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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차라리 꿈이라면 (57/127)

57화. 차라리 꿈이라면2021.10.16.

잠든 중에도 리오넬의 감각은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낯선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리오넬은 기습적으로 침입자의 손을 낚아채며 재빨리 몸에 올라타 그를 결박했다. 갑작스럽게 밀쳐져 침상에 누운 꼴이 되어 버린 아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커다래진 눈으로 리오넬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두운 밤이라 그런지, 그의 얼굴이 묘하게 낯설다. 푸른빛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가 까마득한 어둠보다 짙은 듯했다. 한편,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한 리오넬은, 희미한 불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앞에 멍해졌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 예리하게 벼린 이성이 포말처럼 하얗게 부서진 것이다. 현실인가?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유려한 얼굴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얼굴, 반듯한 이마, 짙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 태양 같은 금빛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콧날을 타고 흘러 움푹 팬 인중에 고였다가. 급격히 산을 이룬 붉고 도톰한 입술 속으로 흘러갔다. ……현실일 리가 없다.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꿈이라면……. 이대로 몸을 숙이고 고개를 기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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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295125508.jpg“리오넬!”

다급한 호명에 리오넬의 움직임이 멎었다. 기울이면 콧등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남겨 두고, 혼탁하게 흐려졌던 그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아델은 숨을 삼키며 그를 다시 한번 불렀다.

16553295125508.jpg“리오넬, 나야. 숨어들어서 미안해.”

리오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16553295125518.jpg“……황후 폐하?”

아델은 누운 채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녀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만, 리오넬에 비할 바는 아닐 터.

16553295125518.jpg“지금 여기 왜…… 왜 계신…….”

그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델은 재빨리 사과했다.

16553295125508.jpg“숨어들어서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나 좀 놔줄래?”

리오넬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그녀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숨을 삼키며 얼른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폭주하듯 거세게 뛰었다. 리오넬은 당황하여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가 얼른 사과했다.

16553295125518.jpg“죄송합니다.”

16553295125508.jpg“아니야. 몰래 숨어든 내가 미안하지.”

아델은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린 리오넬이 재빨리 아델을 살피며 물었다.

16553295125518.jpg“괜찮으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움을 청했다.

16553295125508.jpg“나 좀 도와줘.”

16553295125518.jpg“말씀하십시오.”

16553295125508.jpg“내 막사에 자객이 들었어.”

  * * * 두 사람이 아델의 막사에 도착했을 때, 암살자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급하게 증거를 없애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암살자가 죽기 전 흘린 소량의 핏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오넬은 자국을 유심히 살피다가 물었다.

16553295125518.jpg“독을 먹었단 말입니까?”

16553295125508.jpg“입 안에 독주머니를 물고 있을 줄은 몰랐어.”

아델은 리오넬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6553295125508.jpg“날 누르던 정교한 마력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리오넬은 고개를 작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16553295125518.jpg“무모할 정도로 대담하군요. 일이 실패하면 용의 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을 텐데 말입니다.”

16553295125508.jpg“반드시 날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거지.”

아델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하던 리오넬이 아델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16553295125518.jpg“황후 폐하의 암살을 시도할 만한 이는 데스포네 공작 혹은 레녹스 푸아티에밖에 없습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오넬이 말을 이었다.

16553295125518.jpg“하지만 제가 아는 데스포네 공작이라면, 이렇게 허술하게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뷔에타의 탑을 파괴하러 본인이 직접 움직이고 있는 와중이라니, 앞뒤가 맞지도 않습니다.”

16553295125508.jpg“그럼…….”

16553295125518.jpg“레녹스 푸아티에의 단독 소행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델은 짧은 한숨을 몰아쉰 뒤 팔짱을 꼈다. 증거인 시신이 사라졌으니, 지금 당장 레녹스 푸아티에를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지극히 차분하게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16553295125508.jpg“남은 여정 동안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어.”

리오넬이 죄책감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아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16553295125518.jpg“경비를 제대로 서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의 깍듯한 사과에 아델은 팔짱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16553295125508.jpg“그만. 그대를 탓하는 게 아니야. 고개 들어, 리오넬.”

리오넬은 고개를 들어 아델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16553295125518.jpg“배후가 레녹스라는 것은 밝힐 수 없어도, 일단 암살 시도가 있었던 것은 모두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래야 함부로 일을 벌이지 못할 겁니다.”

그러자 아델은 단칼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16553295125508.jpg“아니. 그건 안 돼. 그랬다간 데스포네 공작이 호위 담당인 기사들과 총책인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거다. 공론화되길 원했다면 내가 굳이 그대 막사에 숨어들지도 않았을 거야.”

아델이 고개를 저었으나, 그도 쉽게 물러나지 않고 거듭 말했다.

16553295125518.jpg“무엇보다도 폐하의 안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걱정 어린 리오넬의 시선에, 날카롭게 날이 섰던 아델의 눈빛이 잦아들었다. 무뎌진 눈매 사이로 검푸른 빛이 파고들자, 내면 깊은 곳에서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작은 것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나를 언제부터 보았다고, 그런 눈빛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인지. 수많은 사람에게 수없이 받았던 염려가, 왜 처음인 듯 생경한 것인지. 흔들리는 불빛이 검은 빛깔 위에서 일렁였다. 참 예쁜 색이다. 아델은 그 오묘한 흔들림에 순간 눈길을 빼앗겼다가 시선을 돌리며 괜히 막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내쉬며 상념을 밀어낸 뒤,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어둠처럼 짙은 눈빛으로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어깨를 덮었던 따뜻하던 온기와 향기가 다시 떠오르자, 아델은 숨을 참으며 빠르게 말했다.

16553295125508.jpg“알리지 마. 마력반경 안에서 나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 게다가 일에 실패한 이상, 레녹스 푸아티에도 꼬리를 밟힌 것을 알 테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을 거야.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청하러 갔던 것인데, 괜히 그대의 잠만 깨웠군.”

그러더니 문을 가리켰다.

16553295125508.jpg“어서 가서 쉬어.”

하지만 리오넬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힐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3295125518.jpg“제가 막사 밖에서 불침번을 서도록 하겠습니다.”

16553295125508.jpg“뭐? 아니야, 됐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에 리오넬의 미간이 굳어졌다.

16553295125508.jpg“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과하다 싶은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내몰다시피 그를 막사 밖으로 내보낸 아델은 이유 없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연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하릴없이 막사 안을 맴돌다가 모피 담요 위에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밤의 시간은 낮보다 더 느린 걸음을 걷는다. 적막한 어둠에 몸을 묻고 있으니 애써 밀어 두었던 기억이 슬그머니 기어 나와 순식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에게 제압당한 순간, 아델은 곧장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했다. 불시에 낯선 기척이 느껴졌을 테니, 그녀를 침입자로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그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그래, 이제 비키겠지.’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었다. 그녀의 이마에서 코로, 입술로 미끄러지는 시선을 따라 자국이 남은 것만 같았다. 그저 눈빛일 뿐인데, 마치 어루만져지는 것만 같은 기분. 마력에 결박당했을 때처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고, 그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그러다 그가 몸을 기울이며 다가왔을 때야, 아델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차린 듯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지만, 아델이 제때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델은 탄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16553295125508.jpg“……꿈인 줄 알았던 모양이지.”

동시에 그녀의 내면이 속삭였다.

16553295125508.jpg‘꿈이라도 그렇지. 그건 마치 연인 같았잖아?’

16553295125508.jpg“아, 진짜……. 남의 막사에는 괜히 들어가 가지고…….”

알아서 처리할걸……. 왠지 막사 안이 조금 더워진 것도 같았다. 한숨 같은 말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 * * 리오넬은 앙리 자칼을 은밀히 불러 황후의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해 알렸다. 몇몇 기사들이 극비리에 캠프 주변을 수색하며 암살자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지 못했다. 결국, 리오넬은 황후의 호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막사로 돌아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현명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암살자의 시신은 사라졌고, 주인을 증명할 길이 없는 핏자국만 남았다. 정황상 이 일의 배후는 레녹스 푸아티에가 분명하지만, 심증일 뿐 마찬가지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델의 의견처럼 틀림없이 또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고민보다는 철저한 대비를 하는 것이 옳으리라. 호전적인 기질 때문인지, 에흐몬트 귀족들에게 암살 위협은 비일비재한 것이었다. 영지마다 암살 길드가 있을 정도였다. 리오넬만 해도 이미 수많은 암살 시도에 노출되었으며, 리오넬의 형이자 발드르 공작인 테세우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독 검사지가 있을 정도였다.

16553295125518.jpg“독 검사지는 가지고 있으신지 여쭤봐야겠군.”

암살자에서 황후로 이어진 생각은, 이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 무방비하게 누워 그를 올려다보던 은백색의 말간 얼굴을 본 순간, 리오넬은 혼몽한 와중에도 이것이 차라리 꿈이길 바랐다. 그랬다면 똑바로 그녀의 얼굴을 훑고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닿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놀란 듯 커진 황금빛 눈동자가 떠오르자 리오넬은 결국 신음하며 욕을 짓씹었다.

16553295125518.jpg“제길…….”

거친 물살에 휩쓸려, 굽이진 계곡의 모양대로 쓸려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언제 발을 헛디딘 것일까. 답을 구하고 또 구했지만, 모두 의미 없는 짓이었다. 리오넬은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그날 밤, 결국 그는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 황후의 막사 주변을 살피고 또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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