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나의 후계는 그대의 아이일 것이오2021.09.25.
그때, 일의 전모를 알아보기 위해 궁을 나섰던 긱스 부인이 돌아왔다.
“황후 폐하, 전해 드릴 말이 있습니다.”
보기 드물게 격앙된 모습으로 천천히 숨을 고르는 것이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아델은 긱스 부인을 보며 리오넬과 제 직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디안 푸아티에가 임신했다 하오?”
그 말에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황후는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 * * 데스포네 공작이 낸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사교계에 퍼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디안의 임신에 대해 쑥덕이니 소문에 관심 없는 자들마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와 더불어 디안 푸아티에가 상아궁 전체를 임차했다는 소식도 퍼져 나갔다.
“상아궁 전체를 임차했다고?”
카를은 하던 일을 멈추고 미간을 문질렀다.
“예, 폐하”
잠시 침묵하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종을 바라보았다.
“디안의 임신 소식도 황후궁에 알려졌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카를은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걸칠 것을 가져와라. 황후궁으로 갈 것이다.”
황후궁으로 향하는 카를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황후는 분명 얼음처럼 싸늘한 얼굴로 그를 맞이할 것이다. 화가 났겠지.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며, 궁지에 몰렸으니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그녀를 도울 수 있을까? 리오넬 발드르? 듣자 하니 놈은 황후를 더러운 슬럼으로 안내했다고 했다. 설마 황후가 직접 그곳에 가고 싶다고 했겠는가? 그녀는 그저 보통 백성들의 삶을 보겠다고 했을 것이다. 아델라이드도 지금쯤 알게 되었겠지. 리오넬 발드르, 그 자식은 그녀의 앞길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구나 후계 문제로 입지가 위태로운 황후에게 한낱 보좌관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카를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지금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뿐이다. 아델라이드는 똑똑하니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웃으며 손을 내밀어야지. 더러운 슬럼이 아니라 꽃밭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해 주어야지. 그럼 그녀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델을 시궁창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카를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저 오로지 아델라이드라는 여자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 * * 리오넬을 돌려보낸 뒤, 아델은 천천히 식사를 했다.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운 뒤 씹을 만한 고기를 가져오라 일렀고, 한 접시를 깨끗하게 비워 냈다. 황후가 몸져눕기라도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던 긱스 부인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안도했다. 긱스 부인도 황후가 쓰러진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의식이 없는 사이, 황후는 간간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고트로프어라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음색이 어찌나 애절한지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모신 지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황후는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은 따뜻했고, 나름의 신념도 강했다. 긱스 부인은 진심으로 황후가 이곳에서 잘 지내기를 바랐다.
‘문제는 아무리 봐도 황제 폐하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야…….’
긱스 부인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때, 황후가 식기를 정리하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
깜짝 놀란 긱스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황후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것참. 무슨 대단한 일이 생겼소?”
“황후 폐하.”
“이보시오, 부인.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 침울해 있는 것이오? 부인답지 않소.”
긱스 부인은 그제야 제 표정이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 깨닫고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자고 한 말이 아니니 괘념치 마시오.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요.”
“…….”
아델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기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황제의 곁에 디안 푸아티에가 있는 이상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나는 에흐몬트의 황후요. 단순히 현 황제의 아내, 차기 황제의 어머니라는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란 뜻이오. 그러니 정부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흔들릴 이유는 없소.”
의연한 아델의 말에 긱스 부인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오, 부인.”
황후는 노부인의 어깨를 직접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긱스 부인이 고개를 들자, 가볍게 웃으며 눈을 맞추었다. 황후의 담대한 미소에 긱스 부인의 가슴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긱스 부인이 식기를 마저 정리하는 동안, 아델은 창밖을 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긱스 부인에게 말했던 대로, 디안의 임신 소식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에 새삼 충격받을 것도 없었다. 다만, 이 일로 그간 애써 미뤄 두었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델은, 아직 황제와 밤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황후인 이상, 후계를 생산하는 일을 언제까지고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후의 금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결혼식을 올린 그 날 제대로 첫날밤을 치렀다면. 어떠한 감정도 섞일 새 없이 황후로서 의무를 이행했다면. 아델은 갑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을 열었다. 청명한 공기가 폐부에 스미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앞으로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저 깨끗한 하늘처럼 명확했다.
“너무 명확하게 보여서 미치겠네…….”
허탈한 목소리가 찬 가을 공기 사이로 흩어질 무렵이었다.
“황후!”
아델은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황후궁 정원에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 * * 황후궁을 찾은 카를은 걸음을 멈추고 창가의 황후를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은 깨끗하고 맑았고, 여린 듯 강인해 보였다. 디안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변함없이 고고했다. 과연 황후다운 모습이었다. 그래, 진정한 황후의 모습이다. 디안이 짐작한 대로, 카를은 ‘황후’라는 존재 자체에 극심한 좌절과 분노로 인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안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카를이 얼마나 선대 황후의 뒤를 따라다니며 사랑을 갈구했는지. 카를에게 황후란, 증오인 동시에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황제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한, 무의식에 각인된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어느 날부터인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다가 지금, 완전히 튀어나왔다.
“황후!”
카를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아델을 불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를 본다. 존귀한 금빛 눈동자가 제게 닿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 * *
‘왜 저래?’
황후궁의 응접실, 황제와 마주 앉은 아델은 내심 당황했다. 일부러 잔에 시선을 두며 의미 없이 차만 들이켜는데도 황제의 집요한 눈길은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아델이 작은 한숨과 함께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 보자, 황제도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눈을 휘어 웃었다. 숨 막히도록 매혹적인 미소였으나, 아델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디안의 임신 소식이 퍼진 직후에 갑자기 나타나 말없이 싱글거리는 저 속내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으며 시선을 돌리는 아델에게 황제가 말했다.
“날 좀 봐 주시오.”
아델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쳐다보지 않자 카를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나를 좀 봐 주오.”
아주 다정하고도 달콤한 말투였다. 어깨 너머로 향했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 마지못해 그의 눈동자에 닿자, 카를은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맞춰 왔다. 그의 황후는 살짝 굳은 미간까지 완벽해 보였다.
“황후.”
“말씀하세요.”
“소문을 들었을 것이오.”
“…….”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아델은 도대체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황제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였다. 아델이 굳은 얼굴로 침묵하자 카를은 웃음기를 지우고 덧붙였다.
“그대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소문이니.”
아델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나의 연인이니 관심 두지 마시오.’
황제가 아델에게 그 말을 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개싸움을 한 것밖에 없지 않나.
“무슨 의미입니까?”
카를은 아델의 어조에 깃든 혼란을 예민하게 알아챘다. 그래, 그렇겠지. 황제가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고 말간 낯빛으로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양 속삭였다.
“나의 후계는 그대의 아이일 것이오.”
아델은 한층 아연해졌다. 디안 푸아티에와 대판 싸우기라도 한 걸까? 갑작스레 살가워진 황제의 태세 전환에 감동보단 의심이 들었다. 카를은 아델의 미묘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말이오, 황후. 이제 나와 잘 지내 봅시다.”
그는 아델의 고운 얼굴을 새삼 찬찬히 뜯어보았다. 금과 크리스털로 정성스레 세공된 아치형 테라스 창에서 햇살이 쏟아지고, 이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황후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숨 쉬듯 체득한 예법대로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반듯한 태도, 평생을 사용인들에게 가꿈받은 대리석같이 고운 피부. 발드르 공제는 이렇게 고귀한 여자를 시궁창 같은 슬럼에 데려갔단 말이지? 어쩐지 실소가 터질 것 같아 카를은 손으로 입과 턱을 감싸며 말했다.
“보좌관을 내보내고, 슬럼 같은 곳은 걸음하지 마시오.”
“제가 슬럼을 다녀온 것을 아시는군요?”
“그대는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리오넬 발드르, 그자가 슬럼으로 안내했던 거겠지? 그곳은 보통의 에흐몬트 백성들이 사는 곳이 아니오. 너무 실망치 마시오.”
“슬럼에 가 보셨습니까?”
아델의 질문에 카를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더러운 광경과 고약한 냄새가 떠오른 탓이었다. 혐오가 가득한 황제의 얼굴을 마주한 아델은 침음을 삼키며 단호히 말했다.
“그렇게 두시면 안 됩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수도에서 슬럼을 없앨 것이오.”
그것은 슬럼의 비참한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수도 미관을 해치는 불결한 오물을 치워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폐하께서 없애셔야 할 것은 슬럼이 아니라 탑입니다.”
그 말에 카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은 숨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탑 때문에 고향을 잃은 이들이 갈 곳이 없어 정착한 곳이 슬럼입니다. 그러니 탑을 없애 고향을 돌려주면, 누구도 그렇게 열악한 곳에 머물지 않을 겁니다, 폐하.”
그 순간, 부드럽게 휘어 있던 황제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가며 자색 눈동자가 싸늘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