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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격랑으로 치달은 감정 (43/127)

43화. 격랑으로 치달은 감정2021.08.28.

그 순간 그 방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리오넬은 저도 모르게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황제는 황후 가까이에 바짝 붙어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떼어 내며 리오넬에게 명령했다.

16553292431354.jpg“보좌관, 물수건을 좀 가져오게.”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긱스 부인이 용수철처럼 반응했다.

16553292431361.jpg“폐하. 그것은 제가…….”

하지만 황제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16553292431354.jpg“황후의 보좌관이 아닌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황제가 굳어 있는 리오넬을 빤히 응시하며 다시 한번 종용했다. 황후의 방에 대기 중이던 의원들과 사용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리오넬에게 날아들었다. 리오넬은 문득, 제 처지가 한심하고 우스웠다. 황제는 리오넬과 황후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니 동요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동요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한데, 왜 바람 앞의 갈대처럼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흙더미에 깔린 듯 숨쉬기가 어려운가. 리오넬은 깨질 듯 위태로운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한쪽 구석에 마련된 물수건을 집어 황제에게 걸어갔다. 황제는 냉담한 표정을 고수하는 리오넬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흘겨보다가 거칠게 물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잠든 아델에게 시선을 돌리며 보란 듯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 냈다. 유리 공예품을 만지듯 조심스럽고도 섬세한 손길이었다. 리오넬은 이 모든 장면을 숨 한 번 내쉬지 않고 바라보았다. 마치 망막에 아로새기려는 듯. 잠시 뒤, 땀과 눈물에 젖었던 아델의 얼굴이 말끔해지자 카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가까이에 서 있던 리오넬의 가슴팍에 꾹 누르며 속삭였다.

16553292431354.jpg“앞으로 황후가 잠들어 있을 땐, 문밖에서 대기토록. 알겠는가?”

황제는 주치의에게 황후가 깨거든 다시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고, 긱스 부인은 리오넬에게 다가와 손에 들린 물수건을 가져갔다. 리오넬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 그대로 아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가 몸을 돌렸다. 노부인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 * * 황후궁을 박차고 나온 리오넬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앙리 자칼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리오넬은 답조차 하지 못했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숨을 토해 내었음에도 가슴이 답답했다. 리오넬은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를 거친 손길로 풀어냈다. 눈을 꽉 눌러 감고 미친 듯이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순간 그 장면이 떠올랐다. 황후의 침대에 당연하다는 듯 기대어 앉은 황제가.

1655329243138.jpg“하…….”

리오넬은 탄식하며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들은 부부다. 황제가 황후를 간호하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난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한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리오넬은 저열하게 외치고 싶었다.  

1655329243138.jpg‘황후께서 깨어나시자마자 부른 것은 폐하가 아니라 접니다.’

1655329243138.jpg‘그분이 이곳을 지옥 같다 여기시는 것을 아십니까?!’

  혼란한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던 그는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제 욕망을 구겨 넣어 다시는 펼쳐 내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이 고작 하루 전이다. 한데 격랑의 감정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그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리오넬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그는 거세게 뛰는 가슴을 세게 문지르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감정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이것은 동경인가, 선망인가, 존경인가, 경외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까마득한 감정의 파고에 흔들리던 리오넬은 불현듯 죽은 듯 잠이 든 아델의 얼굴을 떠올렸다. 괜찮으실까? 리오넬은 허탈하게 웃으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마치 아델라이드에게 목줄이 쥐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작은 것 하나에도 이렇게 속절없이 뒤흔들리고 있으니. * * *

16553292431354.jpg“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하도록.”

카를은 황후궁을 빠져나오며 자신을 따라오는 시종에게 말했다. 황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을 무렵, 황제는 시종에게서 황후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던 차였다.

16553292431395.jpg“죄송하게도 공저 안의 상황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16553292431354.jpg“그래서? 같은 방을 썼다고, 안 썼다고.”

16553292431395.jpg“각자 다른 방을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16553292431354.jpg“…….”

카를은 인상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리오넬 발드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자의 존재가 거슬린다. 황후는 눈을 뜨자마자 그자를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그자는 그 명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카를 역시 황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달려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시종은 황제의 흉흉한 기색을 눈치채고 매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16553292431395.jpg“그리고 이틀 전, 니아바라 강 너머의 슬럼에 다녀오셨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를이 걸음을 멈췄다.

16553292431354.jpg“슬럼?”

16553292431395.jpg“예. 그곳에서 두 시간가량 머무르셨던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를 안내했던 소년에게 접근하여 알아본 바로, 황후 폐하께서는 슬럼의 집들을 방문하여 내부를 살피셨다 합니다.”

16553292431354.jpg“누구와 함께 갔다 왔다 하던가?”

16553292431395.jpg“리오넬 발드르 경과 함께였다고 합니다.”

황제는 침묵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키가 훌쩍 큰 그가 만들어 낸 그림자에서 시종은 숨을 죽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윽고 황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종은 저도 모르게 깊고 긴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 * * 황제가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디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그건 습관 같은 것이었다.

16553292448202.jpg“오셨어요, 폐하?”

살가운 인사였으나 카를은 그녀를 성의 없는 시선으로 한 번 응시했을 뿐, 말없이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버렸다. 가슴에 바람이 든 것처럼 차게 술렁였다. 디안은 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몸을 돌렸다.

16553292431354.jpg“할 이야기가 있는가?”

황제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이리저리 확인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시선과 손길은 여전히 서류에 둔 채였다. 나는 너와 할 이야기가 당장 없다는 신호였기에 디안은 초조해졌다. 평소였다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췄을 것이다. 알겠노라고, 나중에 찾아 달라고 애교를 부려 그의 시선을 잡아끈 뒤에 미련없는 태도로 방을 나섰을 것이다. 그때였다.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쪽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누군가가 황제의 집무실로 쏙 들어왔다. 디안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닿았다. 흔들리는 금발이 햇살을 머금고 반짝인다. 말갛고 단정한 옆모습, 봄바람처럼 나붓한 움직임. 디안은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정지한 가운데 오직 그 시녀와 디안. 단 두 사람만이 있는 듯했다. 사뿐사뿐하게 움직여 황제의 책상으로 다가간 시녀가 곳곳에 쌓여 있는 서류를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춤을 추듯 서류 위를 날아다닌다. 고개를 기울이며 조용히 서류를 확인하는 눈동자는……. 옅은 하늘빛이다. 일전 황제의 방에서 나오던 그 시녀다. 아아…….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발아래로 쏟아져 버린 듯한 충격이 디안을 강타했다. 삽시간에 축축해지는 손바닥, 등허리를 훑고 지나가는 오싹한 소름. 디안은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언제나 등 뒤에 달라붙어 그녀의 밤을 괴롭게 만들던 불안감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황후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불안보다 더 큰 것이었다.  

16553292431361.jpg‘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스물아홉보다 어린 여성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오랜 시간 황궁을 지켜 오며 숱한 장면을 목격한 관록의 총관리인은 무엇을 내다보았을까? 디안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여린 봄을 닮은 시녀가 서류를 정리하여 한 아름 안아 들더니 황제를 응시했다. 그러자 황제도 그녀를 본다.

16553292431354.jpg“수고했다.”

어딘지 다정한 것 같다. 다정하게 들린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린 시녀가 몸을 돌려 다람쥐처럼 통통거리듯 싱그러운 몸짓으로 황제의 집무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디안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달칵, 문이 닫히고서야 디안은 참았던 숨을 떨며 내쉬었다.

16553292431354.jpg“할 말이 없다면 가 봐라, 디안.”

16553292448202.jpg“…….”

디안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의 차가운 눈길이 그녀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 당신은 나를 또다시 지옥으로 처박는구나. 내가 왜 이런지, 내 마음이 어떤지 당신은 지금 조금도 궁금하지 않아.

16553292448202.jpg“……어딜 다녀오셨어요?”

16553292431354.jpg“뭐?”

건성으로 서류를 보던 카를이 미간을 찌푸리며 디안을 다시 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흐트러진 모습, 핏발이 선 눈, 굳은 눈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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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292448202.jpg“어딜 다녀오셨어요?”

디안은 우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3292448202.jpg“서류 시종이 바뀌었나 봐요. 이전에 일하던 이는 무슨 일이 있나 보네요?”

16553292431354.jpg“…….”

16553292448202.jpg“방금 나가던 아이. 손이 꼼꼼해 보이던데……. 실은 황후께서 시녀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인사발령을 내 버리셔서 좀 불편해요.”

16553292431354.jpg“디안……?”

16553292448202.jpg“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디안을 한참 응시하더니, 이윽고 낮게 잠긴 목소리로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16553292431354.jpg“그러든지.”

그러든 말든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곁에 서 있던 시종이 그 배려 없는 말에 입술을 말아 물며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제는 최근 서류 시종이 시녀로 바뀐 것조차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에게 있어 사용인들은 사용하는 찻잔이나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시종은 이번엔 디안을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 숨소리, 태도, 말투. 서류를 운반하는 시녀가 디안에게 가면 어떤 꼴을 당할지, 시종은 보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었다.

16553292448202.jpg“감사합니다, 폐하.”

디안이 황제의 방에서 빠져나가고 얼마 후, 다른 이가 교대를 하기 위해 들어오자 시종은 황제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고민하다가 이내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서류 시종이 교체될 그 무렵, 그를 은밀하게 찾아온 사람은 이렇게 일렀었다.  

16553292486757.jpg‘디안 푸아티에가 그 시녀를 보면 틀림없이 본인 소관으로 만들려 할 것이네. 주위를 잘 살폈다가 그런 기색이 있으면 지체 없이 내게 와 알려야 해.’

    * * * 한편, 레녹스는 디안의 부름에 곧장 응했다. 며칠 만에 보는 누이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16553292486762.jpg“왜, 무슨 일 있어?”

불안하게 자리에서 서성이던 디안은 습관적으로 손톱을 뜯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16553292486762.jpg“디안 푸아티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어린 나이에도 침착했던 디안이었다. 덜컥 불안해진 레녹스가 얼른 디안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레녹스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디안이 별안간 그의 팔을 와락 붙잡으며 화를 냈다.

16553292448202.jpg“내가! 시녀들 관리 잘하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16553292486762.jpg“도대체 너 왜 이래?”

16553292448202.jpg“그것 하나 제대로 못 해?!!”

16553292486762.jpg“내가 말했지!! 황후와 한나 긱스가 모든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들이거나 내보내는 것은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모르겠어?”

황제궁의 귀빈용 객실 안. 두 사람의 목소리는 상아궁에서와는 달리 잔뜩 억눌려 있었다. 서로의 팔을 세게 움켜쥐고 으르렁대던 두 사람은 레녹스의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디안은 오라비의 얼굴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탄식하며 마른세수를 한 뒤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윽고 그녀가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3292448202.jpg“……황제 폐하의 서류를 전담하던 시녀가 내 소관으로 들어올 거야. 그럼 알아서 처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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