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술, 어디 있는지 알아?2021.07.27.
“……예?”
“내 궁에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그곳으로 옮겨. 황제궁은 황후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이니.”
황후와 개처럼 뒹굴며 싸우자면 싸울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만약 지금 이 문제로 황후와 전면전을 펼친다면 발드르 공가가 끼어들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내키지 않으면 푸아티에 백작가로 돌아가도 좋다.”
“아뇨! 아니에요, 폐하.”
디안은 다급하게 카를의 팔을 와락 움켜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버리지 말아요, 저를. 제발 버리지 마세요, 폐하.”
그 말에 카를은 가까스로 큰 덩어리를 삼키는 심정이 되어 디안의 팔을 떨쳐냈다.
“그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충격으로 흐트러진 얼굴, 곧 죽을 것 같은 얼굴.
“너는…… 점점 내 생모를 닮아 가는구나…….”
카를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복도 끝에 다다랐을 무렵, 막 계단을 올라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황궁 고용인들의 복장이 아닌 데다가 명찰을 목에 걸고 있는 모양새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었다. 황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궁주님께서 부른 피부 관리사입니다.”
“…….”
황제는 잠시 미간을 굳히고 있다가 곧 상아궁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 * * 잠시 후, 형제는 서고로 향했다. 황후의 방문을 고지받은 집사가 음식 수레를 끌고 직접 형제의 뒤를 따랐다. 한창 책에 집중하고 있던 아델은 세 사람의 방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맙소. 서고가 아주 훌륭하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빛의 속도로 음식을 차려 낸 집사가 조용히 물러갔다.
“식당에서의 만찬이 아닌 데다가 방문을 비밀로 하라 하셔서 음식이 약소합니다.”
“충분히 근사하오. 고맙소. 자, 그럼 먹읍시다.”
오늘 종일 먹은 것이 많지 않은 탓에 아델은 제 몫의 음식을 싹싹 긁어 먹었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리오넬의 물음에 아델은 씹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아주.”
이내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푹신한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공가의 서고는 대단히 넓고 곳곳에 앉을 만한 곳이 꽤 많았다.
“자, 내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시오.”
황후는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과연 한 국가의 지존에 가까웠던 자로서 굳이 미사여구를 붙여 가며 대화를 부드럽게 만들 필요가 없었던 사람답달까.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고압적이지 않다는 점이 놀라웠다. 결혼식 때도 느꼈지만, 황후는 아주 가벼운 말과 행동으로도 좌중을 휘어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테세우스가 황후를 관찰하는 사이, 리오넬이 먼저 질문을 시작했다.
“탑 파괴와 관련하여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오넬은 기다렸다는 듯 묻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지금껏 이 궁금증을 참고 있었다.
“그날 ‘5급에 가까운 4급이니 기다릴 것이 없겠다.’라고 하셨습니다. 4급 이하의 탑은 홀로 파괴할 수 있으십니까?”
그 질문에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5급 이하의 탑은 나 혼자 가능해. 4급의 경우, 중하위급 탑은 파괴할 수 있지만, 상위 탑은 혼자선 무리. 하지만 웬만하면 혼자 파괴하는 짓은 안 하지.”
“탑이 땅에 닿기 전에 파괴하셨는데, 고트로프에선 주로 그런 방식으로 탑을 파괴합니까?”
“한 오 년 전쯤 그 방법을 우연히 찾아냈지. 그때 이후로 탑 파괴 1원칙은 땅에 닿기 전에 파괴하는 거야.”
탑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핵을 부숴야 한다. 핵은 보통 탑의 중상층부에 있으므로, 효율적으로 핵을 부수기 위해서는 상승기류를 타고 오르는 편이 좋았다.
“문제는 나처럼 상승기류를 탈 수 있는 마법사가 드물다는 점이지. 그래서 통계상 한 해의 절반 정도는 땅에 닿기 전에 파괴하고,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땅에 닿은 상태에서 파괴했어.”
“피해 정도는 비교가 불가하겠군요.”
“그날 봐서 알잖아? 땅에 닿기 전 파괴할 때는 스트라이커가 추락하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인명피해가 없어.”
그때 듣고 있던 테세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땅에 닿은 탑을 그대로 두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리’라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그 질문에 아델은 얼굴을 굳히며 엄격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아주 단호한 어조로 확언했다.
“절대 안 되오.”
“절대 안 된다?”
“절대.”
“고트로프에서는 땅에 닿은 탑에 대해 어떻게 대응합니까?”
“땅에 닿은 탑은 발생 이틀 안에 무조건 파괴하는 것이 원칙이오. 인근에 있는 마법사들은 탑을 파괴할 의무가 있고, 관할 마법사들만으로 부족할 경우, 다음 단위의 마법사들이 반드시 달려가야 하지.”
황후를 가만히 응시하던 테세우스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란 원통을 들고 왔다. 아델은 그것이 지도임을 직감했다. 예상대로 그것은 영지 단위가 세세하게 표시된 에흐몬트 지도였다. 테세우스는 너른 테이블에 그것을 쫙 펼쳤다. 아델이 이를 내려다보는 사이, 리오넬이 지도 위 곳곳에 붉은 돌을 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돌이 지도 위에 올라갔다. 한 움큼 쥔 붉은 돌을 다 쓰고도 그는 다시 한 움큼의 붉은 돌을 더 쥐었다. 지켜보고 있던 아델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이윽고 리오넬이 지도에서 손을 뗐을 때, 황후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투명한 붉은 돌에 불빛이 어룽져 그늘지자 마치 지도가 온통 피로 물든 것 같았다.
“……이게 다 탑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현 시각, 에흐몬트에서 ‘관리’되고 있는 탑입니다.”
“뭐? 관리?”
황후는 천천히 붉은 돌이 놓인 곳들을 눈으로 훑었다. 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주변이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늘을 올려다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부모 잃은 아이들은 거리를 전전하며 유린당하고 있을 것이며, 자식 잃은 부모들은 넋을 놓았을 것이다.
“……이 붉은 돌이 전부 탑이라면.”
‘드넓은 평야가 아름다운 곳이라더구나. 사시사철 온화하고 일부 지역은 삼모작도 가능한 풍요로운 땅이라지.’
어머니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붉은 돌이 전부 탑이라면…….”
아델이 시선을 들어 테세우스와 리오넬을 번갈아 응시했다.
“에흐몬트는 지금 지옥 그 자체라는 뜻이오.”
외세의 침입을 막아 주는 거대한 산맥과 깊고 거친 바다를 신의 축복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흐몬트는 분명 외세의 침입까지 감당해야만 했으리라. 황후의 선언에 테세우스와 리오넬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에흐몬트는 지금 지옥이다. 탑의 영향권을 벗어난 몇 군데의 영지만 제외하고. 테세우스는 어깨를 반듯하게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금의 사태를 망설임 없이 ‘지옥’이라 표현하는 황후가 반가웠다. 지옥을 지옥이라 부르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형제는 너무나 괴로웠다.
“맞습니다. 작금, 제국은 지옥 그 자체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 * 황후와 발드르 형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당장은 서로 이외의 더 믿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 점이 지금만큼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는 장치가 되었고, 세 사람 모두 진지한 태도로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다 보니 어느새 달이 기우는 시각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집사가 소리 없이 들어와 아델에게 인사를 건넸다. 테세우스는 아델에게 그를 소개했다.
“공저의 집사입니다. 그가 쉬실 방으로 모실 겁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집사는 정중히 오른손을 앞으로 쭉 펴며 아델을 안내했고, 아델은 발드르 형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집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공저 사용인들의 동선을 모두 재배치해 두었습니다. 한데 정말 시중인이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했군. 고맙네.”
“영광입니다.”
아델은 그를 따라 걸으며 복도를 둘러보았다. 내부도 외부 못지않게 근사했다. 이윽고 웅장한 문 앞에서 멈춰 선 집사가 공손하게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혹 부르실 일이 있으시면 침대 옆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곧바로 오겠습니다.”
“고생 많았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아델은 천천히 방을 눈으로 훑으며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묵직하면서도 화려한 방이었다. 아델은 침대를 손으로 툭툭 눌러 본 뒤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였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을 묻자 나른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하아…… 여긴 도대체 언제쯤 집처럼 느껴지게 될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고트로프를 떠난 날부터 줄곧 길고 지루한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묘한 긴장감과 피로가 가시지를 않았다.
“하긴. 고트로프에서도 매일 옮겨 다니며 이곳저곳에서 잠을 잤는데 무슨 집 타령이야.”
아델은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그래도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속이 좀 편한 날이었다. 최소한 적성에 맞는 대화다운 대화를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쭉 켜며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담긴 뜨끈뜨끈한 물에서 수증기가 폴폴 솟는 것을 발견한 아델의 얼굴이 흐들흐들하게 풀어졌다. 아델은 위험하게도 종종 뜨끈한 탕 속에서 잠이 들곤 해서 유모가 늘 걱정스레 잔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위험해도 어쩌랴. 누군 잠들고 싶어서 잠드는 줄 아나. 그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든 아델의 몸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수면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봤다면 기겁하며 그녀를 깨웠을 것이다. 결국,
“푸욱! 콜록콜록!”
아델은 물을 잔뜩 먹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숨넘어갈 듯 거센 기침을 해 대다가 축 늘어져서 욕실 밖으로 나왔다. 아델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가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은 이미 물속에서 식어 버렸고, 물을 잔뜩 먹어 거센 기침을 한 탓에 잠이 홀딱 달아나 버렸다. 머리를 꼼꼼하게 말린 뒤 침대로 기어들어 간 그녀는 말똥말똥 눈을 빛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한참을 뒤척이던 아델은 결국 침대에 누운 지 1시간 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이럴 땐 술 한잔 딱 마시면 그대로 잘 수 있는데. 아 나, 진짜. 이 시간에 술 가져오라고 남의 집 집사를 부를 수도 없고.”
* * * 한편, 공저엔 잠 못 드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었다. 리오넬은 긴 숨을 내쉬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분명 노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시간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는 결국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책이라도 읽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책장에서 읽다가 만 책 한 권을 골라 들고 침대로 향하던 그는 문득 테라스 창을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커튼 너머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커튼을 슬쩍 걷어 밖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 방에서 불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방은 귀빈용 객실로, 현재 황후가 사용 중이었다.
“아직도 안 주무시고 뭘 하시는 건지.”
그때, 가녀린 그림자가 투명하게 빛나는 커튼 자락을 물들였다. 리오넬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조심스럽게 테라스 창문을 열었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잠옷 자락 사이를 파고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가녀린 그림자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였다.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서성이고 계신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리오넬은 황후가 머무는 객실을 가만히 살폈다. 가을 찌르레기도 울음을 멈춘 밤이었다. 그 순간, 그림자가 삽시간에 덩치를 키우더니 리오넬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철컥, 테라스 창문이 열렸다.
“!!”
열린 창 너머로 짙은 밤이 먼저 나오는가 싶었다. 짙은 밤을 가르고, 창백한 달빛을 닮은 하얀 얼굴과 어둠 속에서도 신묘하게 빛을 발하는 금빛 눈동자가 마법처럼 나타났다. 주변을 훑던 그 신묘한 빛이 리오넬의 검푸른 눈동자와 맞닿은 순간, 리오넬은 몽롱한 기분에서 화들짝 깨어나 황급히 몸을 돌렸다.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던 그때, 아주 작은 목소리가 리오넬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리오넬!”
속삭이며 외치는 소리에 리오넬은 깊게 탄식하며 두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다시 한번 황후의 억눌린 외침이 들려왔다.
“리. 오. 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