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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리오넬의 욕망 (39/127)

39화. 리오넬의 욕망2021.08.14.

16553291612005.jpg‘네가 하면 로맨스고 내가 하면 불륜이냐? 처신 같은 소리 하네.’

황제에게 밀려 책상에 반쯤 기대고 있던 아델은 아예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감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내어 황제의 목에 천천히 감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를이 조금 뒤로 물러났으나, 아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끌어안듯 그의 목덜미 뒤로 양손을 뻗자 카를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델은 스카프를 황제의 목에 두른 뒤, 정중앙에서 매듭지었다. 그리고 이것이 마치 목줄이라도 되는 양 한 손으로 잡아 쥔 채 매혹적으로 웃었다.

16553291612005.jpg“제게 하셨던 말씀, 왜 자꾸 잊어버리십니까?”

그 말의 의미를 곱씹는지, 황제는 침묵했다. 아델은 기습적으로 지금껏 참고 있던 분노를 쏟아냈다.

16553291612005.jpg“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16553291612022.jpg“그대가 이곳을 고트로프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16553291612005.jpg“…….”

16553291612022.jpg“아직도 스스로를 누구에게도 굽힐 필요 없는 황태녀라 여기기 때문이고, 그 믿음에서 한 발자국도 양보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그런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 주고 싶기 때문이지.”

카를은 그 말을 끝으로 스카프 매듭을 확 잡아당겼다. 매듭을 쥐고 있던 아델의 몸이 그대로 끌려왔다. 그는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받쳤다. 손가락 사이로 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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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기울여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이는 카를을 막아 세운 것은 을씨년스러운 음성이었다.

16553291612005.jpg“이러면 나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아델은 한 손으로 그의 몸을 밀어내며 씹어뱉듯 말했다.

16553291612005.jpg“나를 길들이고 싶은 모양인데, 이렇게 요령 없이 몸으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나를 유혹해 봐. 그래서 내가 정신이 팔리면, 그때 느슨하고 느슨한 목줄을 슬며시 조심스럽게 내 목에 감아. 절대 나한테 들키지 말고."

천성을 왕으로 타고난 자의 강렬한 의지가 철썩철썩 파도처럼 밀려와 카를의 귓가를 두드렸다. 손가락 끝에 걸린 짙은 밤, 귓가를 두드리는 파도. 휘영청한 금빛 달. 섞이는 숨에 느껴지는 짙은 봄꽃 향내가 아득했다. 카를의 뇌리에 섬광과도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의 입술이 아델의 입술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배회했다. 도톰한 입술이 서로 닿기 직전, 카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붉은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아델을 마주한 이래 첫 미소였다. 만개한 꽃처럼 흐드러진 황제의 웃음은 아델마저 한순간 넋을 놓을 정도로 찬란하고도 천진했다. 홀로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가 방심한 사이,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귓바퀴에 닿는 손길에 아델이 미간을 찌푸리자 카를은 정중한 태도로 손을 떼고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소리 없이 몸을 돌렸다. 걸음걸이가 어찌나 귀족적인지 아델은 그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왔듯 가는 것도 갑작스러웠다. 뭐지? 도대체 뭐 하는 것이지? 홀로 남은 아델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16553291612005.jpg“……미친 건가. 하여간 종잡을 수가 없어.”

  * * * 그날 오후, 황후궁에 갑작스럽게 상인들이 몰려왔다. 이미 한 번 데인 적이 있는 터라 시녀들은 질색하며 그들을 막았다.

16553291639453.jpg“도대체! 부른 적 없는데 왜들 이렇게 오는 거예요?!”

그러자 상단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16553291639453.jpg“아, 이번에는! 황제 폐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16553291639453.jpg“…….”

16553291639453.jpg“그러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16553291639453.jpg“자, 자, 자, 자, 잠시만요. 황제 폐하께서요?!”

황제의 직인을 확인한 시녀들은 후, 하, 후, 하 심호흡을 한 뒤 빛의 속도로 달려 들어가 긱스 부인에게 이 일을 고했다.

16553291639481.jpg“황제 폐하께서 보내셨다고?”

16553291639453.jpg“네!!! 그렇대요!!!”

16553291639481.jpg“……일단 기다리라 전하거라.”

16553291639453.jpg“네!!”

긱스 부인은 우아하게 몸을 돌려 걸으며 좀 전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았다. 야차처럼 달려온 것과 달리, 황제는 분명 황후궁을 떠날 땐 웃고 있었다. 황후는 공저에서 가져온 서적을 잔뜩 늘어놓고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16553291639481.jpg“황후 폐하.”

16553291612005.jpg“말씀하시오.”

그녀는 책에서 눈도 떼지 않으며 말했다.

16553291639481.jpg“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상인들이 대기 중입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일순 정지하며, 고개를 책에 파묻고 있던 황후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16553291612005.jpg“돌려보내시오. 필요 없소.”

16553291639481.jpg“하오나 황후 폐하.”

16553291612005.jpg“……내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 그렇소만, 분명 잔뜩 화가 나서 달려오지 않았소?”

16553291639481.jpg“가실 때는 분위기가 누그러진 상태셨습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웠다고!

16553291612005.jpg“그러니까 왜?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오.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는데.”

그가 황제만 아니었다면 아델은 신랄하게 ‘미친 것 아니오?’라고 물었을 것이다.

16553291612005.jpg“난 필요한 것이 없고 받고 싶지도 않소. 돌려보내시오. 추경예산을 무산시킨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소. 이건 날 조롱하겠다는 뜻이 아니오?”

16553291639481.jpg“내밀어진 손을 굳이 쳐낼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자칫 황실의 위신이 떨어질 수도 있고요.”

아델은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차라리 탑을 파괴하고 다니는 것이 훨씬 편하고 쉬웠다. 황후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닌지라, 잠시 고민하던 긱스 부인이 묘안을 제시했다. 이대로 상인들을 돌려보낸다면 황제의 심기를 대놓고 건드는 격이니 황후에게도 득이 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선물 받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무언가를 받아 봐야 황후는 화만 날 것이고.

16553291639481.jpg“차라리 금을 사는 것은 어떠십니까?”

16553291612005.jpg“……금?”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고경력 황궁 총관리인다운 발상이었다. * * * 황제가 보낸 상인들이 물밀듯 황후궁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은 해가 기울기도 전에 황궁 곳곳으로 퍼졌다.

16553291639453.jpg“디안 푸아티에의 시절이 저물어 가네요.”

16553291639453.jpg“금방이라도 상아궁을 돌려받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황제 폐하의 궁으로 처소를 이전했다죠?”

16553291639453.jpg“에휴. 아들도 없는 첩은 바람 앞에 등불 신세인 거죠.”

16553291639453.jpg“그래도 또 몰라요. 어쨌든 황제 폐하께서 디안 푸아티에를 궁 밖으로 내치신 것은 아니잖아요? 듣자 하니 황후 폐하의 거주허가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황제궁밖에 없다고 하더라구요.”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긱스 부인은 적당히 소문이 날 만하면서도 사치라 부르기는 어려운 묘한 가격대를 요령 좋게 맞춰 냈다. 이런 것은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델은 금괴를 들여놓느라 정신이 없는 시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간을 톡톡톡 두드리는 손가락, 굳은 미간, 굳게 다문 입술. 황후의 심기가 썩 편치 않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시녀들은 굳이 그녀 앞에서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16553291612005.jpg‘이게 다 얼마라고?’

아델은 한 손에 쥐고 있던 정산서를 펼쳐 금액을 확인했다. 추경이랍시고 책정했던 금액을 훌쩍 상회하는 액수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암만 좋게 생각하려 해도 이건 선물이 아니라 조롱이 확실했다.  

16553291612022.jpg‘나는 너에게 추경해 줄 능력이 있음에도 그러지 않겠어. 대신 선물이나 줄게. 드레스나 보석 좀 사든지.’

  딱 이거 아닌가?

16553291612005.jpg“이보시오, 부인.”

16553291639481.jpg“예, 황후 폐하.”

16553291612005.jpg“내가 지금 이걸 받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러 가야 하는 거요?”

참 어려운 성격의 두 사람이 만났다. 긱스 부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공손히 대답했다.

16553291639481.jpg“뜻대로 하시지요.”

아델은 정산서를 접어 긱스 부인에게 건네준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한편 그 무렵 발드르 공가. 비밀스럽게 찾아온 귀빈은 떠날 때도 소리 없이 돌아갔다. 황후가 사용한 방을 정리하러 들어간 발드르 공가의 집사는 머리카락 한 올 남아 있지 않을 만큼 깔끔한 내부를 둘러보곤 허허롭게 웃었다. 귀하게 태어나 스스로 정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으레 손이 많이 가기 마련인데, 황후가 사용한 공간은 굳이 더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16553291639453.jpg“황후 폐하께서는 참 깔끔한 성정이신 듯합니다.”

리오넬은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황후가 돌아간 그날 밤. 리오넬은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다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른세수를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술렁이는 가슴 때문에 없던 불면증이 생겼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리오넬은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왜 이러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답을 구할 수 없자, 그는 방향을 전환했다.

16553291708957.jpg‘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긴 시간 헤매던 것이 무색할 만큼 빠른 답이 그의 내면에서 튀어 나왔다. 그의 가슴 아래 자리한 시뻘건 무언가가 슬그머니 앞발을 내밀었다. 바짝 조여진 검푸른 눈동자가 창문을 향했다. 욕망이 한 발을 더 내밀어 웅크렸던 몸을 쫙 펴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불빛이 반사된 금안, 단정하고 고운 얼굴, 차갑고 자그마한 손. 제가 뭘 어쩌고 싶은 것인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음에도 그저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열병을 앓는 사춘기 소년처럼 몸과 마음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몰아치는 격정적인 감정에, 리오넬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방을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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