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내가 보좌관을 참 잘들였어 (48/127)

48화. 내가 보좌관을 참 잘들였어2021.09.14.

데스포네 공작은 먼 길 떠나는 자식을 배웅하듯 아델을 배웅했고, 아델도 화답하듯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우아하게 웃으며 몸을 돌리자마자 부드럽게 휘어졌던 금빛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한 걸음을 내딛자 호선을 그렸던 입꼬리도 스르르 내려왔다. 아델은 데스포네 공작을 마주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데스포네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면에 가득했던 인자한 미소는 아델이 몸을 돌린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시리게 얼어붙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공작은 휙 몸을 돌려 긴 백금발을 휘날리며 관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후라는 패를 쓸지 말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공작이 관저 내부로 사라진 뒤, 성큼성큼 걷던 아델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관저를 바라보았다. 공작은 보이지 않고 몇몇 마법사들만 남아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델은 그중 유난히 머리카락이 붉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도 황후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묵례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관저를 응시하던 아델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다시 몸을 돌렸다. 아주 잠깐 머물렀는데도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비열하게 웃으며 탑의 주인이 되겠느냐 묻던 공작의 얼굴이 떠오르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닌 생리적인 혐오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 제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서슴없이 행할 수 있는 이기심. 아델은 그런 것에 본능적인 혐오를 느꼈다.

16553293403602.jpg“황후 폐하,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잰걸음으로 따라오던 시녀가 창백한 아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16553293403607.jpg“괜찮아. 어서 가자.”

시녀의 걱정을 뒤로하고 아델은 걷는 속도를 더 빨리했다.

16553293403602.jpg‘긱스 부인께서 보시면 난리 나겠어. 그렇게 가지 마시라 말렸는데.’

시녀가 점점 창백해지는 황후의 얼굴을 살피며 얼른 뒤를 따를 때였다.

16553293403614.jpg“황후 폐하.”

갑자기 들려오는 저음의 목소리에 시녀도, 앞서가던 황후도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예상 밖의 만남에 황후가 반가운 듯 입을 열었다.

16553293403607.jpg“리오넬.”

  * * * 황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자꾸만 리오넬을 흔들었다. 감정에 치여 미칠 것만 같았다. 리오넬은 거세게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애를 썼지만, 감정이 잠잠해지기는커녕 도리어 그날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황후의 침대에 걸터앉아 이마를 닦아 주던 황제의 모습과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자기 자신의 진득한 마음. 리오넬은 참다못해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소슬하게 품을 파고들었으나, 내리쬐는 햇볕은 아직 따뜻했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따뜻하고 서늘한 계절이 뺨을 스치자 소란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그는 문득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멈춰 섰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리오넬은 허탈하게 웃으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손 아래 가려진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16553293403614.jpg“미쳤구나.”

제 목을 조를 올가미에 스스로 고개를 들이민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돌아가자, 중얼거리며 몸을 돌릴 무렵이었다.

16553293403602.jpg“황후 폐하. 몸이 좋지 않으세요?”

16553293403607.jpg“괜찮아. 어서 가자.”

귀를 스치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몸을 돌리던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놀랍게도 지금까지 소란하던 생각이 썰물처럼 밀려가 버렸다. 리오넬은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눈으로 그녀를 좇았다. 황후가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자, 눈처럼 하얀 옆모습이 드러났다. 무표정한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하고, 다문 입술도 핏기가 없었다.

16553293403614.jpg“황후 폐하.”

그녀를 부른 것은 그의 이성이 아니었다. * * * 아델은 그의 등 뒤로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16553293403607.jpg“리오넬.”

리오넬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쏟아지는 햇살이 그의 넓은 어깨 뒤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그가 그녀 앞에 서자, 리오넬의 그림자가 아델을 삼켰다. 아델의 안색을 살피던 그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발견하고 미간을 굳혔다.

16553293403614.jpg“아직 회복이 덜 되신 것 같은데 어서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16553293403607.jpg“그렇지 않아도 그러던 참이었어.”

동그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것은 분명 식은땀일 터였다. 리오넬은 재빨리 황후궁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빨리 걸어도 5분은 더 가야 하는 거리였다. 식은땀을 흘린 채 걷는다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녀를 돌아보았으나 황후가 덮을 만한 것을 들고 있지 않았다. 리오넬은 망설임 없이 입고 있던 정복 재킷을 벗었다.

16553293403607.jpg“……뭐 해?”

아델이 갑작스럽게 재킷을 벗는 그를 향해 놀란 듯 물었다.

16553293403614.jpg“식은땀을 흘린 상태로 찬 바람을 쐬시면 틀림없이 감기까지 걸리실 겁니다.”

16553293403607.jpg“그래서 그걸 입으라고?”

16553293403614.jpg“궁까지 가시는 동안만 걸치고 계십시오.”

리오넬이 담담한 얼굴로 말하자 아델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오넬은 문득 이름을 부르고 말을 낮출 것이라 속삭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시녀에게 정복을 내밀자,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던 시녀가 재빨리 그것을 받아 아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황후는 확실히 뭐라도 걸쳐야 할 것처럼 보였으므로. 크고 묵직한 정복이 어깨를 감싸자, 재킷에 묻어 있던 그의 체온이 아델을 휘감았다. 마치 누군가가 등 뒤에서 끌어안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델은 새삼 리오넬의 체격이 참 크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도 한참이나 남은 어깨 품이며, 허벅지까지 덮이는 길이에 아델은 괜히 눈만 깜빡였다.

16553293403602.jpg“어서 가세요, 황후 폐하.”

가만히 멈춰 있는 황후를 시녀가 채근했다. 그녀의 채근에 아델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보폭을 맞춰 리오넬도 함께 걸었다. 아델은 괜히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재킷 아래 받쳐 입는 셔츠에 햇살이 비쳐들자 단단한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쳤다.

16553293428199.jpg

16553293403607.jpg“안 추워?”

16553293403614.jpg“괜찮습니다.”

청명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리오넬은 가만히 바람이 부는 방향을 응시하다가 그곳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그전까지 햇살이 내리쬐는 방향에 서 있던 터라, 아델은 온전히 햇볕을 받게 되었다. 아델은 묵묵히 바람을 막아선 리오넬을 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16553293403607.jpg“하늘에서 떨어지는 나를 향해 팔을 벌리고, 몸으로 바람을 막아 주는 사람은 고국과 에흐몬트를 통틀어 그대가 유일하다. 내가 보좌관을 참 잘 들였어.”

그 말에 리오넬이 쑥스러운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따뜻한 재킷과 햇볕, 든든한 바람막이까지 갖추자 오슬오슬 떨리던 몸이 점차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델의 미간도 어느새 부드럽게 풀렸다.

16553293403607.jpg“그날, 이상한 부탁을 해서 미안했어. 고트로프에 있는 이들을 데려오라던 부탁 말이야.”

16553293403614.jpg“……사람을 보낼까요?”

죽을 것 같아 부르라 하셨으니, 그녀가 허락만 하면 리오넬은 고트로프로 사람을 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델의 얼굴을 응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침묵하며 길을 걷던 아델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16553293403607.jpg“그럴 것 없어.”

16553293403614.jpg“…….”

16553293403607.jpg“괜찮아.”

16553293403614.jpg“…….”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청명하게 맑은 가을 한복판. 아델은 리오넬의 온기를 햇살 삼아 그저 걸었고, 제 온기를 나눠 준 리오넬은 아델의 그림자를 잡고 걸었다. 아델의 그림자로 얼룩진 손을 내려다보던 리오넬이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황후는 하염없이 울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단단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길은 긴 듯 짧았다. 이윽고 궁에 도착한 아델이 가볍게 웃으며 어깨에 걸쳤던 재킷을 돌려주었다.

16553293403607.jpg“고마워. 덕분에 따뜻하게 왔네. 들어와서 다과라도 들고 갈 텐가?”

16553293403614.jpg“폐하께선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가 보겠습니다.”

충직한 대답에 아델은 쿡쿡 웃으며 몸을 돌렸다. 황급히 달려 나온 긱스 부인이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며 궁 안으로 이끌었다. 리오넬은 아델이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들고 있던 옷을 다시 입었다. 재킷에 남아 있는 따뜻한 체온이 품을 파고들자 그는 가만히 멈춰 서서 그 온기를 더듬었다. 황후 특유의 향기가 묻은 것만 같아서 숨을 크게 들이켠 그는 이내 입을 꾹 말아 물고 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디안의 명령에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향한 로레인은 내심 황제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황제는 허락을 받고 들어오는 로레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16553293452327.jpg“무슨 일이냐?”

목소리 역시 아주 건성이었다. 세간의 소문대로 디안에 대한 황제의 관심과 애정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밉고 싫다기보다는, 그저 무관심해지고 있는 것이리라. 로레인은 슬그머니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16553293403602.jpg“푸아티에 백작 영애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폐하.”

그 말에 카를이 인상을 구겼다.

16553293452327.jpg“그럼 직접 오면 될 것을, 왜 너를 보냈단 말이지?”

16553293403602.jpg“오늘 몸이 좋지 않으셔서 직접 오시는 데 무리가 있어…….”

카를은 감흥 없는 얼굴로 쌓여 있는 서류 한 장을 제 앞으로 가지고 오며 깃펜을 들어 올렸다.

16553293452327.jpg“조금 이따가 간다 전해라.”

16553293403602.jpg“송구하오나 폐하. 백작 영애께서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지금 와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서명하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잉크가 툭 떨어져 서류에 검은 자국을 남겼다.

16553293452327.jpg“지금 당장?”

16553293403602.jpg“예. 송구합니다.”

로레인은 아주 깊게 허리를 숙였다. 카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깃펜을 잉크병에 꽂았다. 그리고 잉크 자국으로 얼룩진 서류를 못마땅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시종에게 넘겼다.

16553293452327.jpg“다시 해 오도록.”

16553293403602.jpg“예, 폐하.”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어차피 같은 궁 안이라 격식을 차릴 것도 없이 그대로 방을 박차고 나섰다. 그 뒤를 로레인이 잰걸음으로 빠르게 쫓았다. 내내 황제의 뒤를 따르던 로레인은 디안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 얼른 앞으로 나오며 직접 문을 두드렸다.

16553293403602.jpg“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방 안에서 아주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레인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을 연 뒤, 한 걸음 물러났다. 카를은 망설임 없이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16553293502257.jpg“폐하.”

꺼질 듯 가녀린 목소리에 카를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목소리가 이제는 성가시게 느껴졌다. 신경 쓰이게 만드는 연약함보다는 차라리 꺾어 버리고 싶은 강인함이 나았다. 카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디안을 바라보다가 갸웃했다.

16553293452327.jpg“…….”

뭘까.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기묘한 위화감에 카를이 멈춰 서자, 디안이 천천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16553293502257.jpg“폐하. 이리 좀 와 보세요.”

그녀의 채근에 카를이 움직였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디안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인 듯 안색이 창백했다.

16553293452327.jpg“몸이 좋지 않다던데, 좀 괜찮은가?”

디안은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카를의 손을 잡았다. 주치의들은 명확한 진단을 미뤘으나, 디안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공식적인 발표는 미루더라도 최소한 카를, 그에겐 알리고 싶었다. 디안은 카를의 손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카를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손과 디안의 배를 바라보았다.

16553293502257.jpg“폐하……. 여기에, 우리의 아이가 있을지 모른대요.”

16553293452327.jpg“…….”

디안은 자신의 배 위에 올려진 황제의 손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16553293502257.jpg‘아가. 네 아버진 제국의 황제란다.’

온몸이 기쁨으로 떨렸다. 투명한 눈물이 차오를 새도 없이 볼을 따라 미끄러졌다. 디안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16553293502257.jpg“제가 근래 들어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이 모두 임신 초기 증상에 해당한다고 해요.”

16553293452327.jpg“…….”

감격하여 말을 잇던 디안은 문득 황제에게서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16553293502257.jpg“……!”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따듯한 눈길로 그녀의 배를 응시하고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황제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놀랍도록 차가운 눈빛과 표정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6553293516643.jpg

16553293516648.jpg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