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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데스포네 공작의 계획 (58/127)

58화. 데스포네 공작의 계획2021.10.19.

레녹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막사 안을 어지럽게 배회했다. 그나마 암살자가 제때 자결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산 채로 붙잡혔다면 일이 복잡해졌겠지. 데스포네 공작은 이 일을 모른다. 어차피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실패했으니 더욱 비밀에 부쳐야 했다. 레녹스는 별안간 우뚝 멈춰 서서 막사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를 듣다가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깥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것으로 보아 모두에게 알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레녹스는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꾹 누르며 호흡을 몇 번이나 가다듬었지만, 그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풀릴 줄 몰랐다. 마력으로 아델의 몸을 결박했던 것은 바로 그였다. 보이지 않는 상대의 몸을 마력만으로 결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레녹스는 가능했다. 그는 제 실력을 믿고 있었기에, 황후를 반드시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레녹스가 황후의 몸을 붙잡고 있는 사이, 암살자가 그녀의 막사로 들어갔다. 황후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 순간, 심장이 기대감으로 미친 듯이 요동쳤다. 황후는 곧 죽을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마력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 흩어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밀어붙이려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최상위 스트라이커인 레녹스의 마력을 밀어낼 수 있는 것은, 1급 키퍼 중에서도 몇몇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황후는 스트라이커였다. 그런 그녀가 1급 키퍼에 버금가는 제어력을 가지고 있다니!! 황후를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심지어 마력으로 상대방을 결박했다가 실패하였으니, 황후가 그의 소행임을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는 계획을 다시 수정했다. 이렇게 된 이상, 마력반경 안에서 황후를 죽이는 것은 어려웠다. 뷔에타 후작령의 탑을 제거하고 나면, 마력반경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를 노려야겠다. * * * 임시 캠프의 마법사 전용 여성 막사. 적당한 거리를 두고 누워 잠든 이들 틈에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브룬힐 알렉사. 에흐몬트 스트라이커 랭킹 2위이자, 에흐몬트의 탑 대응 방식을 최악이라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탑을 제대로 파괴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중앙 집권적 방식이 아닌 넓은 범위에서 관할구역을 정해 각지에 마법사들을 상주시키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못했다. 스트라이커 랭킹 2위의 실력자임에도 슬럼가 고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특유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성격 때문에 권력자들은 그녀를 ‘그저 마력을 잘 다루는 도구’쯤으로 취급했다. 브룬힐이 에흐몬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뭐든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한 번 곪기 시작한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 진물이 흐른 뒤에야 새살이 돋는다. 에흐몬트는 곪은 상처다. 그녀는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면서 정보를 모았다. 데스포네 공작의 속셈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모으는 탑의 정보를 그녀도 수집했다. 스트라이커 랭킹 2위의 실력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단 내에서 누가 데스포네 공작과 생각이 같은지, 누가 그녀와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철저하게 구분했다.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동지로 모으자 더 방대한 양의 정보가 수집되었다. 자, 이제 이것을 누구에게 주어 어떻게 활용하게 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할 무렵, 그분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부서지는 탑을 뒤로하고 땅으로 내려오는 황후의 모습을, 브룬힐은 두고두고 떠올렸다.

16553295641675.jpg‘아…… 저런 방식도 있구나. 어떻게 알아내신 걸까? 탑을 파괴하려 온갖 고민을 하지 않고서는 찾아낼 수 없으셨을 거야.’

이번 여정에서 브룬힐의 시선은 황후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녀는 치열하게 황후를 재어 봤다. 저분이실까? 곪디 곪아 흐르는 진물을 닦고 새살을 돋게 해 줄 사람이? 만약 그렇다면, 브룬힐은 제 모든 것을 황후에게 바칠 작정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빌어먹을 만큼 허접한 막사에서 눈을 뜬 데스포네 공작은 한껏 기분이 나빴다.

1655329564168.jpg“하필이면 뷔에타에 탑이 내려와서는, 쯧!”

그는 기사들이 대령한 물로 얼굴을 닦아 내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허접한 동물의 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겹을 침상에 깔았는데도 등이 배겼다. 애초에 일행에게 지급되는 모피 담요는 두 장이었다. 하지만 데스포네 공작이 노발대발하는 바람에 기사들이 사용할 담요까지 끌어와 바쳤는데도 공작은 만족하지 못했다. 노숙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비위생적이고, 춥고, 맛대가리 없는 건량이나 씹어야 하는 최악의 일이었다. 그런 그가 왜 굳이 이 길에 동행하였을까?

1655329564168.jpg“참아야지. 뷔에타엔 탑이 들어서면 안 돼.”

데스포네 공작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지도를 펼쳐 들었다. 지도 위엔 검은색으로 표시된 점과 붉은색으로 표시된 점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다. 검은색은 현재 탑이 위치하는 지점이며, 붉은색은…….

1655329564168.jpg“여기에 모두 탑이 내려와 줘야지.”

그의 얼굴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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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색으로 표시된 이곳들까지 빠짐없이 탑이 내려오는 날, 에흐몬트는 어느 곳에서나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마법 국가가 될 것이다. 안전지대가 좁아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세상에 위험 부담이 없는 일이 어디 있는가? 탑은 신묘한 것이다. 탑의 위치와 위력은 기존에 세워진 다른 탑 혹은 앞으로 생길 탑에 영향을 미쳤다. 강력한 마력 중추인 탑이 세워지면, 일정한 확률로 가까운 곳에 탑이 내려온다. 데스포네 공작은 이것을 이용해 탑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있었다. 칼뱅 백작령의 탑은 방치하고, 뷔에타 후작령의 탑은 파괴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것과 관련한 정보는, 레녹스에게조차 공유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착하게도 공작이 알려 주는 정보 너머의 것을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1655329564168.jpg“뷔에타에는 생기면 안 돼. 그럼 괜히 내 영지에 탑이 내려올 수도 있단 말이야.”

데스포네 공작이 진저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1655329564168.jpg“뷔에타의 탑이 파괴되면, 그 영향으로 어디에 탑이 내려오려나…….”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지도를 살폈다.

1655329564168.jpg“여기가 1급이고……, 여기는 3급……, 그럼 대충 마력반경은 이 정도니까…….”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지도의 어느 한 곳으로 떨어졌다. 그곳에는 선명하고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도] 뷔에타의 탑을 파괴한다면, 그 여파로 수도에 탑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뷔에타 못지않은 초대형 탑이.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계산한 데스포네 공작의 얼굴엔 걱정 한 줌 묻어 있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수도를 톡톡 두드리다가 지도를 둘둘 말아 정리한 뒤 기지개를 쭉 켰을 뿐이다.

1655329564168.jpg“뭐…… 잘됐네.”

어차피 수도 인근에 탑이 내려와 주길 바라던 참이다. 그래야 수도에서도 마력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1655329564168.jpg“저번처럼 황궁 위로 내려오면 곤란하겠지만 말이야.”

중얼거리는 공작의 태평한 얼굴이 음험하게 빛났다. * * * 어슴푸레한 새벽. 아델은 퀭한 얼굴로 일어나 가볍게 얼굴과 손을 닦았다.

16553295659423.jpg“……다음 암살자는 기필코 산 채로 잡아 주지. 걸리기만 해 봐라. 어우, 피곤해.”

그녀는 무거운 손길로 로브를 낚아채 대충 두른 뒤, 어수선한 막사 밖으로 나갔다. 어슴푸레하던 회색 세상에 금빛 햇살이 섞여 들기 시작할 무렵, 일행은 뷔에타를 향한 질주를 다시 시작했다. 목표는 오늘 해가 지기 전 뷔에타의 탑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 * * 붉은 하늘과 압도적인 검은 재앙.

16553295641675.jpg“으아아아아악!!!”

16553295641675.jpg“살려 줘!!!! 살려 줘!!!! 안 돼…… 컥!”

우악스러운 마수의 거친 이빨 앞에 기사의 갑옷이 와락 구겨졌다. 단말마를 지르며 축 늘어진 전우의 시신을 뒤로하고, 남은 기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16553295641675.jpg“수도에서 마법사들이 오고 있다!! 다들 버텨라!! 버텨!!”

뷔에타 후작이 직접 달려 나와 기사들을 독려하고 있었으나, 그가 보기에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공을 들여 정성스럽게 키워 낸 기사단은 탑이 내려온 지 고작 사흘 만에 괴멸하기 직전이었다. 가신 가문의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싸울 수 있는 젊은 남자들도 모조리 달려 나와 칼을 들고 싸웠다. 그러나 천재지변과도 같은 압도적인 재앙 앞에 인간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였다. 칼을 들고 덜덜 떨고 있는, 이제 갓 소년티를 벗은 청년을 보며 뷔에타 후작은 왈칵 울분이 치밀었다. 빌어먹을! 이 미친 재앙 앞에 마법사들이 안 오다니, 다 죽으라는 뜻 아닌가?!!!

16553295641675.jpg“뭣 하고 있느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후작이 청년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며 거세게 소리를 질렀다. 청년의 공포로 점철된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그런데 후작을 마주 보고 있던 청년의 시선이 문득 후작 뒤로 향했다. 크게 확장되어 잘게 떨리는 눈동자로, 청년은 입을 벌리고 신음했다.

16553295641675.jpg“아…… 아아…….”

그 모습에 오싹한 소름이 돋은 후작이 몸을 뒤로 돌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후작은 제가 지옥에 와 있는 줄 알았다.

16553295641675.jpg“……저게 뭐야…….”

거대한 뱀을 닮은 몸, 도끼 같은 발톱이 달린 두 개의 발,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한 쌍의 피막 날개를 가진 그것은.

16553295641675.jpg“……와이번이다…….”

2급 탑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수가 뷔에타 영지 상공을 낮게 배회하며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별안간 빠르게 하강하며 한데 모여 있던 기사들의 진영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16553295641675.jpg“으아아악!!!”

최후저지선은 와이번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밀려드는 마수에 기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그 모습을 본 뷔에타 후작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16553295641675.jpg“모두, 후퇴하라!!! 후퇴하라!!!!”

하지만 압도적인 공포 앞에 전의를 상실한 기사들은 이미 공황상태였다. 허공을 유유히 배회하던 와이번이 날개를 몸통 쪽으로 바짝 붙이며 하강하자, 후작은 끝을 예감했다.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제 숨소리만 요란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신을 찾았다. 그런데 별안간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눈을 번쩍 뜬 후작 앞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쪽 날개가 찢어진 와이번이 우글거리는 마수 위로 처박히고, 황실 근위대가 후작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달려오는 마수에게 검을 휘둘렀다. 청각이 서서히 돌아오며 말발굽 소리와 기사들의 다급한 고함이 소란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후작의 눈빛에 총기가 돌아왔다. 벌떡 일어나 근위대의 책임자를 찾으려는 후작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금빛 눈동자를 가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고고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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