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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암살 시도 (56/127)

56화. 암살 시도2021.10.12.

한편, 그 무렵 그랜드 영지. 굽이치는 화려한 금발을 어울리지 않는 검은 끈으로 질끈 묶은 여자가 성루에 서 있었다. 그랜드의 영주이자 황제의 이복누이인 엘리자베타 울리히 그랜드였다. 엘리자베타는 밀려드는 난민을 보며 눈을 세게 눌러 감았다. 난민은 생각보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기근으로 인한 위기는 우습게 여겨질 정도였다. 당장 먹고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들에게 도덕과 규범, 윤리란 땅바닥에 뒹구는 빵 한 덩이보다 못한 것이었다. 화폐가치까지 급락한 상황에 정당한 방식으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이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굶주림 앞에서는 법보다 주먹이 앞섰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엘리자베타가 구휼을 하자, 소식을 들은 난민들이 더 많이 찾아왔다. 그녀의 영지가 수도에서 멀지 않은 탓에 수도 슬럼의 일부 주민들조차 찾아올 정도였다. 그녀의 영지는 지금 난민으로 포화 상태였다. 더 이상 구휼할 돈이 없다는 소리에 엘리자베타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분노에 말을 전달했던 시종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16553295001435.jpg“이, 빌어먹을, 나쁜 새끼들 같으니!!!!!”

활화산 같은 분노를 표출하며 엘리자베타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데스포네 공작. 오직 제 배를 불릴 생각뿐인 그 미친 작자의 머릿속에 이 나라는 없다. 황좌? 그는 그 자리를 원치 않는다. 귀찮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황좌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싫으나,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은 가지고 싶은 욕심 많은 자가 그였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유아적인 욕망인가? 그가 불임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엘리자베타는 진심으로 박장대소했다. 그치를 닮은 괴물을 낳으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한데 그 빌어먹을 작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이가 다름 아닌 황제라니! 카를은 선대 황후의 친딸인 그녀를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엘리자베타 역시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황태자가 된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둘은 각자 나름의 선은 지켰다. 엘리자베타가 중신회의에서 데스포네 공작과 고성을 지르며 싸워도 카를은 그녀를 당장 내쫓지는 않았고, 엘리자베타 역시 카를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퍼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테세우스와 이혼을 함으로써 그 아슬아슬하던 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디안의 등장으로 인해 봉합의 여지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부는 바람이 성벽을 타고 올라와 엘리자베타를 훑고 지나갔다. 완연한 가을을 담아 청량해야 할 바람에 메케한 연기가 섞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난민들은 추위를 피하려 그랜드 숲 곳곳에서 불을 피웠다. 벌써 몇 번이나 불이 나서 아름답던 숲 곳곳이 검게 물든 상태였다. 하지만 엘리자베타는 그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16553295001435.jpg“수도로 갈 것이다.”

16553295001443.jpg“예? 수도요?”

16553295001435.jpg“그래. 내가 없는 동안 영지의 일을 니베른에게 일임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지금 당장 출발할 테니 어서 준비해 다오.”

긱스 부인으로부터 벌써 몇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새로 온 황후에게 푹 빠져 있는 듯했다.

16553295001435.jpg“……황후께서 마법사라…….”

단독으로 탑을 파괴할 수 있는 실력자인 데다가, 칼뱅 백작에게 금괴를 쥐어 쥐여 줄 정도의 도량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를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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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수도를 떠난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출발한 원정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동해서 해가 질 무렵에야 말에서 내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초주검이 되어 힘들어하던 어제와는 달리 마법사들은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탑의 마력반경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마력반경이란, 탑에서 방출된 마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뜻했다. 상위 탑일수록 넓은 범위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결국 그 마력을 끌어 쓰는 것은 마법사의 역량이기 때문에 상위 탑의 영향권이라도 마법사가 제가 가진 능력 이상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마법사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마력의 바다를 유영했다. 중력이 사라진 듯 몸이 가볍고, 작은 동작에도 마력이 자석처럼 끌려와 달라붙었다.

16553295001443.jpg“아흐…… 얼마 만에 맛보는 마력이냐.”

16553295001443.jpg“그러니까. 죽었다 살아난 것 같아.”

속닥이며 멀어지는 마법사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델은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마법사로서 느끼는 해방감은 때로는 그녀에게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마력반경은, 마력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마수의 활동반경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리오넬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막사 앞에서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델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제게 배정된 막사로 들어섰다. 언제 준비했는지 따뜻한 물과 음식이 소박하게 차려져 있고, 침상에는 세 겹이나 되는 모피 담요가 깔려 있었다. 침상에 걸터앉은 아델은 손으로 담요를 쓸다가 리오넬을 떠올렸다. 그는 아델의 일이라면 이렇게 작은 것 하나까지도 신경을 썼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으려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6553295001466.jpg“황후 폐하, 리오넬 발드르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델이 허락하자 천막이 반쯤 열리고 리오넬이 반쯤 몸을 들이밀며 내부를 살폈다.

16553295001466.jpg“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아델은 만족스럽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싱긋 웃었다.

16553295021682.jpg“황후궁만큼 편안하니 걱정 마.”

그녀의 농담에 리오넬은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물러갔다. * * * 풀벌레도 울음을 멈춘 깊고 깊은 밤. 깊은 잠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아델이 별안간 눈을 떴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몽롱한 눈으로 어둠을 더듬기를 한참, 서서히 정신이 든 아델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16553295021682.jpg‘……어?’

그런데 뭔가가 사지를 결박한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16553295021682.jpg‘가위? ……아니야.’

가위눌림과는 다른 것이었다. 인위적인 압박에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애를 쓰던 아델은 아예 힘을 빼 버리고 생각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온몸을 누르는 이 힘은…….

16553295021682.jpg‘마력이구나.’

마력이 정교하게 그녀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마력을 다루는 자라면 보통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아닐 것이다. 아델은 마법사단에서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을 이에 대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16553295021682.jpg‘날 결박한 뒤에, 뭘 어쩌려고?’

아델은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워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천천히 막사 문을 여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날카롭고 예리한 쇳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조심스럽게 갈랐다. 그것은 분명 칼을 빼내는 소리였다. 아델은 그 즉시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녀를 누르고 있던 상대방의 마력은 잠시 힘겨루기를 하듯 대치했지만, 곧 그녀의 마력에 서서히 밀려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사이 도둑고양이처럼 황후의 막사에 숨어든 자가 순식간에 그녀에게 달려들어 칼을 치켜들었다.

16553295021682.jpg“안 될걸.”

비명도 지르지 못할 것이라던 황후의 목소리에 암살자가 깜짝 놀라 주춤했지만, 이내 있는 힘껏 황후의 목을 향해 단도를 내리꽂았다. 하지만,

16553295021682.jpg“안 될 거라고 했지?”

소름 돋는 목소리와 함께 칼끝이 가로막혔다. 지극히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에, 암살자는 일이 크게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본능이 요란하게 경종을 울려 대기 시작하자, 암살자는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못했다. 무형의 마력이 온몸을 단단하게 조여와 꼼짝달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등 뒤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3295021682.jpg“벌써 나를 죽이려는 자들이 있어?”

어느새 막사 안에 촛불이 밝혀지고, 소리 없이 다가온 황후는 마녀 같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도 두려울 만큼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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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빛을 보는 순간, 암살자는 깨달았다. 큰돈에 혹해서 맡으면 안 되는 임무를 덥석 물었구나. 마력이 얼굴까지 마비시키기 전에, 그는 입 안에 물고 있던 독주머니를 어금니로 세게 씹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아델이 손으로 그의 입을 벌렸을 땐, 이미 온몸으로 독이 퍼진 뒤였다.

16553295021682.jpg“이런.”

아델은 경련을 일으키는 암살자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며 탄식했다. 잠시 뒤, 암살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아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틀림없이 함께 온 마법사 중 조력자가 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상대의 사지를 결박할 만큼 정교하게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최상위급 마법사가. 아무리 황실 마법사단이라 해도 이 정도 실력자는 손에 꼽을 것이다.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 그리고 휘하의 몇뿐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대담하게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16553295021682.jpg“날 반드시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던 모양이야.”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적당히 암살자의 소행으로 둘러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굳은 얼굴로 시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아델은, 이윽고 은밀히 막사를 벗어났다. 또 다른 암살자가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주위를 살피며 움직였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리오넬의 막사였다. 불침번을 서는 기사들이 곳곳에 서 있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선뜻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꼼꼼하게 살피며 은밀히 리오넬의 막사로 들어섰다. 희미한 등불이 짧게 일렁이며 막사 내부를 흐릿하게 밝히고 있었다. 잠든 그를 깨우는 것이 미안했지만, 지금 그녀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리오넬뿐이었다. 리오넬은 이불을 가지런하게 덮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16553295021682.jpg‘잠자는 것도 반듯하네.’

공들여 조각한 듯한 얼굴을 바라보던 아델은, 그를 흔들어 깨울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가로질러 그의 어깨에 닿은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16553295021682.jpg“?!”

순식간에 아델의 세상이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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