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디안의 임신 소식2021.09.21.
“우선은 디안 푸아티에가 상아궁 전체를 무기한 임차했다는 소식을 내. 그리고 사람들이 궁금해할 즈음, 그녀의 임신 소문을 내도록. 다만 상아궁 임차금액의 출처가 나라는 것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데스포네 공작의 명에 따라 레녹스는 빛의 속도로 황궁 관리청으로 달려가 상아궁 전체를 디안 푸아티에의 이름으로 임차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깜짝 놀란 담당 직원이 두 번이나 되묻자 레녹스는 잔뜩 성을 내었다. 임차에 필요한 서류를 휘갈겨 넘긴 레녹스는 황후 폐하께 승인을 제대로 받아 놓으라고 엄포를 놓은 뒤 사라졌다. 레녹스의 횡포에 질려 숨어 있던 다른 직원들은 그제야 슬그머니 나와 그가 남기고 간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이 많은 돈을 내고 진짜 임차를 한다고?”
“인제 와서? 굳이?”
황후가 책정해 놓은 상아궁의 총 임차금액은 가히 천문학적으로, 임차를 하지 말라는 소리나 진배없는 규모였다.
“망하고 싶은가?”
누군가 그렇게 물을 만큼 레녹스가 남기고 간 폭풍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 * * 관리청을 나온 레녹스는 그길로 디안에게 달려가 환하게 웃으며 동생을 불렀다.
“디안!”
그런데 어쩐 일인지 디안의 표정이 몇 시간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왜 그래?”
덜컥 겁이 난 레녹스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으나, 디안은 묵묵부답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버럭 화를 내었을 테지만 레녹스는 아기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피곤해요.”
디안은 비참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체력도 없고, 지금은 그저 잠들고 싶었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누워 버렸다. 레녹스는 갑작스러운 누이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얘가 왜 이러지?’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서 있던 로레인을 돌아보았으나, 디안이 말하지 않는데 시녀가 함부로 입을 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얼굴로 디안을 바라보던 레녹스가 크게 숨을 내쉬며 달래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러자 디안이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레녹스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짐 싸. 상아궁으로 돌아가자.”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디안이 몸을 일으켰다.
“……뭐?”
레녹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짐 싸라고. 상아궁으로 돌아가게. 황후가 승인만 하면 돼. 원하면 해 준다며?”
“승인이라면…… 오라버니, 상아궁을 임차하겠다고 했어요?”
잠시나마 황제가 그녀에게 상아궁을 돌려주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기대했던 디안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레녹스를 바라보았다.
“그럼! 네 마음이 편안해야 우리 조카님도 건강하게 태어나지. 상아궁으로 돌아가자. 이 오라비가 궁 전체를 빌렸어!”
자신만만한 레녹스의 말에 디안은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되었다.
“왜? 싫어?”
“몇 달이나 빌릴 건데요? 거기 있다가 돈 떨어지면 다시 나오게요? 사교계가 그 이야기로 들썩거리겠네요. 재밌어서.”
“돈 걱정은 하지 마.”
철없는 오라비의 말에 디안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멍청아! 돈 걱정을 어떻게 안 해?! 황후가 상아궁 한 달 임차금액을 얼마나 비싸게 해 놓은 줄 알아?!”
디안의 타박에 레녹스도 파르르 끓어 올랐다.
‘이게 감히 어디서?!’
“됐고! 가서 황후가 승인하기 전에 그 계약서 회수해요!”
“아, 진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거친 콧김을 뿜어 댔다. 하지만 그는 뱃속 아기를 생각해서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디안을 사납게 노려보며 로레인에게 명령했다.
“너, 잠깐 나가.”
로레인은 깜짝 놀란 눈으로 디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디안은 문을 향해 눈짓했고 로레인은 종종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방에 단둘만 남게 되자 레녹스는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가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데스포네 공작님께서 빌려주시는 거다.”
“……뭐?”
“데스포네 공작님께서 빌려주시는 거라고.”
그의 말에 디안의 표정이 시시각각 얼어붙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벌게진 눈으로 레녹스를 쏘아보았다.
“너 설마 그새 가서 알렸어? 그걸 못 참고?!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녀의 질타에 잠시 머뭇거리던 레녹스는 이내 가슴을 펴며 도리어 윽박질렀다.
“왜 알리지 말라고 하는 거야? 임신한 거 아니야?! 어차피 세상 사람들도 다 알게 될 일인데, 뭐가 어때?! 공작님께서 아주 기뻐하셨다. 아주 좋아하셨어! 상아궁을 돌려줘야겠다고 먼저 말씀하셨다고!!”
“그 뱀같이 교활한 작자한테!! 그 작자는 우리를 이용할 생각만 해. 단물 다 빼먹고 더 빼먹을 것이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릴 인간이라고! 정신 똑바로 차려!!”
“은혜도 모르는 것. 그분 아니었으면 너랑 나는 아직도 시궁창에 있었을 거야.”
화를 내는 디안에게 레녹스가 으르렁거렸다.
“하……. 진짜 은혜 같은 소리 하네.”
디안은 오라비의 맹목적인 신뢰에 깊은 짜증이 치솟았다. 머리통을 장식으로 달고 다닌다고 중얼거리자 레녹스는 디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디안은 늘 그를 멍청하다며 은근히 무시했다. 그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슬럼이나 전전했을 것이. 레녹스는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도 너는 데스포네 공작 전하의 힘이 필요해.”
이어지는 말은 일말의 배려도 없는 잔인한 것이었다.
“네가 낳는 아기는 어차피 사생아일 것 아니야? 그 애가 우리의 구원이 되려면 공작 전하 힘 없이는 어렵지. 똑똑하신 우리 누이께서 그 정도도 모르지는 않잖아?”
디안은 눈을 붉게 물들이며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나가. 꺼지라고.”
악에 받친 목소리에 레녹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짐이나 싸 둬.”
디안은 문을 닫고 나가는 레녹스의 뒤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 * * 한편, 궁으로 돌아온 아델은 슬그머니 긱스 부인의 눈치를 보다가 안도했다. 돌아오면 한동안 잔소리를 들으리라고 내심 각오하고 있었는데, 별말이 없었던 것이다. 중간에 리오넬을 만나 재킷을 빌린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그 재킷을 걸치고 오지 않았다면 잔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몸이 더 안 좋아졌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어깨와 등을 감싸던 따뜻한 온도가 떠올랐다. 그녀를 보호하듯 찬 바람을 막아 주던 넓고 우람한 어깨 역시. 보호라니, 그녀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아델라이드는 누군가를 늘 누군가를 보호하는 이였지,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델은 리오넬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로 기대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그 길을 그와 함께 걸어왔다. 끝이 바래고 있는 나뭇잎들을 지나온 바람이 재킷 사이로 파고들었을 때 훅 치밀던 묵직한 머스크 향이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어쩐지 가슴이 간지러웠다.
“향수를 좋은 걸로 쓰나 보네.”
“네?”
황후의 머리카락을 다듬던 긱스 부인이 되묻자 아델은 황급히 제 생각을 밀어냈다.
“아니오.”
긱스 부인은 황후의 머리카락을 땋아 내렸다. 황후의 머리칼은 직모인 데다가 워낙 부드러워서 꼼꼼하게 땋아도 어느 순간 보면 풀어져 있곤 했다.
“어딜 다녀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데스포네 공을 좀 만나고 왔소.”
“그러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데스포네 공은 왜 후계가 없는 것이오?”
“부인을 세 번이나 바꿔 가며 아이를 가지려 노력하셨으나, 모두 수포가 되었지요.”
“그랬는데도 아이가 없다는 말은…….”
긱스 부인은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았고, 아델도 더 묻지 않았다. 잠시 후 부인은 능숙하게 땋은 머리카락 끝을 끈으로 잘 매듭지은 뒤 물러났다.
“데스포네 공작님을 잘 살피십시오.”
흘러가는 말처럼 가벼운 노부인의 조언에 아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소.”
“푸아티에 남매를 거둬 키운 뒤 지금까지도 후원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긱스 부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제 머릿속의 방대한 인명사전을 아델에게 전달했고, 아델은 그녀의 말을 흡수하듯 머릿속에 기억했다. 물론, 노부인의 주관적인 의견이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으며 말이다. 그때, 시녀가 노크하더니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긱스 부인이 한 발 앞으로 나가며 용건을 묻자 시녀는 들고 있던 한 부의 서류를 내밀었다.
“관리청에서 보낸 서류예요.”
“관리청? 알았다. 너는 나가 보아라.”
시녀가 나가자 긱스 부인은 곧장 서류를 아델에게 건넸다. 황후는 차분하게 서류를 꺼내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긱스 부인은 서류를 읽는 황후의 표정을 살폈다. 이윽고 아델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긱스 부인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요?”
그녀의 물음에 아델은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서류를 바라보았다.
“……상아궁을 임차하겠다고 하는군.”
“예? 디안 푸아티에가 말입니까?”
아델은 깜짝 놀라 되묻는 긱스 부인에게 아예 서류를 내밀었다.
“기한은 미정. 어느 특정 방이 아니라 궁 전체를 이전처럼 사용하고 싶다 하오. 임차금액이 엄청날 텐데?”
긱스 부인은 얼른 서류를 받아 들고 빠르게 읽어 내렸다.
“이 엄청난 금액을 무기한으로…….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델은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사건의 전모를 알아내야 했다. 자연스럽게 황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리오넬이었다. 언제부터일까? 리오넬은 어느새 어려운 일이 닥쳐 막막해질 때마다 아델라이드가 가장 먼저 찾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트로프에 있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러다 정말로 나약하게도 그를 의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델은 상념을 밀어내며 긱스 부인에게 명했다.
“리오넬 경에게 잠시 들러 달라 전하시오. 발드르 공가라면 뭔가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 더불어 서류는 검토하여 회신한다고 말해 두고.”
* * * 보좌관이 된 뒤로, 리오넬은 황후와 관한 정보라면 황궁 내에 떠도는 작은 소문 하나까지도 놓치는 법이 없이 누구보다 빠르게 수집해 왔다. 유능한 보좌관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되뇌었지만, 실은 핑계에 불과했다. 황후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의 온 신경은 황후궁에 닿아 있었으므로. 아델을 황후궁에 모셔다 준 후 관저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디안 푸아티에가 상아궁을 임차했다는 소식이었다. 리오넬은 눈을 번뜩이며 모든 일을 제쳐 둔 채 빠르게 일의 전모를 알아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건의 윤곽이 보이자, 리오넬의 마음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 와중에 아델이 그를 불렀다. 리오넬은 황후궁에 도착하자마자 아델의 안색을 살폈다.
“몸은 좀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일단 앉아.”
리오넬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 아델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려 입을 열었다. 리오넬이 선수를 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리라.
“디안 푸아티에의 상아궁 임차 건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델은 리오넬을 빤히 쳐다보았다. 황후궁에 서류가 전달된 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델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아티에 백작가에서 상아궁 전체를 무기한 임차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어. 몇 달도 아니고, 그 엄청난 돈을 낼 여력이 있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겁니다.”
아델은 더 해 보라는 듯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리오넬은 짧은 시간 동안 얻어 낸 정보를 바탕으로 제가 추론한 것을 설명했다.
“상아궁 임차 소문을 듣자마자 레녹스 푸아티에의 행적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비밀일 것도 없었기에 알아내는 것은 쉬웠다.
“데스포네 공작을 만난 직후 관리청으로 향했더군요. 상아궁 임차금액은 분명 데스포네 공작의 은밀한 후원으로 이뤄질 겁니다. 공작은 아마도 지불한 돈을 다시 돌려받을 속셈일 테고요. 재정청을 장악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
이건 뭐 어디부터 얼마나 썩은 거야?
“그 가설이 맞다면. 왜 굳이 상아궁 임차를, 그것도 몰래 후원하지? 분명 무언가 이득이 있기 때문일 것인데…….”
황후의 중얼거림에 지금까지 유수처럼 상황을 설명하던 리오넬이 침묵했다. 아델은 그의 침묵이 그녀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눈치챘다. 굳은 입매와는 달리 황후를 살피는 검푸른 눈동자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과 호의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황후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던 재킷에 남은 체온만큼이나 따뜻했다.
“디안 푸아티에가 임신했나 보군.”
고작 이까짓 일에 무너질 이유도 없었지만, 인형처럼 매끄러운 황후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번졌다. 어찌 되었든 가뜩이나 좁은 입지가 더 좁아질 일이었으니. 아델은 문득, 이 소식을 전한 이가 리오넬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가 아닌 다른 이에게까지 이렇게 무너진 표정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으십니까.”
집요하게 아델을 살피던 리오넬은 벌건 상처에 굵은 소금을 문지른 것처럼 가슴이 쓰렸다. 줄곧 가슴 한구석을 차지한 채 그를 괴롭히던 그 날의 패배감이 다시 들끓었다. 침대에 누워 앓고 있는 황후의 곁을 차지한 황제 앞에서, 리오넬은 그저 무력하게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 심장이라도 뽑아 바치고 싶은 절절한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 현실적으로 황후는 황제의 여인이었다. 황후가 황제로 인해 괴로워하고 상처받는다 한들, 리오넬이 그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리오넬은 더 이상 아델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편, 아델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이 소식에 무참히 짓밟혀 하루라도 빨리 황제의 아이를 가져야 하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델은 일부러 어깨를 반듯하게 펴며 가볍게 말했다.
“괜찮지 않을 것이 무엇이겠어?”
금세 태연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돌아온 황후가, 완전히 무너진 채 고트로프의 동료들을 찾던 그때보다 더 안타까워 보인다면, 그것은 너무 주제넘은 생각일까? 리오넬이 아델을 바라보며 각자의 감정을 가득 담은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