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나와 연인이 되고 싶어?2021.08.07.
황제가 디안에게 내어 준 방은 황제궁 귀빈용 객실로, 그녀가 상아궁을 하사받기 전 사용하던 곳이었다. 이 방을 처음 허락받던 날, 디안은 감격하여 울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상아궁을 하사받던 날에는 천하를 손에 쥔 것만 같았다. 황궁에서의 나날은 감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오늘, 황제궁 귀빈용 객실로 돌아온 디안은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이곳은 한때 그녀에게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주었다. 처음 이 방에서 잠을 자던 날, 침대는 왜 그렇게 큰지 천장은 왜 이리 높은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이곳은 상아궁에 비해 턱없이 좁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디안은 상아궁에서 온갖 진귀한 오브제와 명화들을 가져왔다.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규모에 짐을 옮기던 시종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를 구입하는 데 상아궁에 배정된 예산 중 오 할 이상이 사용되었으리라 장담하는 시종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를 걸고 진열하기엔 황제궁 귀빈용 객실은 턱없이 좁았다. 결국, 가져온 것 중 상당수를 푸아티에 백작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상아궁에서 귀빈용 객실로 처소를 이전한 그날 밤. 디안은 이 방에서 처음 밤을 보냈던 그때처럼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왔음에도 황제는 찾아오지 않았다. 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을 망설이며 서성이다가, 마침내 얇은 슬립 위에 두꺼운 카디건을 걸친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황제의 침실이 있는 복도엔 많은 근위병과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디안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본 시종이 그녀에게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푸아티에 백작 영애. 오셨습니까?”
그의 호명에 디안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시종이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답했다.
“송구하오나, 현재 영애의 황궁 내 신분은 귀빈이십니다.”
궁주란 말 그대로 궁의 주인을 뜻하니, 더 이상 궁주님으로 부를 수 없다는 소리였다. 결국, 디안은 상아궁뿐 아니라 궁주님이라는 호칭마저 빼앗긴 것이다. 누군가 머리 위로 차가운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같이 소름이 등골을 타고 빠르게 퍼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이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지만, 디안은 발가락 끝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리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서 안에 계시느냐?”
“예.”
“뵙고자 한다 전해.”
잠시 후, 방으로 들어갔던 시종이 돌아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시지요.”
* * * 황제는 우두커니 소파에 앉은 채 디안을 맞이했다.
“왔느냐?”
흐트러진 금발, 느슨하게 풀린 침의 자락처럼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디안은 그를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맞은편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카를의 시선이 그녀의 턱에서 코로, 그리고 눈으로 미끄러져 왔다. 처음 그를 본 날. 디안은 그가 혹시 악마는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사람을 홀린다는 전설 속 정령은 아닐까 생각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과, 관능적인 목소리. 그런데 왜 천사가 아니라 악마를 떠올렸을까? 찰나의 의문은 디안의 뇌리에서 금세 사라졌다. 이 아름다운 남자가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가 천사인지 악마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으세요?”
“…….”
“심란하시군요, 폐하.”
그는 답하지 않았다. 자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자, 디안의 마음도 깊게 침잠했다. 황제가 심란한 이유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깊은 밤, 잠 못 드는 그의 마음은 들끓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디안 때문이라면 황제는 그녀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아궁을 빼앗기고, 이름마저 빼앗긴 디안 푸아티에는 지금 그의 안중에 없다. 그녀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눈물이 차올랐다. 푸른 눈이 일렁이다 고일 새도 없이 야트막한 담을 넘는다. 그래도 그는 모른다.
“황후께선, 발드르 공가에 계실 거예요.”
디안의 속삭임에 카를의 움직임이 멈췄다. 역시 그의 가슴을 술렁이게 하던 것이 그것이었나 보다. 디안은 눈물방울을 눈꼬리에 매단 채 고개를 기울였다.
“가실 곳이 그곳 이외에 또 어디 있겠어요? 지금쯤 황후께선 그와 밤을 보내고 있을 거예요.”
주문과도 같은 속삭임에 수려한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앉은 소파로 다가갔다. 그의 옆에 앉아 목덜미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살살 쓸며 속삭였다.
“그래요. 황후는, 그와 밤을 보내고 있을 거예요.”
“그만.”
카를의 기세가 흉흉해졌지만, 이번엔 디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사랑은 온전히 가지는 거야. 나는 당신의 무엇도 그 여자와 나눌 생각이 없어. 아낌없이 탐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여 당신의 터럭 하나도 그 여자에게 내어 주지 않을 거야.’
디안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이며 주문을 외듯 속삭였다.
“폐하, 폐하 곁엔 저뿐이에요. 당신을 이해할 사람도 저뿐이고요.”
‘그러니 감히 나를 두고 그 여자 생각에 온 신경을 쏟으시면 안 되죠. 그래선 안 돼요.’
* * * 한편,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서고에서 나올 줄 모르는 황후가 걱정된 리오넬은 서고 앞에서 서성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두 번이나 이어진 노크에도 답은 없었다. 그는 무례를 무릅쓰고 문을 열었다. 수많은 책 사이에 아델이 있었다. 그녀는 몰두하여 그가 문을 열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높게 쌓인 책 속에 파묻혀 연신 무언가를 읽고 적어 내려가다가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긴 머리카락이 방해되지 않도록 듬성듬성 잡아 올려 묶은 탓에 드러난 목덜미가 달빛에 반사된 눈처럼 투명하게 희었다. 리오넬은 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훔쳐보려고 본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술렁였다. 깊어 가는 밤을 하나씩 헤아리는 사람처럼 서성이고 또 서성이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창문을 향했다. 그렇게 창문을 자꾸만 바라보길 몇 번.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제법 야심한 시각이었다. 리오넬은 결국 방을 나섰다. 느릿하던 걸음은 어느새 빨라져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급하게 달려 서고 앞에 도착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중한 태도로 문을 두드렸다. 한 번 더 두드려도 답이 없자 리오넬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서고를 응시하던 리오넬은 이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황후 폐하?”
안 계셨다. 읽고 있던 장서를 모조리 정리한 듯 황후가 앉았던 자리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서고를 돌아보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귀빈용 객실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 계신가? 형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신가? 아니면…….’
잠시 고민하던 리오넬은 빠르게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계단을 두세 칸씩 성큼성큼 건너뛰어 가며 본관 5층 가족실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온 주제에, 문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고도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리오넬?”
문 너머에서 가을바람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잔을 쥔 아델이 가족실로 들어오는 리오넬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어……. 허락도 안 받고 훔쳐 마시는 중인데…….”
진열장에서 밀주 한 병과 술잔 하나를 슬쩍 꺼내 벌써 두 잔째 술을 마시고 있던 차였다. 아델은 갑작스러운 집주인의 등장에 진땀을 흘렸다. 살짝 인상을 굳힌 채 다가온 리오넬이 대뜸 물었다.
“몇 잔째이신 겁니까?”
“두 잔.”
“한 잔 더 드실 겁니까?”
“그렇지.”
“오늘도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아닌데? 오늘은 그냥 술이 먹고 싶었을 뿐.”
“잠이 오지 않아 드시고, 먹고 싶어 드시고. 그렇게 자꾸 드시면 좋지 않습니다.”
“보좌관은 가타부타 얘기하는 거 아니랬지.”
“고트로프엔 보좌관이란 것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있지 왜 없어? 다만 의미가 좀 다르지.”
아델이 술병에 손을 뻗자 리오넬이 먼저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 주었다. 쪼르르 흐르는 술을 보던 아델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를 타박했다.
“보좌관, 조금 더 따라.”
“희석해서 드시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내 주량을 왜 그대가 판단해? 더 따르도록. 나는 오늘 진탕 마시고 고주망태가 될 예정이니라.”
황후는 폭군 같은 발언을 하며 직접 술잔에 술을 콸콸 따랐다. 그리고 보좌관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얼른 입에 그것을 털어 넣었다.
“크으으.”
목구멍이 홧홧하고 취기가 몰려오자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델은 입고 있던 웃옷을 벗고 목을 조이는 단추를 두 개 풀어냈다. 어느새 다시 풀어진 머리카락을 슬슬 잡아 위로 틀어 올린 뒤, 늘 가지고 다니는 고무줄로 대충 묶자 비로소 좀 시원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른한 흥취를 즐기듯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었다. 리오넬은 홀린 듯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미끄러진 시선이 가늘고 긴 목덜미에 닿자, 왠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리오넬. 오늘도 석 잔 얻어 마셨다. 술값, 받을래?”
아델이 건넨 말에, 리오넬은 퍼뜩 시선을 내렸다. 수려한 얼굴이 굳으며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델은 피식 웃었다.
“인상 그만 써. 그대는 날 보면 가끔 그렇게 인상을 쓰더라.”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들며 항변하려 했다.
“저는…….”
“이해해. 내 보좌관 자리가 명예로운 자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걱정 마.”
“무슨……?”
아델은 눈을 휘어 웃으며 다짐하듯 단단한 어조로 그를 안심시켰다.
“내가 그대의 명예를 꼭 지켜 줄 테니까. 그대가 보좌관을 관두는 날, 내가 직접 발표해 주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 아델라이드 황후와 리오넬 발드르는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식적인 관계였을 뿐, 그 어떤 사적인 접촉도 없었다고 말이야. 뭐…… 그런 것으로 명예가 회복될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니깐 인상 그만 써. 잘생긴 얼굴에도 주름은 생긴다?”
황후의 말을 곱씹듯 잠시 침묵하던 리오넬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하나 가져와서 직접 술을 따랐다.
“어? 그냥 먹으려고? 독해! 희석해서 마시는 거라며?”
느슨하게 앉아 있던 아델이 몸을 일으키며 그를 저지하자 리오넬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제가 그렇게 독하다 말씀드려도 기어코 털어 마셔 놓으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나야 원래 희석해서 마신 역사가 없는 사람이라.”
자랑이십니다. 리오넬은 그 말을 술과 함께 삼켜 버렸다.
“크으, 독한데 그거.”
말리던 아델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정작 본인은 그렇게 연거푸 석 잔을 마셔 놓고도. 리오넬은 고개를 선선히 가로저으며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만류하는 아델에게 “석 잔은 마셔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하고 못을 박으며 연달아 잔을 비웠다. 이 독한 술을 석 잔이나 마시고 나니 리오넬도 온몸이 홧홧해지며 은근한 취기가 올랐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조금 기대어 앉으며 황후를 응시했다. 그리고 취기를 빌어 말했다.
“황후 폐하.”
“응?”
“제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였다면, 애초에 보좌관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좌관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에흐몬트에서 나고 자란 제가 몰랐겠습니까?”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리오넬의 눈빛, 표정, 태도를 재단하듯 살펴보며 그의 말뜻을 헤아렸다. 잠시의 침묵 후, 아델이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리오넬, 나와 연인이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