뜩 들어간 턱과 손끝을 미루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준마 한 마리 값. 추경 되었던 그 돈만큼 사고 싶은 것을 사라는군. 곧 있을 국경일을 대비하라고? 솜씨 좋은 공방 사람들이니 만족할 만한 물건을 가질 수 있을 거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는군.”
즉, 추경 취소된 돈 만큼 사고 싶은 물건이나 사라, 이 뜻이었다. 그것도 상아궁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니. 긱스 부인은 화가 난 얼굴로 미간을 팍 찌푸렸고, 리오넬은 의자에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숨을 고르며 화를 가라앉히던 아델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긱스 부인, 명령장을 쓸 것이니 관련 서류 준비해 주고. 얘, 너는 상인들에게 가서 전해라. 난 필요 없으니 황후궁에 한 발짝도 들이밀지 말라고.”
명령을 하달받은 두 사람이 각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황후의 방을 벗어나자 아델은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공가 차원의 이의제기, 좀 부탁할게.”
“바로 퇴거 명령을 내리실 겁니까?”
“다른 좋은 방법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던 아델이 다시 앉으며 묻자 그는 진중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쫓아내시면 자칫 디안 푸아티에에 대한 동정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차라리.”
“차라리?”
아델이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불쑥 가까워지자 그는 저도 모르게 귀 끝을 붉히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어서 말해 봐.”
아델의 채근에 리오넬은 나직한 목소리로 제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아델은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길게 휘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정도만 찾아 걸을 것처럼 정직한 얼굴로, 기가 막히네?
“어떠십니까?”
“보좌관직에 응한 것, 정말 그대 생각이었군?”
“그렇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델은 리오넬의 의견을 매우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난감한 부탁인지라 잠시 고민하던 리오넬은 일단은 테세우스에게 제안해 보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오늘 중신 회의가 있으니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이의제기를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아델도 몸을 돌려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전투적인 자세로 궁법서를 펼쳐 해당 항목을 찾아내 다시 한번 숙지했다. 끝이 어딜지,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알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아델은 두툼한 궁법서를 오른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일찍이 부군과 개싸움을 하셨던 오래전의 얼굴 모를 선대 황후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이제 개싸움을 한번 해 보려고요. 응원 좀 해 주십시오.”
그러려면 더러운 똥 밭을 굴러야 하겠지만, 굴종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 * * 마침 사치품을 한껏 늘어놓고 이것저것 살펴보던 디안에게 상인들이 황후궁 문턱도 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폐하도 참 너무하시지. 추경을 취소하라니. 황후 폐하께서 얼마나 서운하시겠어. 그래서 내가 추경 되었던 돈만큼 이런 목걸이라도 사라고 상인을 보내 드렸는데. 몇 달 뒤 국경일엔 어쩌시려고.”
디안이 백금 목걸이 하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제 목에 대어 보며 중얼거리자, 그녀 앞에 거울을 대어 주던 상단주가 슬그머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참 난감해. 황후궁 추경 예산안을 내게 주시면서 사고 싶은 것을 사라고 하시니까 말이야.”
“궁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름다우십니다. 황제 폐하께서 궁주님께 물심양면 정성을 들이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상단주는 짐짓 감복했다는 듯 디안을 칭찬했고, 옆에서 대기 중이던 상단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동조했다.
“궁주님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명받았습니다.”
“궁주님에 대한 황제 폐하의 사랑이 나날이 깊어지시나 봅니다.”
칭찬은 늘 듣기 좋다. 디안은 옆에서 추천해 주는 귀걸이 한 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단주는 신이 났다. 금화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요란히 들려오는 듯했다. 황후궁에서 문전박대를 당해 속이 상했는데, 오히려 상아궁에서 그보다 더 많은 물건을 팔게 생겼다.
“궁주님. 정말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역시 황궁의 꽃은 궁주님이십니다.”
“그런 말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말게! 말했지만 내가 아주 난감하고 곤란하다니까.”
“아, 예, 물론입니다, 궁주님.”
디안은 자신을 일국의 왕처럼 극진히 떠받드는 상인들 틈에서 취한 기분으로 물건을 골랐다. 쌓이는 보석은 그녀의 지위요, 쓰는 돈은 그녀의 권력 같았다. 애초에 황제가 쓰라고 허락한 돈은 황후궁 추경예산이었던 금괴 하나와 은괴 하나였으나, 상인이 부른 최종 결정 금액은 그것의 2배가 훌쩍 넘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무슨 걱정이랴? 상아궁 예산이 있는데. 본디 구휼에 쓰라고 책정된 금액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었다. 세부 목록이 없으니 기입할 필요도 없었기에 디안은 마음 놓고 그 돈을 또 꺼내 썼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