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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쓰러진 황후 (40/127)

40화. 쓰러진 황후2021.08.17.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5층 가족실 앞이었다. 이 문 앞에 서면 늘 부모님이 먼저 생각나던 것이 무색하게도, 오늘 리오넬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른 이였다. 평생 살아온 집의 무수히 많은 방 중 하나일 뿐인데, 어쩐지 낯설고 생경하여 마치 처음 마주하는 것 같았다. 술렁이는 가슴을 뒤로하고 문을 열자, 익숙한 공간이 보였다. 깊게 들이마신 숨에 어쩐지 그녀의 향이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리오넬은 평소 독한 술을 즐기지 않았으나, 그에 손엔 어느새 밀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리오넬은 소파에 앉아 아델이 앉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무엇을 되짚고 싶어서 이곳에 왔을까? 그녀가 했던 말, 행동, 작은 표정 하나하나가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느 하나도 의미 없이 무의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줄곧 그의 온 신경이 그녀를 향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16553291800087.jpg‘리오넬, 나와 연인이 되고 싶어?’

  불현듯 떠오른 서늘한 목소리에 다시금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낭만적인 뜻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에서 시작된 전율이 순식간에 발끝까지 내달렸다. 나는 그 물음에 왜 전율했던가? 왜 자꾸만 홀린 듯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던 그 순간을 되새기는가? 리오넬의 미간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16553291800094.jpg“미쳤구나.”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쥐고 있던 잔을 놓고 제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긴 한숨을 내쉬어도 답답함이 사라지질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줄곧 외면해 왔던 욕망 한 자락을 마주하고 나니 지독한 허탈감이 찾아왔다.  

16553291800087.jpg‘리오넬!’

  가을바람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  

16553291800087.jpg‘리오넬.’

    리오넬은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벌떡 일어나 서둘러 가족실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방문을 급하게 닫은 뒤, 문에 기대어 선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16553291800094.jpg“정신 차려라.”

한순간도 허투루 풀어진 적 없는 그 맹수같이 고고한 눈을 떠올려라. 찬란한 태양을 닮은 금빛. 강림하는 듯 하늘에서 내려오던 그 빛. 구원처럼 느껴지던 그 찬란한 빛.

16553291800094.jpg“하하…….”

리오넬은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늦은 깨달음이 섬광처럼 그의 뇌리를 통렬하게 스쳐 갔다. 황후가 보좌관 공고를 낸다고 했을 때, 왜 그가 직접 가야겠다고 생각했던가? 다른 가문의 사람을 대신 보낼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그저 그 공고를 보자마자 직접 응해야겠다 마음먹었고, 그 뒤에 이유를 만들었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밀어 버렸다. 스스로 끼워 맞춘 이유가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실은, 처음 마주한 찬연한 빛에 한순간 압도당해 매료되었으면서도.  

16553291800087.jpg‘국방부 장관이라는 자가 자기 명예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16553291800087.jpg‘최소한 우리끼리는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자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아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리오넬은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16553291800094.jpg“명예…….”

황후는 그 어떤 곤란한 순간에서조차 품위와 명예를 잃지 않으려던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명예란, 어쩌면 목숨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 그의 욕망은, 그녀의 명예를 깎는 일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아델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황후에게 고백하였듯, 그만은 절대로 그녀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리오넬은 황후의 고결하고 오연한 얼굴을 떠올리며 제 욕망과 미련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어둑한 복도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시뻘건 발을 도로 내밀려는 무언가를 억지로 꾹꾹 밟아 누르며. * * * 다음 날 오전. 황후궁으로 또 꽤 많은 인원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상인들이 아니었다. 한 소대에 이를 정도로 많은 근위병과 시종, 시녀들이 정갈한 차림으로 궁 앞마당에 당도했다. 황후궁은 한순간 어수선해졌다. 긱스 부인이 재빨리 달려 나가 무리의 총책임자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16553291800138.jpg“황제 폐하께서 보낸 사람들이라 합니다.”

아델은 창문 너머로 대기 중인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16553291800087.jpg“어제는 돈, 오늘은 인력이라. 대체 저들은 왜 왔다 하오?”

16553291800138.jpg“황후 폐하를 보필할 인원이 무척 적다며 저들을 보내셨다 합니다.”

아델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예산 추경은 해 줄 마음이 없다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 주려는 모양이었다.

16553291800138.jpg“……어찌할까요?”

16553291800087.jpg“선택지에 내가 저들을 받지 않는 것도 있소?”

16553291800138.jpg“…….”

16553291800087.jpg“그것 또한 현명하지 않은 방법이지?”

16553291800138.jpg“…….”

긱스 부인은 침묵하며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델은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꽃을 줬다 하여 받는 사람에게도 그것이 꽃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아델은 괜히 목덜미가 뜨거워서 제 목을 천천히 매만졌다. 아무래도 황제는 방법을 바꾸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16553291800087.jpg“저들에게 아무 일도 주지 마시오.”

16553291800138.jpg“…….”

16553291800087.jpg“호위는 과하니 절반을 돌려보내고, 시종과 시녀들은 두되 굳이 일감을 만들어 주지 말고 그저 지금 시녀들이 하는 일이나 나눠 도우라 하시오. 그 정도면 충분하니.”

16553291800138.jpg“……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서슬 퍼런 황후의 말에 긱스 부인은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16553291800138.jpg“그리고 데스포네 공작께서 만남을 청한다며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편하신 시각을 말씀해 주시면 찾아뵙고 싶다 하는데 어찌할까요?”

16553291800087.jpg“데스포네 공작?”

16553291800138.jpg“예.”

아델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16553291800087.jpg“괜찮으니 편한 시간에 오라 전하시오.”

16553291800138.jpg“예, 알겠습니다.”

  * * * 그 소식을 들은 데스포네 공작이 선물을 든 시종을 줄줄이 데리고 곧장 황후궁의 정문을 통과했다. 소문으론 분명 황제가 황후궁에 인력을 배치했다고 하던데, 어쩐 일인지 궁은 조용했다.

16553291800138.jpg“어서 오십시오, 데스포네 공작님.”

16553291845158.jpg“흐음. 궁이 적적하군?”

공작의 질문에도 긱스 부인은 쓸데없는 말을 삼간 채 정중히 그를 안내했다. 황후는 집무실 상석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스포네 공작이 과하게 친근한 얼굴로 아델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16553291845158.jpg“황후 폐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16553291800087.jpg“어서 오십시오, 데스포네 공.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델도 웃는 얼굴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시종들이 따라 들어와 선물상자를 줄줄이 쌓기 시작하자, 공작은 더욱 환히 웃으며 그 선물을 일일이 설명했다. 이건 여성에게 좋은 차이고. 저건 명의가 지은 몸을 보하는 약이며, 또한 저것은 귀한 보석이고, 어쩌고저쩌고. 한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던 공작은 우리 한번 잘 지내 보자는 말로 마무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16553291845158.jpg“우리 황후 폐하께서 유능한 마법사이시라니. 어찌나 든든한지 모르실 겁니다.”

아델은 싱긋 웃었다. 데스포네 공작이 제안했다.

16553291845158.jpg“마법사단에 한번 나오시지요.”

16553291800087.jpg“내가 가면 그림이 이상해지지 않을까요?”

16553291845158.jpg“으음?”

16553291800087.jpg“그렇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에흐몬트 마법사단은 공인된 동시에 직급을 준다고 하던데, 내가 공인을 받고 나면 무슨 직급을 주시렵니까? 단장직을 주시렵니까?”

16553291845158.jpg“아하!”

데스포네 공작은 이제 깨달았다는 듯 제 손바닥을 두드렸고, 아델은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공작을 응시했다. 황후를 이리저리 재단해 보던 공작이 몸을 기울이며 은근하게 물어 왔다.

16553291845158.jpg“황후 폐하, 어찌하여 발드르 공가와 손을 잡으시려는 것입니까?”

아델이 그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데스포네 공작은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16553291845158.jpg“저를 두고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 하십니까?”

16553291800087.jpg“무슨 말씀이십니까?”

16553291845158.jpg“황후 폐하. 저는 울리히 황가의 사람입니다. 폐하의 가족이지요.”

가족이라. 그 단어 참…….

16553291845158.jpg“물론 황후 폐하께서 어떤 어려움에 처해 계신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이제야 찾아뵌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디안 푸아티에는 곧 치워질 겁니다.”

16553291800087.jpg“그래요?”

16553291845158.jpg“예, 그럼요. 주제를 모르는 방자한 것은 금방 치워야지요.”

그 은근하고 잔인한 속삭임에 아델은 음산하게 웃었다. 데스포네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황후는 서둘러 웃음을 갈무리하며 사과했다.

16553291800087.jpg“아, 죄송합니다.”

16553291845158.jpg“별말씀을요.”

16553291800087.jpg“그보다 이리 오셨으니 말입니다. 내가 질문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16553291845158.jpg“……아, 물론입니다.”

16553291800087.jpg“정말 궁금하여 묻는 겁니다.”

16553291845158.jpg“예.”

16553291800087.jpg“탑을 왜 그냥 두시는 겁니까?”

16553291845158.jpg“…….”

16553291800087.jpg“황후로서 묻습니다. 왜 그냥 두고만 보십니까? 그걸 이용해 무엇이 하고 싶으십니까?”

아델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16553291800087.jpg“디안 푸아티에, 그런 이야기는 치워 두세요. 나는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힘을 가지는 것엔 흥미가 없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진정한 권력의 핵심이지요. 그 옆에서 얻어먹는 부스러기 따위는 조금도 필요 없어요.”

데스포네 공작의 눈이 매서워졌다. 아델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던 그가 지금까지의 상냥한 가면을 벗어 버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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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291845158.jpg“그럼 황후 폐하, 저와 손을 잡고 탑의 주인이 되어 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16553291800087.jpg“어떻게요?”

황후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자 데스포네 공작은 가슴을 활짝 펴며 단단한 어조로 답했다.

16553291845158.jpg“황후 폐하,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힘입니다. 탑을 잘 이용하면 권력? 아니. 신력을 얻게 되실 겁니다. 폐하께선 신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아델라이드 황후는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었다. * * * 데스포네 공작이 돌아가고 아델은 먹은 것도 없이 속에 든 모든 것을 게워 냈다. 원래도 창백한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시퍼레졌고, 붉은 입술도 색을 잃었다. 어떤 순간에도 평정을 잃지 않을 것 같던 긱스 부인마저 당황하여 의원을 데려오라 소리를 지를 만큼 황후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황후는 혼비백산하여 달려온 의원이 서둘러 내민 약을 먹고서야 구역질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마에 손을 대면 데일 듯 무섭게 열이 끓어오른 것이다. 해열제를 먹어도 열은 쉬이 내릴 기미가 없었다.

16553291800138.jpg“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이오? 오늘 아침만 해도 괜찮으셨소. 혹시…….”

1655329190138.jpg“아뇨. 아뇨. 독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16553291800138.jpg“그럼 도대체 갑자기 왜…….”

1655329190138.jpg“먼 타국으로 오셔서 그간 스트레스가 누적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지요.”

삽시간에 나빠진 몸 상태에 아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어찌나 많이 토했는지 식도가 불에 타는 듯 고통스럽고, 온몸은 매를 맞은 듯 아프면서 덜덜 떨렸다. 그렇게 떨다가 그녀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황후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곧장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16553291922951.jpg“뭐?! 황후가 쓰러져?”

1655329190138.jpg“예, 폐하.”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던 여자가 쓰러졌다고?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3291922951.jpg“내 직접 가 봐야겠군.”

그리고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황제궁을 박차고 나와 황후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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