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독을 품은 꽃2021.09.04.
한편 문밖에 서 있던 카를은 누군가 양 끝을 잡고 길게 늘인 것 같은 시간을 하나씩 헤아리고 있었다. 자잘하게 깨진 시간을 세고 있던 그는 문 너머가 너무 조용하자 고개를 기울였다.
‘잠들었다더니 깨우는 것인가? 그런 것이라면 필요 없는데.’
카를은 망설임 없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가 벌컥 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안에서 문이 먼저 열렸다. 막 문을 열던 긱스 부인이 가까이에 서 있는 황제의 모습에 눈을 크게 치떴다가 아주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정중히 옆으로 물러섰다.
“들어오십시오.”
카를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부인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는 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따뜻한 습기 사이로 봄꽃 향 한 줄기가 섞여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냄새가 그를 자꾸만 자극했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길쭉한 복도를 걷다 끝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순간, 들이치는 햇살을 등진 황후가 그를 맞이했다. 등 뒤로 쏟아지는 눈 부신 햇살이, 마치 배경처럼 느껴져서 카를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아델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카를이 답했다.
“몸은 좀 어떻소?”
‘딱 보면 모르겠니? 더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지 않니?’
아델은 속으로 빈정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델의 맞은편에 앉은 카를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원래도 갸름하던 얼굴이 더 갸름해지니 황금색 눈동자가 더 크게 보였다. 한쪽으로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황후는 앓다 깨어난 사람 특유의 창백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집요한 그의 시선에 아델은 당혹스러웠다.
‘하……. 진짜 적응 안 되네.’
아델은 지금 이자가 황제가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태세를 전환했을까? 아델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햇살에 싱그럽게 반짝였다.
‘겉은 멀쩡한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때, 카를이 말을 이었다.
“고트로프에 있을 때도 이렇게 간혹 의식을 잃었는가?”
“아뇨.”
“그런데 왜 갑자기……. 의원들도 원인은 모르겠다 했소. 그들에게 주기적으로 진료를 받으시오.”
“알겠어요. 그리하죠.”
“…….”
“…….”
침묵이 찾아왔다. 아델은 도대체 황제의 의중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그를 살펴보았고, 카를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늘어졌던 카를의 시간이 정지했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햇살에 반짝이고, 황금빛 두 눈은 그 햇살을 담아낸 것 같다. 그녀가 쓰러지기 전, 아주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눈동자엔 얇은 실금이 자잘하게 박혀 있었지. 황제는 홀린 것처럼 아델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아……. 참 예쁘군. ……그리고 그 사람과 달라.’
“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
카를은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반사적으로 아델이 미간을 굳혔으나,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어쩐지 노래 같았다.
‘그래, 내가 그대와 결혼했지. 그대는 나의 황후지.’
결혼식장에서 처음 본 그날, 아델라이드는 카를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지극히 황후다운 고아한 자태, 좌중을 휘어잡은 기백. 그것이 짓밟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아니, 착각이라기보다는 미묘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저 짓밟아 누르고만 싶었던 것이었다면,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델라이드의 발에 입을 먼저 맞추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리라. 비로소 제 마음을 깨달은 카를이 진하게 웃었다. 눈을 접고 웃는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마치 독을 품은 꽃처럼.
“……폐하?”
감정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아델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찌푸리자, 카를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가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쉬어야 할 사람을 붙잡고 오래 있으면 안 되지. 나는 그저 깨어난 것이 보고 싶어 왔던 것이오.”
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 먹먹한 어둠을 찢고 나타난 금빛 달. 공허하고 어두운 망망대해를 채울 빛. 카를의 깊고 검은 바다가 잘게 흔들리더니 뭔가가 불쑥, 수면을 가르고 고개를 내밀었다.
* * *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정상은 아니다…….”
황제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아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결혼식부터 시작하여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휙휙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깃펜이 어쩌고 화병이 어쩌고를 남발하더니, 기어이 그녀를 허울뿐인 황후로 만들어 버린 황제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했는가?
“그게 큰 한 방이 아니었나?”
황제가 그 일에 대해 화를 내기는 했다. 득달같이 달려와 잔뜩 으르렁댔지. 하지만 냉정히 생각건대 타격을 입은 건 디안 푸아티에이지 카를 울리히가 아니었다.
“돌아왔던 날…….”
황궁으로 돌아왔던 날을 되돌이키던 아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래. 그날부터 이상했어.”
으르렁대더니 별안간 눈을 휘며 웃었지. 뭘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한 것일까?
‘……나는 아주 넓은 울타리를 칠 거야. ……그대는 내 거야.’
불현듯 떠오르는 목소리가 꿈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긱스 부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부인.”
“예, 황후 폐하.”
“내가 의식이 없을 때 황제께서 오셨다고 했는데, 그때 말이오. 폐하께서 내게 혹시 무슨 말을 했었소?”
황후의 질문에 긱스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조금 물러나 있었던지라……. 왜 그러십니까?”
“……아니오.”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런 황후를 응시하던 긱스 부인이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폐하께서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
황후가 답이 없자 긱스 부인은 말을 더 건네는 대신 차를 우렸다. 그리고 심신 안정에 좋다는 향을 곳곳에 피우고 따뜻하게 우린 허브차 한 잔을 내어 준 뒤 물러갔다. 상쾌한 향이 폐부로 스며들자 무겁던 머리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향을 다시 한번 깊게 들이마신 아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살려 주십시오, 황후 폐하!’
백발 성성한 백작의 애끓는 목소리. 그 지옥을 몰랐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그 지옥을 부술 힘이 없었다면 편했을까. 아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감았던 눈을 번쩍 뜬 아델은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첫째. 황제의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긱스 부인의 말처럼 그것이 당장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결코 장기적으로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바뀐 마음이 언제 이유 없이 도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둘째. 그녀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앞서 생각했던 이유로 황제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힘보단 그녀 자신에게서 기인한 힘이 필요하다. 결론. 그러니 황제의 변화와는 별개로, 그녀는 하고자 했던 일을 하는 것이 옳다. 발드르 공가에서의 첫날. 공작은 서고에서 황후에게 마법사로 공인받을 것을 제안했다.
‘마법사로 공인을 받으시면 황후 폐하께도 마법사로서 발언권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중신회의에 참석하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현재 탑에 관한 모든 발언권은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 푸아티에가 독점하고 있어서,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세력이 없는 아델의 입장에서도 마법사로서 입지를 다져 힘을 얻는 쪽이 유리했기 때문에 황후는 공작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투명한 붉은 돌에 피처럼 얼룩진 지도. 부모의 죽음을 세파에 찌든 어조로 논하던 소녀와 착취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소년. 아델은 확신했다. 에흐몬트가 이대로 썩어 간다면, 분명 카를 울리히 대에서 망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건 간에, 분명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무슨 죄야.”
아델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넓은 보폭으로 방을 나섰다. 해야 할 일은 빨리할수록 좋은 법. 나른하여 무뎌졌던 정신이 어느새 날카롭게 벼려졌다. * * * 발 없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황제가 황후궁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녀의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시종, 시녀들의 입을 통해 마른 숲에 들불이 번지듯 에흐몬트 사교계에 들끓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디안 푸아티에와 리오넬 발드르에게 향했다. 성격 급한 몇몇 사람들은 벌써 디안 푸아티에가 언제 퇴궁을 하게 될지, 리오넬 발드르가 언제 보좌관 자리를 그만두게 될지를 떠들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벌써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고 황궁 관저 숙소에서 머무는 동생을 직접 찾아왔다.
“형님.”
관저에서 집무를 보던 리오넬은 갑작스러운 테세우스의 방문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벌써 며칠째 집에도 오지 않는 거냐?”
“할 일이 왜 없겠습니까? 앉으시죠.”
리오넬이 자리를 안내하며 차를 내리려 하자 테세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 차는 됐어.”
그에 리오넬은 준비하던 손을 내리고 테세우스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테세우스는 말없이 한참이나 동생의 얼굴을 응시했다. 형의 침묵과 눈빛에 리오넬은 그가 무슨 이유로 왔는지를 곧장 파악했다.
“마이클이 다녀갔습니다.”
“…….”
“보좌관직을 그만둘 시점을 찾으라 조언하더군요.”
테세우스는 신중한 얼굴로 리오넬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차피 보좌관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엔 그만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시기의 차이일 뿐이지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황후 폐하께서도 저를 통해 얻으려는 것이 있으셨으니 그만둘 시점을 지금 당장 찾는 것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길게 나왔다. 마치 미리 생각하고 준비해 둔 것처럼. 테세우스는 동생의 말을 되뇌다가 중얼거렸다.
“황후께서 중신회의에 참석하시어 탑에 대한 독단적인 논의를 바꿔 주시면 좋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황후는 필히 황제와 반목하게 될 것이다. 테세우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참으로 이기적이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당분간은 이대로 지속되길 바랐다. 그럴 것이라 예상했기에 리오넬의 보좌관직 제안을 허락한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황제가 공가의 개입을 미리 염려하여 황후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테세우스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오넬.”
그가 결심이 깃든 목소리로 호명하자 리오넬은 일부러 피식 웃었다.
“형님.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
“걱정 마십시오. 예민하게 살펴 처신하겠습니다.”
형제는 서로를 단단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테세우스는 저와 똑같은 색채의 눈동자를 애정과 신뢰 어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마찬가지로 피식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셨다.”
리오넬은 테세우스와 함께 일어나다가 그 말에 멈칫했다. 얼어붙어 저도 모르게 숨을 참는 리오넬의 어깨를 테세우스가 툭툭 두드렸다.
“잘 살펴라.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 땐 지체하지 말고 발을 빼. 그런 것은 빠를수록 좋으니까 내게 묻지 않아도 돼.”
테세우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달칵하고 문이 닫히고서야 리오넬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가을볕이 그의 등을 끌어안았으나 오한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서늘하게 차가운 것이 등골을 타고 뱀처럼 느릿하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것은 그의 본능이 당장 발을 빼라며 경종을 울리는 신호였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었다.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나와. 그러나 리오넬은 빠져나오기는커녕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 * * 묘한 황궁 분위기를 레녹스 푸아티에도 알아챘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황제가 또 어김없이 황후궁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끝내 디안이 있는 황제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디안의 방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미묘하게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냐?”
레녹스가 대기 중이던 시녀를 붙잡고 묻자 시녀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답했다.
“푸아티에 백작 영애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주치의들이 진료를 보고 있습니다.”
“디안이 몸이 좋지 않다고?”
“예.”
레녹스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바보 같은 것이 속이 썩어 결국 탈이 났나 보라며 혀를 찼다.
“문을 열어라.”
“아……. 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녀는 난색을 표하더니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 누가 볼 새라 얼른 닫아 버렸다. 마치 안의 상황을 바깥에서 알면 안 된다는 듯한 인상에 레녹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레녹스의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 시녀가 문을 빼꼼하게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막 문을 두드리려던 그는 들어 올린 손을 도로 내리며 시녀가 열어 주는 문틈으로 불쑥 들어갔다. 레녹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레 시녀를 타박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기에 문을 이렇게 열고 그러느냐?!”
그때였다.
“오라버니!”
들려오는 목소리가 묘하게 밝았다. 레녹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이 상황에 저런 목소리라니? 디안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옆엔 여성 주치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목소리처럼 디안의 얼굴이 해사했다. 분명 날이 선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묘한 위화감에 레녹스는 멍하니 디안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는 마치, 마치……. 그래, 감격한 듯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