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왜 나는 황후가 되면 안 돼요?2021.07.24.
“!!”
“못 보던 사이에 눈가에도 입가에도 주름이 생겼어. 아마 더 많아질 테지. 피부가 얇아 주름지기 쉬운 얼굴이라.”
긱스 부인은 디안에게 몸을 기울여 얼어붙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네가 무엇을 무기 삼아 폐하의 곁을 꿰차려 하는지 안다. 그래, 너는 확실히 닮았다. 그분을 떠올리게 하지.”
“뱀 같은 혓바닥을 그만 놀려. 닥치라고.”
디안이 질겁하며 긱스 부인에게서 떨어지려 했으나, 노부인은 호락호락하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베아트리체 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아니?”
“…….”
“스물아홉.”
“…….”
“워낙 동안이라 주름 하나 없으셨지. 황제 폐하께 그분은 스물아홉, 그 꽃다운 나이에 멈춰 있는 존재일 뿐 영원히 늙지 않는다. 하지만 너의 스물아홉, 너의 서른, 너의 마흔. 너에게는 시간이 흐를 거야. 베아트리체 님과 달리.”
긱스 부인은 그제야 디안을 풀어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시린 설원 같은 얼굴로 디안의 눈가를 유심히 살피다가 충고하듯 덧붙였다.
“황후 폐하께 상인을 보낼 돈으로 피부 관리사를 부르시지요. 주름이 늘어서야 되겠습니까?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스물아홉보다 어린 여성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딱 너 같은 마음으로 황제의 옆을 차지하려는 치들은 또한 얼마나 많겠느냐? 죽은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알량한 총애를 가지려 발버둥 치는 너의 어리석음을 나는 마음껏 비웃어 주겠다. 긱스 부인은 잔인한 말로 디안 푸아티에의 가슴을 난도질해 놓은 뒤 유유자적하게 상아궁을 빠져나갔다. 긱스 부인이 떠난 뒤에도 디안은 집무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하늘색 벨벳 벽지, 금으로 된 몰딩, 명화가 그려진 천장과 번쩍이는 거대한 샹들리에, 곳곳에 장식된 명품 오브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내 거야.”
‘내가 얻어 내고 이룩한 곳이야.’
그녀가 이 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가꿔 왔는가? 이 궁 곳곳에 디안 푸아티에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
“감히 나를 이 궁에서 내보내려 해?”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해서 화가 났다. 황후란 이름 하나 가진 주제로, 감히 나를 상아궁에서 내쫓으려 해?! 감히!? 그 여자가 가진 것이 뭐야? 그 이름 외에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그런 주제에 지금껏 폐하의 곁을 지키며 황궁을 관리한 나를 한순간에 이렇게 만들 수는 없어. ……황후란 그 이름 하나로.
“도대체 그 이름이 뭐기에.”
‘폐하. 저는 폐하의 유일한 부인이 되고 싶어요.’
무수한 망설임 끝에 간신히 속삭였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황제에게 있어 망설임의 대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청을 듣자마자 그는 답했다.
‘아니. 너는 안 된다.’
“왜, 나는 안 되었던 건데요.”
차마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레녹스에겐 마치 다 안다는 듯 떠들어 댔지만, 어디까지나 디안 본인의 생각일 뿐이었다. 황제는 반문하고 이유를 캐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 나는 아니었어요? 그까짓 황후를. 이름뿐인 황후 자리를 왜 나는…….”
사무쳤다. 레녹스와 추운 길거리를 전전하던 그때보다 더 사무쳤다. 혹독한 겨울을 빈손으로 나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추웠다.
“나는 그 이름이 중요했는데.”
디안은 제 마음속을 휘젓던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그 말을 꺼내고 나니 눈물이 치솟았다. 디안은 주저앉아 울며 몇 번이나 되뇌듯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이 중요했다고. 당신의 적법한 부인이 되고 싶었고, 이 나라의 지존이 되고 싶었다고. 그런데 나는 왜 안 되었던 것이냐고. 제 속을 긁어 내는 물음을 끝없이 던지며 하염없이 울던 디안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화장대를 열어 거울을 꺼낸 뒤, 서둘러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긱스 부인의 말처럼 확실히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늘었다.
“울면 더 주름질 거야.”
디안은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눈물 자국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로레인을 불렀다.
“지금 당장 피부 관리사를 불러! 어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스물아홉보다 어린 여성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긱스 부인이 남긴 마지막 말이 마치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아니, 분명 저주였다. * * * 한편, 그 무렵 발드르 공가. 황후의 방문은 비밀에 부쳐졌다. 심지어 그녀는 시녀도 필요 없다 못을 박았다. 안주인 없는 집에 갑작스레 맞이한 여성 손님이라 의복의 부재가 큰 문제였는데, 그것도 곧 해결되었다. 긱스 부인은 정말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 방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델의 짐가방을 은밀하게 공가로 배달해 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아델은 그녀에게 공가로 간다는 것을 미처 알리지도 못했는데도.
“더 필요하신 것은 없겠습니까?”
“지금 충분해.”
한쪽엔 필요한 책, 한쪽엔 커피를 놓고 아주 만족스럽게 웃는 그녀는 정말 충분해 보였다. 제때 끼니만 서고로 가져다준다면 한 사나흘 이렇게 있다가 누구도 모르게 알아서 잘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황후를 서고로 안내한 뒤 리오넬은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가 “황후께선 충분하시답니다.”라고 전하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식사는 서고에서 가볍게 하면서 몇 가지 여쭤보도록 하는 게 좋겠군.”
“궁금한 내용에 대해 성심성의껏 답해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황후께서 탑 대항 본부 창설자이자 총책임자였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탑에 대항하는 방법을 에흐몬트에선 알아낼 수가 없으니 타국에서라도 얻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돈과 사람을 잃었다. 그런데 그저 숙련자 정도라도 충분히 가치 있겠다 싶었던 황후가 고트로프 탑 대항 본부의 핵심인물이었다니!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의문이 하나 더해졌다. 그런 분이 도대체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까? 황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테세우스는 동생에게 묻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리오넬.”
“네, 형님.”
“황후께서 왜 굳이 너에게 하대를 하시는 것이냐?”
형의 물음에 리오넬은 난감하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달라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 하셨죠.”
충분한 답이었다. 퍽 자연스럽던 두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면 적은 노력에 비해 큰 결과였다. 테세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관 역을 아주 훌륭히 수행하고 있군.”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등짝이 남아나지 않겠다 하시더니, 황후께서 고트로프 탑 대항 본부 창설자이셨다는 말에 마음이 바뀌셨나 보군요.”
리오넬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테세우스는 과장되게 눈썹을 까딱였다.
“이왕 하는 것 잘하면 좋지. 그런 뜻이다.”
“그렇다고?”
“그럼.”
능청스러운 형의 모습에 리오넬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소리 내어 웃어 버렸고, 테세우스도 마주 웃었다.
* * * 디안이 피부 관리사를 불러 놓고 자신의 얼굴을 집착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궁주님, 폐하께서 오셨어요!”
다급한 로레인의 말에 디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서둘러 입술을 문질러 화장을 지웠다. 귀걸이와 장신구를 빠르게 빼서 서랍으로 밀어 넣고, 옷에 달린 보석 브로치도 서둘러 풀어 던져 놓았다. 까마득한 지옥을 헤매고 있던 마음이 황제가 왔다는 말 한마디에 천국의 문 앞까지 날아갔다. 수척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 끝에서 황제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폐하.”
디안은 가냘픈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고개를 조아렸다. 곧 부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걷던 카를의 걸음이 느려졌다. 딱딱하게 굳었던 황제의 미간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폐하.”
얼굴이 수척했다. 그녀는 더 마르고 있었다. 가냘픈 허리는 한 손으로도 감아 안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저 가느다란 목덜미가 머리카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죽어 가는 모습 같았다. 가슴 속 검은 바다가 또다시 요동쳤다. 그 출렁임에 잠겨 익사할 것 같아서 카를은 두 눈을 세게 눌러 감고 숨을 참았다. 그는 더 이상 디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그가 멈춰 서자 디안이 직접 그에게 다가갔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확인하자, 새카만 지옥을 걷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발이 낫는 것 같았다. 일종의 희열마저 느껴졌다. 그래. 화가 나셨어. 나의 처우에 동정을 느끼고 계신 거야. 내가 얼마나 불쌍하겠어. 황후가 괘씸하신 거야. 그래. 그는 나를 사랑해. 디안은 조심스럽게 카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손을 얹었다.
“폐하.”
검은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던 카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삐걱이듯 시선을 내리자 그의 품을 파고든 부드러운 금발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
“저는 괜찮아요, 폐하.”
그 말을 곱씹으며 침묵하던 카를이 잠시 후 디안의 어깨를 천천히 뒤로 밀었다. 뒤로 밀려난 채 혼이 나간 듯 멍하니 눈을 크게 뜬 그녀에게 황제는 이렇게 물었다.
“오늘 황후궁에 상인을 보냈나?”
“……네?”
“오늘 황후궁에 상인을 보냈냐 물었다. 준마 한 마리 값을 운운했다지?”
“……폐하?”
등골을 타고 몸서리치게 차가운 한기가 흘러갔다. 솜털이 삐죽하게 서고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황제의 표정은 더없이 냉담했다. 그는 디안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디안을 추궁하고 있었다. 왜 황후궁에 상인을 보냈느냐고. 디안은 다급히 황제의 손을 붙잡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안되셨잖아요. 국경일이 곧이에요, 폐하. 결혼 연회 때 황후 폐하께서 입고 계셨던 드레스 기억하세요? 그거 결혼식 드레스였어요. 얼마 되지 않는 예산도 무산시키셨잖아요. 그럼 도대체 황후께서는 무슨 돈으로 장신구를 사고 드레스를 사요.”
“…….”
“제가 어리석었어요. 하지만 그것 이외에 좋은 방법이 없었어요. 제가 돈으로 드렸다면 그건 더 기분 나쁘셨을 거예요. 준마 한 마리 값을 운운하다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그래요. 저는 폐하께서 제게 쓰라고 하셨던 그 금액만큼을 상인들에게 일러줬을 뿐이에요. 내가 그 예산 안에서 돈을 줄 테니 숙지하라고 그랬을 뿐이에요. 폐하께서 제게 주셨던 돈인데, 죄송해요.”
디안은 하염없이 울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카를은 디안에게 잡혔던 손을 천천히 뺀 뒤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길게 눕기 시작하는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디안을 덮쳤다. 지옥 문지기의 혓바닥처럼 벌겋게 타는 노을이 집어삼킬 듯 혀를 날름거리며 천국의 문 앞까지 날아갔던 디안의 뺨을 쓸어올렸다.
‘무엇이 지옥인가? 천국의 문 앞까지 날아갔던 적은 있었던가?’
지옥의 문지기가 디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후를 자극해서 너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
“…….”
“너는 내 사랑만 있으면 된다 했지.”
그 말에 디안은 한 박자 늦게, 간신히 답했다.
“……네, 폐하.”
“그 말을 기억해라. 그 말을 기억하는 한, 나는 너를 지켜 줄 것이다.”
황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디안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녀를 나락으로 밀어 넣는 명령을 내렸다.
“상아궁을 비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