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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잠 못 드는 황제와 디안 (38/127)

38화. 잠 못 드는 황제와 디안2021.08.10.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는 황후의 말에 리오넬은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16553291436836.jpg“황후 폐하, 제 말뜻은, 그러니까…….”

16553291436843.jpg“그러니까?”

16553291436836.jpg“……저의 명예에 대해 과하게 염려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16553291436843.jpg“리오넬.”

16553291436836.jpg“예. 말씀하십시오.”

16553291436843.jpg“국방부 장관이라는 자가 자기 명예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그건 겸손이 아냐.”

16553291436836.jpg“…….”

16553291436843.jpg“뭐, 국방부 장관을 보좌관으로 덜컥 선택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델은 제 말이 우스운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웃음에 리오넬은 왠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델은 미간을 천천히 문지르다가 말을 이었다.

16553291436843.jpg“그러니까 말이야. 그대는 국방부 장관이고, 나는 이 나라 황후지. 남들이 보기에 명예도 뭣도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최소한 우리끼리는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자고 말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제 말을 되짚어 보던 아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6553291436843.jpg“말이 안 되는 소리네.”

석 잔 술에 취해 도대체 무슨 소릴 지껄인 것인지. 그녀의 말에 리오넬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 수려한 미간, 날카로운 듯 긴 눈매, 곧고 우뚝한 콧대, 살짝 깨문 붉은 입술. 아델은 불현듯 리오넬이 참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술기운이 올라서일까, 자꾸만 짓이겨진 입술에 시선이 고였다. 붉은 입술에 머물던 시선이 날카로운 턱선으로 미끄러졌다가 다시 뺨을 타고 올라간 순간, 흑단처럼 새카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일렁이는 불빛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는 공간, 더운 숨이 뺨을 간질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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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붉은 불빛이 반사된 눈동자가 영혼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가진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갑자기 치미는 묘한 느낌에 차갑게 가라앉았던 술기운이 확 번지듯 얼굴이 뜨거워지려는 순간, 아델의 본능이 경고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델이 먼저 시선을 돌리자, 홀린 듯 아델을 바라보던 리오넬도 크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내리깔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억눌린 숨소리가 어둡고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삽시간에 찾아온 정적에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아델은 위기를 느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은 뒤, 리오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불쑥 하얀 손이 내밀어지자 리오넬이 고개를 들었다. 깨끗한 얼굴이 부드럽게 휘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이슬처럼 증발해 버렸다. 아델은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3291436843.jpg“알아. 그대가 고작 나와 연인이 되어 보겠다고 온 길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고.”

16553291436836.jpg“…….”

16553291436843.jpg“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돕겠다고 했지?”

16553291436836.jpg“예.”

16553291436843.jpg“그 말이 아주 든든했어. 나 역시 먼저 배신 같은 것은 하지 않을게.”

리오넬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여 아델을 바라보다가, 내밀어진 하얀 손을 조심스레 마주 잡았다. 참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16553291436836.jpg“저 역시 절대로 폐하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아델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 * *

16553291459501.jpg‘지금쯤 황후께선 리오넬 발드르와 밤을 보내고 있을 거예요.’

  디안의 속삭임은 찐득한 진흙처럼 카를의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카를은 제 어깨에 기대어 오는 디안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뒤로 밀었다. 디안의 얼굴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16553291459501.jpg“폐하?”

황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디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슴이 거칠게 쿵쿵 뛰었다. 카를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남겨 둔 채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버렸다. 가슴이 서늘해진 디안은 저도 모르게 팔을 문질렀다.

16553291459507.jpg“나가.”

카를은 싫은 티를 냈음에도 제 방으로 가지 않는 디안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결국,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고 난 뒤에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카를은 눈을 감아 버렸다. * * * 디안은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둘러 황제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황제는 원래부터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싸늘했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냉혹했다가 다정한 말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16553291459501.jpg‘놀라지 마. 다른 이유 없어. 그는 원래 이랬어.’

디안은 어두운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렇게 귀빈용 객실로 돌아왔지만,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디안은 입술을 깨물며 방 안을 서성였다.

16553291459501.jpg“어떡하지?”

몸이 자꾸만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집이라 생각했던 상아궁도, 궁주라는 칭호도 빼앗겼다. 그리고 오늘, 황제마저 그녀를 밀어냈다. 마치 힘겹게 쌓아 올린 성이 무너진 것만 같은 절망감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디안은 차가운 물을 마신 뒤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16553291459501.jpg“폐하는, 황후가 발드르 공가와 손을 잡은 것이 못마땅하신 거야. 발드르 공가의 세력이 커질까 봐. 절대로 그 여자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야.”

그래. 그 여자를 보시던 눈빛, 그 냉혹하고 날카롭던 눈빛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하겠어? 디안은 습관적으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16553291459501.jpg“내일이 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찾으실 거야. 나는…… 절대 이 자리에서 내려가지 않을 거야.”

16553291459501.jpg‘이 자리에서 내려가지 않으려면, 세상을 내 발아래 두려면 어찌해야 할까?’

결론은 하나였다. 아이. 아니, 이왕이면 아들. 황제의 피를 이은 아들이 있어야 했다. 디안은 빌고 또 빌었다. 모래알을 세듯 밤을 헤아리며 그 한 알, 한 알마다 빌었다. 제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 * * 디안이 물러간 뒤, 카를 역시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불면의 밤을 보낸 카를은 집무를 보면서도 내내 예민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시종이 가져오는 소식에 닿아 있었다. 차를 든 시종이 조심스럽게 사용인 문을 열었을 때였다.

16553291459507.jpg“소식 온 것 없느냐?!”

16553291480306.jpg“예?!”

시종이 발작하듯 놀라는 바람에 뜨거운 차가 왈칵 쏟아졌다.

16553291480306.jpg“죄송합니다!”

카를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도 온종일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시종들이 수십 번 드나들 동안, 황후의 소식은 한 자락도 없었다. 밤이 되어 침실로 돌아온 카를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16553291459507.jpg“도대체…… 뭐 한다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야.”

황후가 리오넬과 밤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디안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다음 날, 밤새 뒤척이던 카를 울리히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16553291459501.jpg‘지금쯤 황후께선 리오넬 발드르와 밤을 보내고 있을 거예요.’

  디안의 속삭임이 또다시 떠오르자 카를은 눈을 세게 눌러 감았다가 뜨며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시종이 작게 노크한 뒤 조심스레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를은 그를 힐끔 보며 무성의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3291459507.jpg“무슨 일이냐?”

16553291480306.jpg“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 순간 카를은 앉아 있던 침대에서 튕겨 나오듯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그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다급히 방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 * * 다시 돌아온 황후궁은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아델은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시녀들이었다. 그간 시녀들은 아델의 눈치를 보면서도 일정 거리 밖을 맴돌며 심부름을 해야 할 때만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토끼처럼 재빠르게 일한 뒤 쏜살같이 도망가곤 했다. 그랬던 그들이 며칠 사이에 상황을 판단한 모양인지 일제히 달려 나와 아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아델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없는 사이에 디안 푸아티에가 상아궁에서 물러났음을 깨달았다.

16553291480306.jpg“오셨어요, 황후 폐하?”

한 시녀가 다가와 살갑게 인사하려 애를 쓰자 다른 시녀들도 다가와 물었다.

16553291480306.jpg“따뜻한 물을 준비할까요? 몸을 좀 푸시겠어요?”

아델은 물끄러미 그녀들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어 주었다. 황후의 웃음에 흠칫 놀란 시녀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아델이 바라는 그녀들과의 관계는 딱 이 정도였다.

16553291436843.jpg“그래. 그러자. 따뜻한 물을 준비해 다오.”

느릿한 어조로 명령을 내린 뒤 깔끔하게 몸을 돌린 아델 앞으로 긱스 부인이 달려 나왔다. 시녀가 들고 있는 아델의 짐가방을 힐끔 쳐다본 노부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16553291436843.jpg“그대 덕에 편안히 지냈소.”

16553291497355.jpg“다행입니다.”

16553291436843.jpg“너희들은 각자 일을 해라. 따라오지 말고.”

아델은 시녀들을 물리고 긱스 부인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황후가 벗는 겉옷을 받아 주며 긱스 부인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16553291497355.jpg“디안 푸아티에 백작 영애가 상아궁에서 황제궁의 귀빈용 객실로 처소를 이전하였습니다.”

황후와 긱스 부인의 눈이 마주쳤다.

16553291497355.jpg“인력은 귀빈용 객실에 준하도록 일단 제가 편성해 두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노부인이 겉옷을 완전히 빼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황후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16553291436843.jpg“예상했던 일이군. 됐소, 일단. 그 정도면.”

16553291497355.jpg“호칭 문제도 바로잡아 두었습니다.”

16553291436843.jpg“수고했소. 그 이외의 별다른 일은 없었소?”

16553291497355.jpg“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황제 폐하의 직속 시종이 폐하의 행방을 집요하게 묻고 갔었습니다.”

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문을 바라본 긱스 부인이 문을 살짝 열었다. 막 노크를 하려던 시녀가 놀란 듯 탄성을 내질렀으나, 노부인은 엄격한 얼굴로 질책했다.

16553291497355.jpg“무슨 일로 뛰어다니느냐?!”

그러나 그녀의 질책에도 시녀는 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야차 같은 얼굴의 황제가 시녀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황제는 폭군 같은 모습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저런 모습을 벌써 몇 번이나 본 것인지 모르겠다고 아델은 생각했다.

16553291436843.jpg“어서 오십시오, 폐하. 너희는 다들 나가라.”

황후의 명령에 긱스 부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그 거친 모습에 아델은 그의 방문 이유를 직감했다.

16553291436843.jpg‘디안 푸아티에의 상아궁 문제로 왔나 보군.’

동시에 토굴 같던 빈민가의 수많은 집이 다시 떠올랐다. 벌써 며칠째 잠시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수많은 무덤을 잠시 밀어 두며, 아델은 찰나의 순간 황제가 따질 말에 대한 대답을 준비했다.

16553291459507.jpg“어디 있었소?!”

그러나 바짝 붙어 오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질문은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아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16553291459507.jpg“어디 있었소?”

짙은 자색 눈동자가 아델라이드의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옭아매었다. 아델은 도대체 이자가 자신을 무엇 정도로 여기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16553291436843.jpg“그에 대한 답은 이미 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카를이 그에게서 몸을 돌리는 아델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책상으로 밀어붙였다. 아델은 그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세게 밀어내면서 화를 냈다.

16553291436843.jpg“지금 뭐 하는!!”

16553291459507.jpg“리오넬 발드르와 있었나?”

질척한 집착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질문에 아델은 말문이 막혔다. 숨과 숨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카를은 아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금빛, 그 찬란한 빛 아래 가닥가닥 옅은 선이 빼곡했다. 길고 가지런한 검은 눈썹 아래 자리한 그 투명하고 찬란한 금빛은 마치 태양과도 같았다. 카를은 한순간 찬란한 빛에 넋을 놓았다. 동시에 황후가 없던 시간 내내 그를 잠식했던 음험하고 어두운 생각이 튀어나왔다. 황궁을 벗어난 며칠 밤 동안 흐드러졌을 태양 같은 금빛 눈과, 열에 들떠 일그러졌을 오만하고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었을 리오넬 발드르. 그자의 검푸른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16553291459507.jpg“리오넬 발드르와 함께 있었나?”

아델은 갑작스럽게 찾아와 무례하게도 그녀를 죄인 취급하는 황제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16553291436843.jpg“그랬다 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서로 관심 두지 않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제의 가슴에 새빨갛게 넘실대는 충동 위로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한겨울 서리처럼 흩뿌려졌다. 황후의 말을 천천히 곱씹던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16553291459507.jpg“무슨 상관이냐고? 내 아이의 모후가 되어야 할 그대가 혹 발드르의 아이를 가질까 저어되어 그럴 뿐. 처신 잘하시오. 내가 그대의 아이를 내 아이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찌하려고?”

그 저열한 말에 아델이 음산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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