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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레녹스의 은밀한 계획 (55/127)

55화. 레녹스의 은밀한 계획2021.10.09.

황후가 가까이 다가오자 공작과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리오넬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3294835013.jpg“쉬지 않고 달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1655329483502.jpg“지난번에 봐서 알잖아. 괜찮아.”

16553294835025.jpg“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델의 짐을 가지고 온 긱스 부인이 타박하듯 끼어들었다. 깐깐한 노부인의 얼굴에 걱정과 근심이 서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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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하신 분이 마수가 득실거리는 곳으로 직접 가는 것도 염려스럽고, 촉박한 일정으로 강행군을 해야 하는 탓에 시중인 한 명 대동하지 못한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저 고집스러운 표정을 좀 보라지. 황후의 출정을 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보였다. 긱스 부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아델을 이끌고 제가 챙겨 온 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수건 하나가 어디 있는지까지 시시콜콜하게 말해 주다가, 결국 걱정되는 점을 하나하나 나열하기에 이르렀다.

16553294835025.jpg“절대로 끼니를 거르시면 안 됩니다. 주무실 땐 꼭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쥐고 주무세요. 어디가 궁금하셔도 혼자서는 다니시면 안 되고…….”

의외로 황후는 싫은 기색 없이 부인의 잔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었다. 중간중간 장단까지 맞춰 주면서.

1655329483502.jpg“……알겠소. ……걱정 마시오. ……그리하겠소. ……알았소.”

그러자 놀랍게도 부인의 잔소리가 급격히 줄어들더니 금세 사라졌다.

16553294835025.jpg“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때, 출전을 알리는 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은 긱스 부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발 받침대도 없이 훌쩍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황후를 올려다보는 긱스 부인을 향해 눈을 휘며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아델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었다. 긱스 부인은 왜인지 코가 시큰해져서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서둘러 물러났다. 준비를 끝낸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제 위치로 향했다. 리오넬은 기사 무리의 선두에, 아델은 데스포네 공작과 나란하게 섰다.

16553294835051.jpg“황제 폐하!!! 반드시, 뷔에타 후작령의 탑을 제거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데스포네 공작이 성문 위 망루를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황제는 망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후는 거대한 군마 위에 여유롭게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16553294835051.jpg‘폐하! 어쩌자고 상의 한마디 없이 황후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단 말입니까!! 황후가 공을 세우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1655329483506.jpg‘그러지 못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소? 굳이 레녹스 푸아티에와 공작을 동시에 출전시키는 것인데?’

  데스포네 공작이 불같이 달려와 성을 내었으나, 황제는 제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1655329483506.jpg‘가서 뼈저리게 느껴 봐라, 아델라이드. 네가 안락하게 있을 곳은 내 옆이라는 것을 깨닫고 와.’

황제가 오만한 얼굴로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직선으로 이어진 2개의 성문까지 모조리 개방되자 성루에 선 병사들이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달릴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군마들이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성문이 모두 개방되자 리오넬이 가장 먼저 말을 몰아 단숨에 도약했고, 뒤를 이어 다른 말들도 달리기 시작했다. 무장한 군대가 수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 * * 황후를 배웅하고 궁으로 돌아온 긱스 부인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간 궁을 지키며 무수히 많은 일을 겪었으나, 모시는 황후께서 직접 출전하신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녀가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손수 황후의 방을 정리할 무렵이었다.

16553294854016.jpg“부인. 푸아티에 백작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긱스 부인이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반듯하게 펴며 눈을 치켜떴다.

16553294835025.jpg“나를 뵙고자 하시더냐?”

그 빈틈없는 모습에 기가 질린 시녀가 시퍼런 설원 같은 눈동자를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얼른 대답했다.

16553294854016.jpg“예.”

현재 긱스 부인의 황궁 내 신분은 객으로, 황궁 사람들 대부분이 그녀를 총관리인으로 대우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우일 뿐이었다. 객으로서 황궁에 머무는 것은 디안 푸아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안이 황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란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만남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이내 생각을 정리한 긱스 부인이 우아한 자세로 문을 향해 걸어가며 시녀에게 물었다.

16553294835025.jpg“어디에 계신가?”

  * * * 디안은 제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 시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시녀가 잘게 손을 떠는 바람에 찻잔도 함께 떨렸다. 디안은 넘칠 듯 말듯 아슬아슬한 찻물을 힐끔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16553294854037.jpg“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16553294854016.jpg“구, 궁주님…….”

16553294854037.jpg“내가 상아궁을 뺏기니까 한물간 것 같았어?”

16553294854016.jpg“아, 아닙니다…….”

사색이 된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도리질 쳤다. 디안은 사나운 시선으로 한편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몇몇 시녀들도 노려보았다. 시녀들이 겁먹은 토끼처럼 고개를 숙였다. 상아궁을 뺏기자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이 사용인들의 태도였다. 황후궁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처음엔 디안의 손과 발이었다. 돈도 쥐여 주고, 나름 시녀들 사이에서 힘도 실어 주며 디안이 총애하던 이들이었다. 고개 숙인 시녀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던 디안이 별안간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16553294854016.jpg“구, 궁주님. 죄송합니다.”

16553294854037.jpg“한 번 주인을 문 개가 두 번은 못 물까.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저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디안은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시녀의 턱을 털어 내듯 놓았다. 뒤로 나동그라진 시녀가 황급히 일어나 물러났다. 디안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렸을 뿐, 긱스 부인이 들어섰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 톨의 인정도 없는 시퍼런 시선을 마주 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하니 씁쓸한 차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디안은 눈을 휘며 웃었다. 긱스 부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귀족적인 태도로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16553294835025.jpg“용건이 있으십니까, 푸아티에 영애?”

만남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엔 껄끄러우나, 그렇다고 귀빈으로 대접할 필요도 없었다. 디안은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마치 궁의 주인이라도 된 양 방만한 태도인지라, 긱스 부인은 엄격한 표정으로 디안을 노려보았다. 디안이 긱스 부인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보란 듯이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16553294854037.jpg“잠시 부인과 사적인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주위를 물려 주시겠어요? 남겨 둬도 상관없지만, 부인을 위해서요.”

황궁 총관리인 자격은 없으나, 황후궁의 사용인 관리는 긱스 부인이 하고 있었다. 긱스 부인이 주위의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16553294835025.jpg“모두 나가게.”

그러자 시녀들은 줄곧 그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후다닥 문밖으로 달아났다. 디안이 싱긋 웃으며 손수 긱스 부인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16553294854037.jpg“앉으시죠.”

16553294835025.jpg“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긱스 부인은 꼿꼿하게 선 상태로 디안을 내려보며 말했다. 디안은 찻주전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긱스 부인에게 다가갔다. 상아궁으로 돌아온 날, 디안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이날만을 기다렸다.

16553294854037.jpg“베아트리체 부인이 스물아홉에 죽었다고?”

16553294835025.jpg“…….”

16553294854037.jpg“난 그 사람과 달라요. 그 말을 해 주고 싶었어.”

디안은 제 배를 쓰다듬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16553294854037.jpg“우리 아기님이 있는데, 내가 스물아홉에 죽어서야 되겠어요?”

웃음 섞인 목소리에는 진득한 집착과 열망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긱스 부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디안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16553294854037.jpg“나는, 베아트리체 부인처럼 아이를 황후에게 빼앗긴 채 불쌍하게 죽지 않을 거야. 난, 내 아기의 어머니로 인정받을 것이고, 그런 다음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채 긱스 부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싹 빠진 얼굴에는, 황궁에서 살아남은 이들 특유의 독기가 서려 있었다.

16553294854037.jpg“반드시 당신을 궁 밖으로 내쫓아 버릴 거야. 반드시.”

모멸감이 드는 그 푸른 눈으로 다시는 나를 볼 수 없도록. 긱스 부인은 물끄러미 디안을 바라보았다. 디안이 정말 임신했다면, 지금 그녀를 자극해 봐야 좋을 일이 없었다. 자칫 배가 아프다며 몸져눕기라도 하는 날엔 긱스 부인만 곤란할 테니까.

16553294835025.jpg“그러시지요. 저는 할 일이 많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노부인이 우아하게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나자, 디안은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문을 노려보다가 배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16553294854037.jpg“꼭 아들이셔야 합니다.”

배 속 아기가 알겠다는 듯 툭툭, 그녀의 손바닥을 치는 것만 같았다. 디안은 욕망과 애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제 배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 * * 뷔에타 후작령은 수도에서 멀지 않았다. 솜씨 좋은 기수는 이틀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최대한 빨리 후작령에 도착하기 위해 쉼 없이 말을 채근했다. 해가 저물 무렵에야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일행은 최대한 빠르게 잠자리를 준비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리오넬은 아델을 끊임없이 살폈다. 대놓고 걱정을 감추지 못하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황후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가장 선두에서 거침없이 말을 달렸다. 그 능숙한 기마술에 기사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리오넬은 아델의 말고삐를 받아 들며 가까운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16553294835013.jpg“황후 폐하께서 주무실 막사를 지어라.”

16553294854016.jpg“예, 단장님!”

아델은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리오넬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리오넬은 뒤이어 아델이 머물 막사를 직접 확인하고 그녀가 막사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야 일행 전체를 살폈다. 초주검이 된 마법사들이 각각 할당된 막사로 들어가자, 비교적 체력이 강한 기사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밤을 대비했다. 리오넬은 앙리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16553294835013.jpg“황후 폐하 막사 주변의 경계를 좀 더 강화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 수시로 살펴라.”

앙리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94854016.jpg“걱정 마십시오.”

날은 금세 저물었다. 내일도 동이 트자마자 달려야 했기에 마법사건 기사건 말할 기력조차 아껴 가며 휴식을 취했고, 불침번을 선 기사 몇몇만이 막사 주변을 오갔다. 오랜만에 말을 탄 아델 역시 노곤하여 일찍 잠이 들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병사 하나가 은밀하게 막사를 빠져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디론가 살금살금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가까운 막사였다. 소리 나지 않게 유의하며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모포 위에 앉아 있던 레녹스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3294888235.jpg“왜 이리 늦었어?!”

병사는 레녹스가 오래전에 기사단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매수한 심부름꾼이었다. 기사들 쪽을 찔러 봤지만 모조리 실패하고, 아쉬운 대로 말단 병사를 매수해 두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엔 쓸모가 없었으나, 오늘은 더없이 요긴하게 쓰일 예정이었다.

16553294854016.jpg“죄송합니다.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찾다 보니…….”

병사가 우물쭈물하며 변명을 늘어놓자 레녹스는 지겹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표독스러운 누이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했다.  

16553294854037.jpg‘황후를 죽여.’

  입만 살아 있는 디안 푸아티에가 꼴도 보기 싫은 날도 많지만, 그래도 레녹스와 그녀는 한배를 탄 사이였다. 무엇보다도 레녹스 역시 디안의 아이가 필요했다.  

16553294854037.jpg‘아기가 태어나면 황제는 틀림없이 내 아기를 황후에게 줄 거야. 틀림없어.’

  다시금 떠오르는 디안의 음성에 레녹스가 이를 악물었다.

16553294888235.jpg“어림없지.”

16553294854016.jpg“예?”

병사가 의아한 듯 되물었으나 레녹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며 명령했다.

16553294888235.jpg“여기서 남서 방향으로 가면 루엔 자작령이 나온다. 빠르면 내일 동틀 무렵 도착하겠지.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찾아가.”

병사가 종이를 두 손으로 받자마자 레녹스는 또 다른 봉투를 종이 위에 겹쳐 올렸다.

16553294888235.jpg“그리고 이 봉투를 전해. 늦어도 내일 자정까지는 내가 적어 둔 위치에 도착해야 해.”

16553294854016.jpg“내일 자정 말씀이십니까?”

16553294888235.jpg“그래. 지금 당장 출발해라.”

레녹스가 돈이 든 묵직한 주머니를 병사의 품에 쑤셔 넣으며 등을 떠밀었다. 병사는 깊게 허리를 숙인 뒤 소리 나지 않게 살금살금 레녹스의 막사를 벗어났다. 레녹스는 그제야 모포 위에 나른하게 몸을 뉘며 히죽 웃었다.

16553294888235.jpg“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군.”

디안, 훌륭한 오라비를 둔 것에 감사해라. 뷔에타에 도착하기 전, 네가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는 황후가 곱게 죽어 줄 것이니. 더불어 모든 책임이 리오넬 발드르에게 돌아갈 테니, 이 얼마나 완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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