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황후와 두 남자2021.08.24.
잠시 후, 황후궁에서 두 명의 시녀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 한 사람은 황후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리오넬 발드르가 있는 기사 관저로, 나머지 한 사람은 황후가 깨어나면 당장 알리라던 황제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황제궁으로 향했다. * * * 마이클 로젠이 돌아간 뒤, 리오넬은 좀처럼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 처음과 끝이 보이지 않고,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대신 보았던 장면과 보지 못했던 장면이 자꾸만 두서없이 스쳐 지나갔다. 마셨던 밀주 향이 코끝을 맴돌고, 속삭이듯 부르는 이름이 바람처럼 귀밑머리를 흔드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편찮으신 것일까? 독에 중독된 것은 아니라 했으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황제는 왜 갑자기 그분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신경이 한껏 예민해졌다. 목이 답답하여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럼에도 초조하여 리오넬은 결국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때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오넬은 숨을 크게 가다듬고 서둘러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들어오게.”
부관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황후궁의 시녀였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 딱 보아도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인가?”
리오넬이 몸을 조금 일으키며 묻자, 시녀는 숨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헉, 부르십니다.”
그 말에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리오넬은 찰나의 순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가 벼락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시녀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은 채 방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녀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황후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명했다. 긱스 부인도, 시녀들도, 심지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의원들의 손길마저 거부했다. 지금 출입을 허가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리오넬이 황후궁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그를 재빨리 황후의 침실로 안내했다. 침실 앞에는 긱스 부인을 필두로 한 시녀 무리와 의원 몇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리오넬에게 쏟아졌다. 그의 얼굴을 본 긱스 부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똑똑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리오넬은 숨을 고르며 습관적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긱스 부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긱스 부인이 그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독대를 원하십니다.”
리오넬은 그답지 않게 긴장하며 한 걸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 긱스 부인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방은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환자가 있는 방 특유의 따뜻한 온도와 다소 높은 습도, 알싸한 약 냄새에 리오넬은 숨을 멈췄다. 황후는 침대에 누운 채였다. 소파에 반쯤 누워 오만한 얼굴로 맞이한 적은 있으나, 저렇게 누워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리오넬은 어금니를 세게 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느리게 뗀 발걸음은 곧 뛰는 듯 조급해졌다.
“황후 폐하.”
마련된 의자에 앉지 않고 침대 가에 한쪽 무릎을 꿇자 모로 누운 황후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거친 숨결 끝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보이는 피부, 바싹 말라 버린 입술.
“황후 폐하, 리오넬 발드르입니다.”
가까스로 나온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한 번, 두 번, 얕게 움직였다. 리오넬은 그 모습을 숨도 쉬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윽고 온전히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을 때, 리오넬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리오넬.”
여리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그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을 뜨니 리오넬이 있었다. 단정한 얼굴의 남자가 보이자 아델은 덜덜 떨리는 손을 죽을힘을 다해 있는 힘껏 뻗었다. 리오넬이 당황한 듯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지만, 아델은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뻗은 손이 마침내 그에게 닿았다.
내가 이곳에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내가 그래도 부탁이라는 것을 해 볼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고트로프에, 사람을 보내서, 누구든 좋으니,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나에게로, ……데려와 줘.”
뺨에 닿은 뜨거운 손에 얼어붙은 것도 잠시, 리오넬은 황후의 눈물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트로프에 사람을 보내 누굴 데려오란 말씀입니까?”
“내가, 내가 찾는다고, 내가 부른다고 전해…….”
“누구를요?”
“카인 녹스, 기벨린 루한, 테오도르 시니악, ……누구든 괜찮아. 누구든, 상관없어.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부른다고 하면, 올 테니까.”
핏발 선 금빛 눈동자에 스쳐 가는 단단한 신의, 그 믿음에 리오넬의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짙은 그리움이 섞인 눈물이 미끄러져 길을 만들었다. 리오넬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황후를 응시하며 천천히 되물었다.
“그들을 왜 부르고자 하십니까?”
“…….”
“갑자기 왜 부르고자 하십니까?”
“……죽을 것 같아서.”
“…….”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자기가 우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리오넬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숨을 죽였다. 뺨에 닿았던 뜨거운 손이 천천히 힘을 잃고 떨어졌다. 리오넬은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서 침대에 올려 주었다. 지옥으로 걸어 들어왔다던 말이 떠올랐다. 이분께는 에흐몬트가 지옥이자 감옥이 아닐까. 그래서, 그립고 괴로워서 병이 나셨던 모양이다. 이곳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서. 그러니 죽을 것 같아 두고 온 사람들을 부르라 하시는 것이다. 리오넬은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그때였다.
“아니…… 아니다.”
돌연 황후가 입을 열었다.
“데려오지 마. 못 들은 것으로 해, 리오넬.”
“…….”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반듯하게 누우며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조국도, 가족도, 버리면 안 되지.”
그 말을 끝으로 황후는 눈을 감았다. 리오넬은 놀라 다급히 황후의 숨을 확인했다. 황후는 미약하지만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다. 깊은숨을 몰아쉬며 안도한 것도 잠시, 리오넬은 이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카인 녹스, 기벨린 루한, 테오도르 시니악……. 처음 듣는 그 이름들이 진득하게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강력한 믿음. 이분에게서 받는 믿음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얼굴 모를 그들은 이분과 어떤 믿음을 주고받았던 것일까? 나는……. 나는……, 쾅!! 별안간 방문이 거칠게 열렸고, 리오넬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든 황후의 침실에 누가 감히?! 리오넬은 날 선 태도로 몸을 돌렸으나,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을 보고 그만 얼어붙었다. 제 영역을 침범당해 화가 난 맹수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리오넬 발드르.”
“……황제 폐하.”
화난 얼굴로 나타난 카를 울리히였다. * * * 주치의로부터 황후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달려온 길이었다. 황후의 침실이 있는 복도에 도착한 카를은 방 앞을 지키는 사용인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챘다. 어떤 직감이 뇌리를 관통했다.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마치 제 방인 양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황제에게, 긱스 부인이 탄식하며 재빨리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오히려 기름을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황제의 자색 눈동자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역시. 직감은 옳았다. 뜨거운 물을 억지로 삼킨 것처럼 가슴이 끓어올랐다.
“리오넬 발드르.”
“……황제 폐하.”
황후가 누워 있는 침대 가에 서 있던 리오넬이 귀족적이고 정중한 태도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카를의 시선이 리오넬의 뒤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황후에게 천천히 닿았다. 이 자식은 잠든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황제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황후가 불렀다?”
“네, 폐하. 그렇습니다.”
긱스 부인은 초조함을 숨기며 빠르게 답했고, 카를은 천천히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리오넬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리오넬은 건방지게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카를은 눈앞에 보이는 저 사내를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내쫓고 싶었다. 감히 네까짓 것이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냐고 추궁하고 싶었다. 카를은 잠든 아델을 응시했다. 그녀는 깬 적이 없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황후가 깬 것이 맞는가? 그래 보이지 않는데.”
“잠시 깨어나셨다가 다시 잠든 것으로 보입니다.”
주치의가 불똥을 맞을까 봐 얼른 답했다. 카를은 리오넬을 스쳐 지나가며 비난조로 말했다.
“그러면 말이지. 아무리 부름을 받았다 한들 황후가 잠들었다면 밖으로 나와야지, 안 그런가?”
카를은 잠든 아델의 머리맡에서 멈춰 섰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이 땀과 눈물에 젖은 단아한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강렬한 소유욕이 무서울 정도로 치달아 황제의 오감을 자극했다. 저자는 이 무방비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장이라도 리오넬의 두 눈을 짓이겨 버리고 싶다는 흉포한 충동이 일었다. 그때, 황제와 리오넬을 번갈아 살피던 긱스 부인이 리오넬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만 가 보시지요.”
황제의 불편한 심기는 손에 잡힐 듯했고, 그의 분노를 막아 줄 수 있는 황후는 의식이 없었다. 리오넬이 있어 봐야 좋은 꼴을 볼 리 없다. 리오넬은 지금껏 저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을 내쉬며 턱에 힘을 주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벌레처럼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동시에 무너진 성벽의 잔해에 무참히 깔린 것 같은 무력감과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리오넬이 굳은 얼굴로 움직이지 않자 긱스 부인이 조심스럽게 그를 채근했다.
“장관님.”
그녀의 부름 위로 음산한 목소리가 덧입혀지듯 날아들었다.
“아니. 잠시 거기 있지.”
황제가 우람한 리오넬의 뒷모습을 가늘게 노려보며 명령하자, 리오넬은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카를은 집요한 시선으로 리오넬의 표정을 살폈다. 리오넬 발드르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카를은 찰나의 순간 황후에게 향했던 리오넬의 시선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저자가 내 황후를 넘보고 있다.’
카를의 동물적 직감이 시뻘건 결론을 내렸다. 위기감이 척추를 타고 빠르게 번지자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 여자가 누구 것인지 똑똑히 보여 주지.’
카를은 일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느긋하게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반쯤 몸을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