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델과 리오넬2021.07.31.
입술을 꾹 깨물며 작게 한숨을 내쉰 리오넬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서둘러 가운을 걸쳐 입은 채 테라스 밖으로 나가니 황후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리오넬은 정중한 자세로 묵례부터 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황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할 말이 있으니 부르신 것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황후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입 모양을 크게 만들어 속삭였다.
“술. 어디. 있는지. 알아?”
“…….”
리오넬이 답할 타이밍을 놓치자, 황후는 몸을 난간에 기댄 채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술! 술. 어디. 있는지. 말해 줘!”
* * *
“이 시간까지 왜 안 자고 있었어?”
똑같이 안 자고 있던 사람이 할 질문인가 싶다. 어둑한 복도를 나란히 걸으며 아델과 리오넬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술을 찾으십니까?”
“잠이 안 와서.”
“술에 의존하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고. 잠 안 오는 날만.”
술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 달라는 아델의 말에 리오넬은 ‘잠시 계십시오.’라고 답한 뒤 그녀가 머무는 방을 찾아갔다. 리오넬은 술을 가져다드리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델은 차라리 술이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가져다준 적 없는 술병이 나뒹굴고 있으면 집사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묘하게 그럴듯한 이유라서 리오넬은 잠시 고민하다가 따라오시라며 앞장섰고, 황후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리오넬은 그녀를 본관 5층에 마련된 가족실로 안내했다. 선대 공작 부부가 살아 있을 땐 자주 이용하던 공간이지만, 두 사람이 타계하고 형제 둘만 덩그러니 남은 현재는 가끔 형제가 함께 술을 마실 때만 사용하고 있었다. 리오넬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가족실 곳곳의 등불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아, 불은 그 정도면 돼. 술만 꺼내 주고 가. 알아서 먹고 잘 정리해 놓은 뒤에 방으로 돌아갈 테니까.”
묵직하고 중후한 느낌의 복도와 달리 가족실 내부는 어둑한 가운데에서도 아늑해 보였다. 아델이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며 감상하는 동안, 리오넬은 진열장에 다가가 황후에게 줄 만한 술을 골랐다.
“어떤 종류의 술을 원하십니까?”
“음…… 그거. 밀주.”
황후는 독하고 쓰기로 유명한 술을 찾았다.
“희석할 얼음이나 물은 없어도 돼. 그냥 줘. 안주도 필요 없어.”
밀주가 든 병을 꺼내던 리오넬이 미간을 찡그리며 황후를 돌아보았다.
“황후 폐하. 그럼 너무 독합니다.”
“괜찮아.”
“속을 버리게 될 겁니다.”
“괜찮다니까, 리오넬. 먹어 봤어.”
“이 술은 희석해서 드시는 겁니다.”
“아, 그것참. 원래 보좌관은 가타부타 말하는 거 아냐. 그냥 가져와.”
“…….”
거듭되는 황후의 채근에 리오넬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술병과 술잔 하나를 들고 왔다.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 두자 주위를 서성이던 아델이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리오넬보다 한발 앞서 능숙하게 뚜껑을 열었다. 술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 황후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리오넬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좋다.”
이 좋은 걸 희석하면 쓰냐고. 딱 술주정뱅이가 할 법한 말이라서 뒷말은 생략했다.
“고마워. 나는 알아서 잘 마시고 정리한 뒤에 돌아갈 테니까 먼저 가도 돼.”
술잔에 술을 따르며 그렇게 말하자 리오넬이 심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롱한 호박색 술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감상하던 아델은 그가 맞은편에 앉자 술잔을 들어 올리며 길게 웃었다.
“옆에 있으려고? 그것도 좋지. 같이 한잔할 텐가?”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혼자 마시지, 뭐. 자, 우리의 성공적인 공조를 위하여.”
황후는 혼자 술잔을 작게 위로 들어 보이더니 그대로 한입에 털어 넣었다. 리오넬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엄청나게 쓰고 독할 텐데. 눈을 질끈 감고 술을 꿀꺽 삼킨 아델은 이윽고 짧게 숨을 뱉어 냈다.
“으아. 좋다.”
불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홧홧한 것도 좋고, 먹자마자 뜨끈하게 취기가 오르는 것도 좋다. 잠시 취기를 즐기던 아델은 다시 눈을 뜨고 빈 술잔에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연거푸 마시려 하십니까?”
“아, 그것참. 술의 여흥을 모르는 자로군.”
황후가 짐짓 눈을 치켜뜨며 면박을 주었음에도 보좌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건배사가 또 남았으니 술을 따를 뿐이야.”
“무슨…….”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려는 보좌관의 입을 황후가 웃음으로 막았다. 독하디독한 술 한잔에 창백하던 뺨엔 삽시간에 혈색이 돌았다. 길게 휘어진 금빛 눈동자가 한 잔 술처럼 불빛을 머금고 찰랑였다.
“자, 내가 이래 봬도 황후니까 말이다. 에흐몬트의 번영을 위하여.”
그 말을 끝으로 황후는 다음 잔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쉬지도 않고, 저 독한 술을! 두 번째 잔도 깔끔하게 비자 리오넬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왔다. 아델은 리오넬이 내미는 물로 입을 축인 뒤 또 술잔에 술을 따라 부었다.
“황후 폐하!”
“뭐든 세 번은 해야지.”
“그럼 조금 있다가 마십시오. 이 술은 보통 독한 술이 아닙니다.”
리오넬이 강하게 만류하자 아델은 잠시 고민하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손에서 놓았다. 나른한 취기가 몰려들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아델은 웃는 얼굴로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액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리오넬. 저 그림. 공가 직계 초상인가?”
리오넬은 아델이 가리키는 커다란 그림 액자를 응시하다가 다시 아델을 바라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그대가 몇 살 때 그림인가? 저 귀엽고 작은 애가 그대 맞지? 그림에서 장난기가 가득 보이는데?”
그림 속에는 씩 웃고 있는 남자아이가 공작부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열 살 전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황후는 만개한 꽃처럼 웃으며 그림을 바라보았다.
“화목해 보이네. 과연, 공작부인께서 대단한 미인이셨군. 아들들이 하나같이 잘생긴 이유가 있었어!”
취기 오른 칭찬이 연달아 쏟아지자 리오넬은 입을 꾹 말아 물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델은 피식피식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리오넬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것을 꿀꺽 삼켜 버렸다.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리오넬에게 빈 술잔을 내밀어 보이며 황후는 기분 좋은 어조로 말했다.
“이 잔은, ‘그대 발드르 공가의 영광을 위하여’였다.”
리오넬은 황후에게서 빈 술잔을 받아 테이블에 올렸다.
“감사합니다.”
“건배사를 하려면 아직 너무 많이 남았는데, 내가 또 시작했다 하면 수를 맞춰 먹어야 하거든. 일곱 잔, 아홉 잔, 열한 잔, 이렇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내 어머니 영향이지. 미신 신봉자시거든.”
“미신 말입니까?”
“응.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은연중에 나도 그러고 있더라니까. 숫자 맞추고, 잘 때는 방향 맞추고. 괜히 찝찝해서.”
아델은 거기까지 말을 한 뒤 다시 커다란 액자를 바라보았다. 원래 저런 그림은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에 실제로 화목하지 않은 가족도 그림에서만큼은 화목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녀의 가족도 세상 둘도 없이 화목한 모습으로 고트로프 황궁 중앙 벽면 액자 속에서 웃고 있을 것이다. 불만은 없다. 사이가 좋지 않다고 그림마저 인상 써 가며 그릴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리오넬은 황후가 그림에 한참 시선을 두자 의아한 마음에 그녀를 따라 새삼 액자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감상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는 찰나, 마침 그를 보고 있던 황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달도 기운 어둑한 밤. 밤처럼 쏟아진 검은 머리 타래는 가닥가닥 흩어졌고, 취기 오른 얼굴엔 옅은 홍조가 떠올라 묘한 생기가 돌았다. 붉디붉은 입술은 술에 젖어 반짝이고, 길게 휜 눈매에 갇힌 금빛 눈동자는 취기에 냉혹함이 사라진 듯 보였다. 독한 밀주의 냄새에 마시지도 않은 술의 취기가 오르는가? 목덜미에서부터 퍼지는 열에 리오넬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리오넬.”
그때, 황후가 또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고 리오넬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들었다. 아델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를 마주 보다가 손가락으로 술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지금 해. 황후에게 감히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질문이라도 하나 정도는 받아 주지. 이 술값으로.”
요요한 금빛 눈동자가 리오넬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물어 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고트로프 탑 대항 본부의 수장이셨던 폐하께서 왜 굳이 에흐몬트와의 국혼에 응하셨던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확실히 무례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 술값을 제대로 받네?”
“답하기 곤란하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상관없어. 여기가 고트로프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고트로프 황궁에도 저 그림처럼 내 가족의 그림이 걸려 있지. 세상 그렇게 화목해 보일 수가 없어.”
아델은 그림을 보며 루시오를 떠올렸다.
‘루시오. 지금쯤 내 편지를 받았을까?’
도저히 얼굴을 마주하고 줄 자신이 없어서 비겁한 방법으로 건네고 왔다.
“내 아버지는 지병이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지. 고트로프가 혼란한 틈에 내 어머니께선 느닷없이 청혼장을 보여 주시며 에흐몬트로 가라 하시더군. 탑 대항 기구도 거절의 명분이 되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사실, 거절할 수도 없었지.”
“어째서 말입니까?”
“이것은 내 사죄거든.”
리오넬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저히 되물을 수 없었다. 아델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 차 보였기 때문이다. 아델은 더 묻지 않고 침묵하는 리오넬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 술은 딱 석 잔 얻어 마셨으니 술값은 여기까지. 이제 돌아가자, 리오넬.”
리오넬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병과 술잔은 두십시오. 제가 내일 사람을 시켜 치우겠습니다.”
“고마워.”
깊은 밤, 이번엔 아델이 먼저 앞장을 섰다. 한 번 와 본 길이었기에 길눈이 밝은 그녀는 헤매지 않고 방향을 잡았고, 리오넬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닮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리오넬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황후의 체구가 생각보다 참 작다는 것을. * * * 그 무렵, 카를 울리히도 자신의 침실에 우두커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술을 꺼냈는지, 술을 마셔 해소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늘 공허했다.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에선 참 희한한 것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주로 과거의 잔상들이었다. 그것들이 튀어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깊고 검은 바다가 출렁였고, 카를은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숙부 데스포네 공작의 손을 잡고 황위에 오르던 날, 그는 황좌 옆에 서서 이렇게 속삭였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되셨습니다. 제가 세상을 가져다드리지요. 마음껏 가지십시오.’
그때 카를 울리히는 10살이었다. 그날은 막연히 두렵고 차가워서 어서 빨리 식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또 과거가 떠오른다. 다른 이에게는 희미하다는 유년 시절의 기억은 왜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헤매고 헤매다 카를 울리히는 현재로 돌아왔다.
“어디로 간 거야.”
맹수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황후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오라는 명령에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제국의 황후가 사라졌는데 행방을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노성에 시종들은 벌벌 떨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후궁에 배정된 예산과 인력이 전무하므로 현재 황후 폐하를 보필하는 호위기사 및 개인 시녀가 없습니다. 한나 긱스 백작 부인께서도 모르겠다 하시고, 황후궁의 시녀들도 황후께서 궁을 나가실 무렵 모두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던지라…….’
황후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이유가 인력 부족 때문이라니! 황당한 말에 화가 있는 대로 뻗쳤으나, 실상 그 모든 명령을 내린 것이 그인지라 황제는 짜증을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건대 그녀가 어딜 갔겠는가? 이방인인 그녀가 에흐몬트에서 황궁 이외에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
황후는 분명 발드르 공가에 있을 것이다. 그의 기분이 최악으로 나빠졌다. * * * 밤 중에 황후의 술자리를 마련해 주는 바람에 잠이 더 깨어 버려서 리오넬은 동이 틀 무렵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평상시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그는 침대 주위를 멍하니 서성이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햇살이 스며드는 투명한 창을 바라보았다. 커튼에 부딪힌 햇살이 자잘하게 쪼개져 별 무리처럼 반짝였으나, 리오넬이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가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테라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커튼을 걷고 얼굴을 내밀었다. 햇살 비쳐 푸르게 변한 눈동자가 향한 곳엔 굳게 닫힌 창문, 드리워진 커튼 자락이 있었다. 잠시 숨을 멈추고 그곳을 지켜보던 그는 이내 스스로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숨을 몰아쉬던 리오넬은 어둡게 침잠된 눈을 눌러 감으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