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뷔에타의 탑2021.10.05.
뾰족하게 날이 선 얼굴로 레녹스가 찾아오자, 디안은 로레인마저 방 밖으로 내보냈다.
“왜 불렀어?”
레녹스의 질문에 디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말했다.
“기회를 봐서 황후를 죽여.”
“뭐?!”
“시끄러워. 소리 낮춰.”
“……황후를 죽이라고?”
“그래.”
“쉬운 일이 아니다.”
“알아. 하지만 최소한 내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진 그 여자가 죽어 줘야 돼.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그 여자가 없어야 한다고.”
디안은 레녹스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황제는 분명 내 아기를 황후에게 줄 거야. 틀림없어.”
“…….”
“데스포네 공작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라면, 내가 아기를 황후에게 뺏길까 봐 황후를 죽이려 한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마. 그렇게 말해 봐야 공작은 전혀 동요하지 않아. 손해 보는 게 전혀 없거든.”
“그럼?”
“그것보다는 차라리 황후와 데스포네 공작 사이를 이간질하는 쪽이 낫겠지. 황후의 존재가 거슬리도록.”
하필 레녹스라니. 멍청한 데다 줏대가 없어서 조금도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그래도 황후를 죽여 달라 부탁할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디안은 숨을 가다듬으며 오라비를 구슬렸다.
“잘 들어요, 오라버니. 데스포네 공작에겐 함부로 황후를 죽이자고 말하면 안 돼요. 고트로프 황녀를 황후로 만들자 주장한 것이 바로 그예요. 허수아비 황후를 만들고 싶어 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쯤 공작도 깨달았을 거예요. 황후가 만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황후를 탐탁지 않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럴까?”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황후를 죽일 타이밍을 잘 보되, 데스포네 공작이 황후를 죽이고 싶어 하도록 살살 구슬려 보라 이거예요.”
“그런데 말이야. 꼭 죽여야 해?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해서…….”
“폐위라도 시키자?”
“그래. 차라리 그편이 낫지 않아?”
디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가 순순히 폐위를 당하겠어? 고트로프는? 자국 황녀가 수모를 겪는데 가만두고 볼까? 아무리 버린 패라 하더라도 황후 자리에서 폐위당하면 가만있지 않을걸?”
황제가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황후의 폐위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차라리 몰래 죽이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일단 알았어.”
“언제 때가 올지 몰라. 죽음을 사주할 만한 암살자를 미리 포섭해 두고, 독도 준비해.”
레녹스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리고 하나 더.”
“?”
“황제궁에 또 금발의 시녀가 들었더군.”
“……또 그 소리야?”
“처리해 줘.”
“…….”
“혹시나 싶어서 계속 기어들어 오는 모양인데, 본보기를 보여야겠어.”
“…….”
“황후를 처리할 거면서 고작 그 정도 시녀 하나 어쩌지 못하는 게 말이 돼? 연습이라 생각하고 처리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디안은 레녹스의 손을 꽉 잡으며 단단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 아기는 남자아이 같아. 이 아기가 다음 황제가 될 거야. 난 황제의 어머니가, 오라버닌 황제의 외숙이 되는 거지. 우린 그렇게 정상에 서는 거야. 알았지?”
레녹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알겠어.”
* * * 다음 날, 데스포네 공작이 아델을 직접 찾아왔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한껏 애달픈 표정을 지으며 아델에게 물었다.
“황후 폐하, 심려가 얼마나 크십니까?”
‘뻔뻔한 것 좀 봐.’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황후 역시 눈을 기울이며 씁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 줘서 감사해요.”
‘표정도 목소리도……. 연기 같은데.’
데스포네 공작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황후를 살폈다. 서로의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고 예리한지 눈을 마주치자 황후와 공작은 동시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델이었다.
“나는 괜찮으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지난번 마법사단을 찾아온 아델이 돌아간 뒤, 데스포네 공작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과연 황후를 마법사로 공인하고 중신회의 참석까지 허락해도 될 것인가? 공인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사실 황후가 홀로 탑을 박살 낸 것을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공인해 주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중신회의 참석이다.
‘안 돼! 절대 안 돼!’
제 딴에는 아닌 척하고 있지만, 보면 볼수록 보통 기가 센 것이 아니었다. 괜히 중신회의에 들였다가 헛소리라도 해 댄다면 수습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탑 제거하는 일도 절대 맡기면 안 되겠어.’
자칫 황후가 공이라도 쌓으면, 발드르 형제 놈들이 얼른 황후도 중신회의에 참석시켜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지 않겠는가? 공작이 이렇게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아델도 예리한 시선으로 공작의 표정을 읽었다. 공작은 양손에 푸아티에 남매와 그녀를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디안의 임신을 계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은밀히 상아궁 임차를 도운 것도 그 일환일 터. 아델은 일부러 모르는 척 선수를 쳤다.
“다음 중신회의는 언제인가요? 아, 그 전에 공인을 받아야 하겠죠? 언제,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답니다.”
공작은 크게 반색하는 척하며 시험 없이 공인을 해 주겠다고 말했다. 황후의 편의를 위해 공작인 제가 유례없이 큰 신경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생색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아델은 괜히 이마를 짚었다.
‘중신회의는 참석할 수 없다고 하기만 해 봐라. 일단 쓰러지는 척이라도 해서 입을 막아 줄 테니.’
숨을 크게 들이켠 공작이 막 본론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려는 때였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긱스 부인과 무장한 기사 한 사람이 차례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심상치 않은 기운에 아델과 공작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기사가 얼굴을 굳히며 다가와 말했다.
“뷔에타 후작령에 탑이 내려왔다는 소식입니다.”
“뷔에타 후작령?”
데스포네 공작이 다급히 되묻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황후 폐하! 그곳엔 제가 직접 가 봐야 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뱅 백작령은 방치했으면서, 뷔에타 후작령은 당장 가 봐야 한다는 기준이 무엇일까? 공작은 벗어 두었던 겉옷을 챙기며 기사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마법사단과 기사단에는 연락했겠지? 어서 가자, 한시가 급하다!”
“죄송하지만 그 전에 황후 폐하께 황제 폐하의 명령을 전달해야 합니다.”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뭐? 무슨 명령?”
기사가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려는 찰나, 황후가 선수를 쳤다.
“출전하라는 명령이겠지?”
“뭐요? 출전?!!”
데스포네 공작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란 기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공작은 들고 있던 겉옷을 내팽개치며 거세게 손을 휘저었다.
“아니! 우리 황후 폐하께서 그런 생지옥으로?! 안 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절대 안…….”
“괜찮다니까요.”
“…….”
“왜, 내가 가면 곤란하십니까?”
“……그렇다기보다는 황후 폐하가 걱정되어 그렇지요. 거긴 지옥입니다. 그러니 부디…….”
“걱정 마시지요.”
“…….”
황후와 공작은 서로를 노려보듯 바라보았지만, 결국 공작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삼키며 획 몸을 돌렸다.
‘머리는 왕관을 쓰려고 달고 다니는 것이냐, 카를 울리히?! 맹수에게 목줄을 걸지는 못할망정 우리 문을 열어 주다니!!’
공작이 성난 모습으로 응접실을 떠나자, 아델도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제 방으로 향했다. 눈앞에서 먹이가 어른거리니, 이제 낚아챌 차례였다. * * * 출병 명령을 받은 군대가 빠르게 모여들었다. 추정 규모 최소 2급에서 최대 1급에 이르는 초대형 탑을 제거하기 위해 황실기사단 1·2군, 스트라이커 1군, 키퍼 1군 전원이 동원되었다. 최정예 집단이 모조리 차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 한 명의 키퍼라도 좋으니 데려가게 해 달라던 칼뱅 백작의 청을 단칼에 거절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출병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어딘가를 계속 힐끔거렸다.
“황후 폐하, 다시 생각하십시오!”
로브 차림의 데스포네 공작과 황후가 대치하고 있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황후의 출전을 막기 위해 온갖 핑계를 대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가는 내내 따로 숙소를 잡기 어렵습니다! 노숙은 해 보셨습니까?”
“그럼요. 저기, 내가 챙긴 짐이 보이시죠?”
아델은 성의 없이 제 뒤를 가리켰다.
“따로 요리할 여유가 없어 가는 내내 건량을 드셔야 합니다! 건량은 드셔 보셨습니까? 어찌나 딱딱한지 이가…….”
“나는 치아가 건강해 딱딱한 것을 잘 먹습니다.”
“마차는 기대도 하지 마십시오!”
“승마를 더 좋아한답니다. 고트로프에서 나고 자랐지 않습니까?”
“…….”
황후가 순진무구해 보이는 얼굴로 따박따박 받아치자, 데스포네 공작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 걱정을 이리 해 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황후의 한마디에 데스포네 공작의 얼굴이 용암을 삼킨 듯 시시각각 붉어졌다. 찌를 듯한 공작의 시선을 모르는 척 몸을 돌리던 아델과 리오넬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