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황후의 반격2021.07.17.
“뭐?!”
카를이 문서를 거칠게 내동댕이치며 추궁하듯 묻자 시종은 빠르게 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디안 푸아티에에 대한 상아궁 거주 허가를 철회하셨습니다.”
그 말에 중신들 모두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시종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레녹스가 분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허가하신 일인데!!”
시종은 놀란 듯 레녹스를 응시했다가 다시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궁법상 황궁 내 거주 허가에 대한 결재권은 황후 폐하께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황제 폐하를 모시며 황궁의 대소사를 주관한 공을 인정하여, 특별히 디안 푸아티에 백작 영애의 상아궁 거주를 허가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럼 달라진 것이 없는 것 아닌가? 모두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시종이 이어 말했다.
“단, 지엄한 궁법에 반하여 황족이 아닌 자, 뚜렷한 직위가 없는 자의 거주를 사사로이 처리할 수 없는 바. 거주를 원한다면 디안 푸아티에 백작 영애의 신분을 ‘객’으로 인정, 상아궁 특정 방에 대한 거주를 허하며 이에 대한 비용을 푸아티에 백작가에서 지불하라 하셨습니다.”
즉, ‘머물고 싶으면 머물게 해 줄 테니 쓴 만큼 돈을 내라.’ 이 뜻이었다. 황후는 고용인들의 인건비, 방에 대한 관리비, 사용하는 비품비를 철저하게 계산하여 일 단위로 금액을 책정해 놓기까지 했다. 그 금액이 천문학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명실공히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상아궁 이용 대금이 아닌가? 아델라이드가 날린 묵직한 한 방이 카를 울리히와 디안 푸아티에의 목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화가 난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중신회의장을 거칠게 박차고 나가 버렸다. 애꿎은 시종을 붙잡고 역정을 버럭버럭 내던 레녹스 역시 황제의 뒤를 따라 나갔다. 하지만 중신들 대부분은 흥미로운 얼굴로 서로 속닥이기 바빴다.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남의 집 싸움 구경 아닌가? 그들 입장에선 디안 푸아티에가 상아궁 거주 자격을 박탈당하든 말든,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심지어 황후의 명령은 원칙적으로 몹시도 합당했다.
“사실 이게 맞는 것이지.”
“그렇지요. 황후 폐하께서 배포가 크시군요. 원한다면 거주를 허가해 주겠다니. 돈을 내라고 하기는 하셨습니다만.”
“사실 돈을 내는 것이 맞지요. 무슨 자격으로 일개 영애가 황궁의 궁 하나를 차지하고 있답니까?”
소란한 와중에 테세우스가 리오넬에게 몸을 기울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었어?”
리오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디안 푸아티에의 퇴거를 명하는 대신 객으로 취급해 돈을 받아 내자는 것은 사실 그의 제안이었다. 몇몇 중신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회의장을 나선 뒤, 리오넬은 테세우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형님.”
“……사고 쳤나?”
“그럴 리가요.”
어린 시절, 혼날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던 테세우스와 달리 리오넬은 종종 또래 여느 아이들처럼 사고를 치곤 했었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리오넬은 뒷수습은 대부분 본인이 했다는 점이다. 즉, 뒷수습이 가능한 정도로만 사고를 쳤다는 의미인데, 공작부인은 ‘이 약은 놈의 자식이! 수습할 것까지 예상했으면 애초에 사고를 치지 말았어야지!’라고 소리치며 아들을 꾸짖곤 했었다.
“수습 가능한 정도인 거지?”
그 물음에 리오넬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었다. 마치 ‘날 모르느냐?’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테세우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네 말대로 우리가 잃을 것이 무엇이 더 있겠어. 다만 감히 내 앞에서 너를 조롱하는 놈들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뿐.”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라.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니.”
“일일이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형님. 반응하지 않으면 곧 사라질 것이고, 전 그따위 말은 조금도 상관없으니까요.”
“그래. 할 말이 뭐야?”
리오넬은 계속 걸으며 황후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테세우스가 불현듯 멈춰 섰다. 형제는 빛이 들이치는 회랑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괜찮겠습니까?”
* * * 한편 그 무렵. 황후궁의 문이 쾅 하고 거칠게 열렸다. 감히 누가 에흐몬트 제국 황후궁 정문을 이렇듯 무도하게 열 수 있단 말인가?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놀라 달려 나왔다가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는 돌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성큼성큼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때, 2층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막 계단을 오르려던 카를은 그대로 멈춰 섰다. 두 사람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로브 아래로 궁정용 구두가 아니라 활동성 있는 부츠가 보였다. 시녀들은 서둘러 몸을 피하기 바빴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 차림으로 어딜 가시오, 황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를이었다. 목소리는 늘 그랬듯 날이 서 있었다. 아델은 그를 향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해 던지는 시선은 칼날 같고, 두 사람 모두 목 뒷덜미에 힘이 들어가 뻣뻣했다. 아델은 카를이 서 있는 계단보다 두어 칸 위에서 멈춰 섰다. 딱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는 위치였다.
“무슨 일이세요?”
그렇게 묻는 저 예쁜 입술을 사정없이 짓이겨 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철회하시오.”
카를이 대뜸 내뱉은 말에 아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바로 응수했다.
“먼저 철회하시지요.”
“…….”
“그리고 철회하라니요? 제 명령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당장 내쫓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면 거주하게 해 주되 합당한 금액을 지불하라는데, 이보다 더 적법한 방안이 있습니까?”
“더 말하지 않겠소. 철회하시오, 지금 당장.”
“폐하께서 먼저 바로 잡으시지요. 준마 한 마리 값. 오늘 상아궁에서 보낸 상인들이 왔더군요. 추경이 무산된 딱 그 금액만큼 보석이나 옷을 사라고요.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놀리는 것도 정도 것이지.’
그 말에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칼을 꺼낸 자에겐 칼로 맞서라. 에흐몬트 속담이라던데, 아십니까?”
아델은 예법대로 정중히 인사를 건넨 뒤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러려 했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운 카를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지금 어딜 가는 거냐 묻지 않았소?”
아델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암행을 갑니다.”
“암행?”
“궁법 제14조 2항. 황후는 황제의 허가 없이 황궁 밖을 나가 암행을 할 수 있으며 장소, 목적을 함구할 권리가 있다.”
“그 빌어먹을 궁법을 탈탈 털어 외웠나 보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하다못해 준마 한 마리 값의 예산도 책정받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이제 놓으시지요.”
아델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황제의 손을 떨쳐 낸 뒤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에흐몬트의 보통 평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어 나가는 겁니다. 본다고 다 알겠냐만, 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한 사나흘 정도 걸릴 겁니다.”
그것은 통보였다. 황후에겐 그럴 권리가 있고, 그래서 카를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 아델을 어떤 방법으로도 강제할 수가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춤추듯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따라 카를의 어딘가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강제하고 싶었다. 저 여자의 목에 목줄을 걸어 그 손잡이를 움켜쥐고 싶었다. 감히 허락도 없이 어디를 가느냐고, 무엇으로든 협박을 하고 싶었다. 아쉬워할 것을 무기로 잡아 강제하고 협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대로 걸어간다면 어떻게 하겠어.’라고 말이다.
“…….”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황후에게 허락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자기 이름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황후는 잃을 것도 없었다. * * * 발드르 공가의 마부는 공가 식구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유서 깊은 개국 공신 가문을 위해 몇 대에 걸쳐 일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겐 대단히 큰 영광이자 자랑거리였다. 비록 그가 마차를 모는 마부일지언정 그랬다. 어쩌면 그것은 공가의 누구든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대우해 준 역대 공가의 주인들 덕분인지 모른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는 멋들어진 제복을 빳빳하게 다려입고 근엄한 얼굴로 마차를 몰고 황궁으로 들어와, 시시콜콜하게 웃고 떠드는 다른 가문 마부들과는 말도 섞지 않은 채 공가의 마차를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등을 톡톡 두드릴 때만 해도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그 사람, 아니 그분께 자초지종에 대해 들으며 마부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분은 마차에 먼저 탑승하기를 원했고, 마부는 손을 떨지 않도록 조심하며 직접 문을 열었다.
“역시 유서 깊은 명문가 사람답군. 내, 자네의 마차를 타게 되어 영광이네.”
서늘한 바람을 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자 마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곧이어 탁, 하고 문이 닫히고 마부는 떨리는 가슴을 끌어안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마부가 기다리던 공가의 주인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마부는 한달음에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평소와 달리 상기된 표정으로 달려온 마부를 확인한 테세우스가 선수를 쳤다.
“귀빈께서 마차에 계시느냐?”
“아, 예. 그렇습니다.”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큼 걸음을 걸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여상히 행동하게.”
키가 큰 형제가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주의를 주자 마부는 얼른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숨을 골랐다.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리오넬은 형보다 앞서 마차 계단에 한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문을 두드린 뒤 여상한 태도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로브로 온몸을 감싼 채 앉아 있던 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