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희한한 놈을 다 보겠네 (44/127)

44화. 희한한 놈을 다 보겠네2021.08.31.

16553292576879.jpg“너 미쳤어?”

1655329257689.jpg“안 미쳤어.”

16553292576879.jpg“황제궁 시녀야, 자칫…….”

1655329257689.jpg“누가 죽이래? 적당히 입막음할 돈을 쥐여 주고 수도를 떠나라고 해. 그럼 되잖아?”

16553292576879.jpg“하…….”

레녹스는 긴 한숨을 몰아쉰 다음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16553292576879.jpg“신경 쓰지 마. 황제께서 그 시녀를 침실로 부를 기색이 있으면 조치할 테니…….”

1655329257689.jpg“안 돼, 그럼 늦어!! 그 전에 손을 쓰란 말이야!”

디안은 도저히 참고 넘길 수가 없었다. 가슴이 술렁여서 잠시도 그냥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강박마저 느껴지는 그 집착적인 태도에 레녹스는 질린 얼굴로 돌아섰다.

16553292576879.jpg“그래. 일단 알겠어.”

1655329257689.jpg“일단이 아니라, 꼭 제대로 하라고. 알겠어?”

귀빈용 객실을 나서는 그의 뒤로 디안의 목소리가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 * * 그러나 레녹스는 디안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1655329257689.jpg“뭐? 없어져?”

16553292598215.jpg“네, 궁주님. 보아하니 짐을 싸서 도망간 것 같아요.”

로레인은 여전히 디안을 ‘궁주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로레인의 보고를 듣던 디안은 묘한 기분에 고개를 기울였다.

1655329257689.jpg“……갑자기?”

16553292598215.jpg“네. 아무래도 겁을 먹은 것은 아닐지요?”

1655329257689.jpg“겁?”

로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디안 푸아티에가 제대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시녀를 제 직속으로 삼고자 했다는 말에 황제궁의 많은 사용인이 우려를 표했다. 어떤 이는 ‘곧 피를 보겠군.’ 하며 극단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니 상황을 직감한 시녀가 줄행랑을 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디안 역시도 그럴듯한 이야기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겁을 먹었을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16553292598215.jpg“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래도 어찌 되었든 궁주님께서 원하시던 일 아니에요?”

로레인이 그런 디안을 살살 달랬다.

1655329257689.jpg“……그래. 그렇지.”

16553292598215.jpg“편안하게 생각하세요. 몸이 편안하셔야 아기님이 금방 온대요.”

로레인은 눈치껏 디안의 기분을 맞췄고, 잠시 후 디안은 긴 한숨을 몰아쉬며 그 시녀 생각을 조금씩 밀어 버렸다. * * * 그날,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땅을 적실 무렵. 돈을 두둑하게 챙긴 금발의 시녀는 더 이상 시녀복 차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깊게 후드를 눌러쓰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모습을 로브를 뒤집어써 온몸을 감춘 두 사람이 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16553292598215.jpg“혹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알려 드릴까요?”

한참이나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둘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나머지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16553292598248.jpg“그리하게. 어차피 또 저런 시녀가 들어올 테니.”

16553292598215.jpg“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윽고 몸을 돌려 황궁 내부로 들어갔다.  

16553292622364.jpg

  * * * 예고 없이 쓰러져 며칠을 앓던 황후는, 쓰러졌던 그 날처럼 예고 없이 일어났다. 이른 새벽 황후의 방에 들어선 긱스 부인은 침대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는 황후를 보고 놀라 달려왔다.

16553292622369.jpg“정신이 드십니까?”

느릿하게 드러나는 금빛 눈동자는 아직 몽롱한 빛을 띠고 있다.

16553292622376.jpg“아…….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소?”

16553292622369.jpg“이틀 내리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아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92622369.jpg“머리카락을 좀 정리해 드릴까요?”

안 그래도 땀에 젖어 이리저리 엉겨 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거슬렸던 터라 아델은 긱스 부인의 섬세한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92622376.jpg“나도 하려 했는데…… 영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16553292622369.jpg“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16553292622376.jpg“고맙소.”

16553292622369.jpg“조금만 돌아앉아 보시겠어요?”

아델이 몸을 일으켜 돌아앉자 긱스 부인은 빗으로 황후의 검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려 정리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느슨하게 땋아 내리는 긱스 부인에게 황후가 문득 물었다.

16553292622376.jpg“혹시 내가 중간에 깨어나 리오넬 발드르를 불렀었소?”

16553292622369.jpg“기억하십니까?”

16553292622376.jpg“……꿈인가 했는데, 아니었군.”

16553292622369.jpg“그사이 황제 폐하께서도 오셨었습니다.”

황제라는 말에 아델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굳혔다. 그 사실을 모르는 긱스 부인은 땋은 머리카락 끝을 끈으로 동여매며 계속 말을 이었다.

16553292622369.jpg“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주치의들을 불러 시간마다 황후 폐하의 상황을 묻고 계십니다.”

16553292622376.jpg“…….”

긱스 부인은 곱게 땋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내려 주며 침묵하는 황후를 살폈다. 다시 몸을 돌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는 황후의 얼굴엔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긱스 부인은 황제 이야기를 더 꺼내려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16553292622369.jpg“가벼운 수프를 좀 드시겠습니까?”

무표정하게 침묵하던 황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92622369.jpg“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긱스 부인이 나가자 아델은 몽롱한 시간을 천천히 되짚었다. 리오넬에게 했던 부탁, 되었다며 부탁을 철회하던 제 행동을 천천히 되짚던 아델의 눈이 어느 순간 가늘게 변했다.  

16553292642592.jpg‘……나는 아주 넓은 울타리를 칠 거야. 그대는 내 거야.’

  이것은 꿈인가? 잘 모르겠다. 아델은 긴 한숨을 내쉬며 거칠어진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 * * 황후가 깨어나자 주치의들은 신이 났다. 그간 집요하리만치 자주 그들을 불러 황후의 상태를 묻고, 그들이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 추궁하던 황제에게 어지간히도 시달렸기 때문이다. 환자의 병환을 고치는 것이 어디 간단히 되는 일인가?! 좀 진득하게 기다리라 소리를 질러 주고 싶지만, 상대가 황제이니만큼 주치의들은 황후에게 간절하게 빌었다.  

16553292598215.jpg‘제발 눈을 번쩍 뜨시어 불쌍한 저희를 좀 살려 주세요. 왜 갑자기 정신을 잃으신 거예요.’

   그랬던 황후가 깨어나셨으니 주치의들은 반쯤 울먹이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16553292598215.jpg‘우린 이제 됐어!’

주치의들은 곧장 황제에게 달려가 황후께서 드디어 깨어나셨다며 역시 어제저녁에 처방한 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고 있던 황제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마침 황제의 집무실로 오고 있던 디안은 그 장면을 목격했다. 디안을 보지 못한 황제가 어찌나 빠르게 가 버리는지 디안은 그를 부를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벌써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있었다. 가슴이 술렁이고 자꾸만 식은땀이 나서 누워도 잠들 수가 없고, 허기가 진 줄도 몰랐다. 처음엔 그 원인이 금발의 시녀인 것 같았는데,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디안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황제가 저리 다급히 가는 모습을 보니 그저 술렁이기만 하던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비틀대자 옆에 있던 로레인이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부축했다.

16553292598215.jpg“괜찮으세요?”

1655329257689.jpg“……어딜 저렇게 다급히 가시는 거야?”

그때 황제의 집무실에서 몇 사람이 몰려나왔다. 황궁 주치의들이었다. 황후가 갑자기 쓰러져 의식이 없다는 소식은 디안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황후를 치료하던 주치의들이 황제를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다는 말은……. 디안은 로레인의 손을 뿌리치고 그들에게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디안의 등장에 한 사람이 조금 놀라며 인사를 했으나, 그녀는 이를 무시하고 다짜고짜 물었다.

1655329257689.jpg“황후께서 깨어나셨는가?”

16553292598215.jpg“아, 예. 그렇습니다.”

1655329257689.jpg“막 그 소식을 전했고?”

16553292598215.jpg“네.”

주저 없이 나오는 답에 별안간 온 세상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이명이 들리며 땅이 뒤흔들리는 감각에 디안은 주저앉을 뻔했다. 로레인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디안은 숨을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런데 순간, 가슴이 별안간 메스껍더니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1655329257689.jpg“우욱, 우욱.”

16553292598215.jpg“궁주님!”

로레인이 놀란 목소리로 디안을 부르며 그녀의 몸을 편안하게 만들려 애썼으나, 디안의 헛구역질은 멈추질 않았다.

1655329257689.jpg“우욱, 웁.”

16553292598215.jpg“뭘 보고만 계세요? 어서요!!”

로레인의 날카로운 말에 주치의들이 당황하여 디안을 부축했다. 그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디안을 데리고 서둘러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 * * 아델은 긱스 부인이 가져온 묽은 수프를 먹은 뒤 가볍게 몸을 씻었다. 노부인은 황후의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말린 뒤 다시 한쪽으로 느슨하게 땋아 주었다. 일어날까 했으나 몸이 물 먹은 듯 나른해서 아델은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대기 중인 시녀들의 존재마저 귀찮아서 모두 내보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그저 이대로 조금 더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델은 원치 않는 손님이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긱스 부인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16553292622369.jpg“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16553292622376.jpg“이런, 하…….”

아델은 나직하게 탄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긱스 부인은 분명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했다는 그녀의 의사를 황제에게 전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16553292622369.jpg“황후 폐하. 죄송하지만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아델은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긱스 부인이 안타깝다는 듯 다가와 속삭였다.

16553292622369.jpg“황제 폐하께서 만나 뵙길 원하십니다.”

16553292622376.jpg“내 꼴을 좀 보시오. 내가 지금 누굴 만날 상황이오?”

16553292622369.jpg“죄송합니다. 잠드셨다고 했는데…… 그랬더니 잠드신 모습이라도 보겠다 하셔서…….”

16553292681593.jpg

  아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비딱하게 벌어지는 입과 한쪽으로 치솟은 눈꼬리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16553292622376.jpg‘……미친 거야?’

16553292622376.jpg“내 잠든 모습을 보겠다 했다고?”

16553292622369.jpg“예.”

긱스 부인마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아델에게 조언을 건넸다.

16553292622369.jpg“계속 황제 폐하를 밖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침대에 앉아서 맞이하셔도 되니 일단은…….”

아델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16553292622376.jpg“됐소. 뭔가 걸칠 것을 가져오시오.”

황후는 지금까지 누워 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단호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현기증이 밀려들었지만, 아델은 내색하지 않았다. 긱스 부인이 서둘러 로브를 가져와 건넨 뒤 밖으로 나가자 황후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침실 한편에 마련된 접대용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미친, 별 희한한 놈을 다 보겠네.’라고 중얼거리면서.  

16553292703753.jpg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