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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동정을 버릴 구실 (64/127)

64화. 동정을 버릴 구실2021.11.09.

한편, 막 잠자리에 들려던 긱스 부인은 다급히 저를 찾는 소리에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황제궁 시종이었다. 긱스 부인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용건을 알아차렸다.

16553296635066.jpg“시녀가 사라졌느냐?”

시종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96635072.jpg“상아궁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지하로 향하는 듯 보였습니다.”

디안 푸아티에가 무엇을 무기로 황제의 곁을 지켰는지, 귀족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황후가 등극하며 디안이 더 이상 궁 내부 사용인을 관리하지 못하게 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여인들을 황제궁 시녀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시녀가 디안의 눈에 띄면, 긱스 부인은 황제궁의 시종을 통해 많은 돈을 쥐여 주어 시녀를 은밀하게 궁 밖으로 내보냈다. 어차피 욕심에 눈먼 귀족들에 의해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여인들이 계속해서 시녀로 들어올 것이다. 사람의 신경은 서서히 예민해지는 것이니, 굳이 디안에게 해코지를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디안은 한물갔다며 의도적으로 긱스 부인을 무시했으나, 긱스 부인은 칼날 같은 황궁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노련한 이였다. 그 관록으로 긱스 부인은 언젠가 이런 날이 도래하리라 예상했다. 황제가 제 생모인 베아트리체 부인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그저 연민일 뿐. 그리고 연민이란 감정은 달구어진 철보다도 빠르게 식는다. 긱스 부인은 시퍼런 눈을 냉혹하게 빛내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뒤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황제궁으로 향했다. * * * 카를은 늦은 시각에 저를 찾아온 긱스 부인을 의아한 얼굴로 마주했다. 야심한 시각에도 부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으나, 용건만큼은 심상치 않으리라 예상이 들었다.

16553296635077.jpg“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인가?”

긱스 부인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황제를 반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심이 섞이지 않도록 목소리를 신경 쓰며 입을 열었다.

16553296635066.jpg“폐하. 부디 가련한 한 시녀를 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로지 폐하만이 그 아이를 구할 수 있으시기에 늦은 시간에도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카를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16553296635077.jpg“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설명하게.”

16553296635066.jpg“황제궁의 전담 시녀 한 명이 사라졌습니다. 상아궁으로 끌려간 것을 목격한 자가 있으며, 현재 지하에 갇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16553296635077.jpg“……상아궁? 황제궁 시녀가 상아궁엔 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가?”

16553296635066.jpg“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궁법에 의거하여 처벌을 받습니다, 폐하.”

엄격한 목소리에 카를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긱스 부인은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16553296635066.jpg“상아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16553296635077.jpg“…….”

황제는 긱스 부인의 말에 침묵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긱스 부인은 시선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황제의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연민이란 단어는 얼마나 알량한 것인가. 불쌍히 여기던 존재를 모른 척하고 싶어지는 것에 큰 이유가 필요한가? 그저 관심이 식어서, 더 관심 있는 것이 나타나서, 귀찮아서, 질려 버려서. 연민이 사라지는 이유는 한없이 가볍고 많으며, 제 감정을 갈무리하며 끝까지 가련한 이를 챙기는 것은 마음이 단단한 이들뿐이다. 그러나 황제는 그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의 그는, 이제는 거추장스러워진 동정을 버릴 구실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토록 긱스 부인을 혐오하고 원망하면서도 무작정 찾아온 그녀를 곧장 내치지 않고 연유를 듣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16553296635077.jpg“디안이, 황제궁 시녀를 데려가 상아궁 지하에 가뒀다는 것이 확실한가?”

16553296635066.jpg“제 짐작입니다.”

16553296635077.jpg“내게 직접 찾아와 청할 정도라면, 짐작을 넘어 확신이겠는데? 상아궁 지하를 뒤져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책임질 수 있겠는가?”

16553296635066.jpg“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긱스 부인을 가만히 응시하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긱스 부인을 스쳐 지나가며 명령했다.

16553296635077.jpg“앞장서게.”

  * * * 디안이 손을 휘두를 때마다 시녀의 머리가 이쪽저쪽으로 휘청였다. 어찌나 손이 매서운지 시녀의 입가엔 피가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16553296635072.jpg“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을게요……. 살려 주세요……. 으흐흑.”

시녀가 울며 애원했지만 디안은 무자비했다. 디안은 무아지경에 이른 듯 그동안 쌓였던 온갖 울분을 시녀에게 쏟아냈다.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손찌검을 하는 모습에선 언뜻 광기마저 엿보였다.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로레인과 몇몇 직속 시녀들은 덜덜 떨리는 턱에 힘을 주며 그들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한껏 울분을 풀던 디안이 별안간 시녀의 멱살을 틀어잡으며 으르렁거렸다.

16553296651137.jpg“너, 폐하와 밤을 보냈어?”

16553296635072.jpg“……예?”

16553296651137.jpg“네가 폐하 곁을 맴돌려고 일부러 들어온 것을 다 알아. 제대로 말해, 폐하와 밤을 보냈느냐고!!”

16553296635072.jpg“아, 아, 아니에요!”

디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황제 곁을 노리고 들어온 것은 맞지만, 아직 성공하진 못했던 것이다. 시녀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내젓자, 풀려 버린 머리카락이 함께 흔들렸다. 디안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노려보다가 로레인은 향해 명령했다.

16553296651137.jpg“가위를 가져와라. 저 머리카락을 잘라 버려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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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탐스러운 금발이 뭉텅 잘려 나갔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 대던 시녀는 발아래로 툭 떨어진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몸에 붙어 있던 것이, 지금은 붉은 융단 카펫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16553296651137.jpg“지금은 머리카락이지만, 다음은 네 목일지도 몰라.”

두려움이 목구멍을 막아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디안이 사나운 눈을 치켜뜨며 다시 한번 가위를 들어 올릴 무렵이었다. 바깥에서 망을 보던 이가 다급히 달려 내려와 디안의 귓가에 대고 황급히 속삭였다.

16553296635072.jpg“궁주님! 지금 황제 폐하께서 여기로 오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디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16553296651137.jpg‘어떻게?!’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쏟아져 버린 것처럼 몸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어찌나 거세게 뛰는지 온몸이 함께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디안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는 차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16553296651137.jpg“불 꺼! 로레인!”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황제궁 시녀를 끌고 오면서 혹여 생길지 모르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아궁 지하에 있는 이곳은 불면증이 있는 디안이 낮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놓은 침실이었다. 늦게 잠드는 밤이면 오전까지 쭉 이어 자기 위해서 이곳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으리라. 로레인이 재빨리 의자에 묶인 시녀를 풀어내어 옆 방으로 사라졌다. 시녀가 소리 지를 것을 대비하여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줍던 이들도 서둘러 옆 방으로 사라졌고, 디안은 재빨리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방에 남은 직속 시녀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쌕쌕 들려왔다. 또각또각 계단을 내려오는 구두 굽 소리가 깨질 듯 위태롭게 들렸다. 디안의 모든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초조하게 발소리를 헤아리던 디안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 두 명임을 눈치챘다. 디안은 실눈을 뜨고 계단을 바라보았다. 계단 위에 매달려 있는 작은 등불이 흔들리더니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내 좀 더 작은 체구의 인영이 뒤따라 나타났다. 디안은 실루엣만으로도 나타난 이들의 정체가 황제와 긱스 부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16553296651137.jpg‘한나 긱스, 이 교활한 뱀 같은 여자가 기어이!’

  * * * 황제가 지하 침실에 거침없이 발을 디디자, 대기 중이던 시녀가 얼른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황제의 뒤를 따라 나타난 긱스 부인의 얼굴을 보고는 숨을 들이켜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황제는 무언가를 살피는 사람처럼 어둠 속을 예리한 시선으로 더듬었다.

16553296635077.jpg“디안은 잠들었느냐?”

16553296635072.jpg“예.”

16553296635077.jpg“비명 소리가 나던데, 어디에서 들려온 것인지 아느냐?”

16553296635072.jpg“예? 저, 저는 못 들었습니다.”

16553296635077.jpg“그래?”

16553296635072.jpg“……예, 폐하.”

16553296635077.jpg“등불을 가져와.”

시녀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얼른 등에 불을 붙여 가져왔다. 침대에 누운 디안 푸아티에는 미동도 없었다. 카를은 등불을 든 시녀를 앞세워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그 순간, 바닥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카를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내렸다. 붉은 융단 카펫 위로 반짝이는 긴 실들이 흩어져 있었다. 카를은 무릎을 구부려 직접 그것들을 주워 들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뭔가에 싹둑 잘린 흔적이 있는. 카를의 시선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디안에게 향했다. 그는 시녀를 밀어내고 침대로 걸어가 디안을 내려다보았다.

16553296635077.jpg“디안.”

16553296651137.jpg“…….”

16553296635077.jpg“디안, 일어나라.”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디안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막 일어난 사람처럼 실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황제를 바라본 그녀는 그만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황제가 마치 거인처럼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에 일렁이는 얼굴은 숨 막힐 듯이 매혹적이었으나, 눈빛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는 마치 죽음을 선고하러 온 사신 같았다.

16553296651137.jpg“폐, 폐하.”

디안은 깜짝 놀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16553296651137.jpg“이 시간에 여기 어쩐 일로……. 긱스 부인?”

디안은 끝까지 잡아뗄 생각이었다. 지금쯤 로레인이 시녀를 데리고 상아궁을 빠져나갔으리라. 그때, 황제가 그녀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던 디안은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황제는 왼손에 쥔 디안의 머리카락 한 줌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과 비교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디안의 것과는 달리 오른손에 든 머리카락은 직모에 가까웠다. 카를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디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16553296635077.jpg“황제궁 시녀 한 사람이 사라졌다. 어디 있는지 아느냐?”

그 음성이 어찌나 냉혹하고 무뚝뚝한지, 디안은 턱을 덜덜 떨면서 가까스로 대답했다.

16553296651137.jpg“저는 줄곧 잠을 자고 있었어요……. 왜 제게 그런 것을 물으시는 거예요…….”

16553296635077.jpg“그래?”

디안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16553296635077.jpg“한데 너는 왜 잠옷을 입고 있지 않고? 너도 비명 소리를 못 들었어?”

16553296651137.jpg“…….”

16553296635077.jpg“게다가 이 긴 금발, 네 것이 아닌 것 같은데.”

황제의 추궁에 디안은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16553296651137.jpg“폐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세요!”

카를은 물끄러미 디안을 바라보다가, 로레인이 나간 바로 그 문을 바라보았다. 디안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디안은 더욱 다급하게 황제의 팔을 잡고 매달리며 애원했다.

16553296651137.jpg“폐하, 저는 자고 있었어요. 믿어 주세요, 폐하!”

잠시 침묵하며 문을 바라보던 카를은 제 팔을 잡고 있던 디안의 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뿌리쳤다.

16553296635077.jpg“디안 푸아티에.”

16553296651137.jpg“…….”

16553296635077.jpg“일전에 나는, 너에게 주었던 나의 권한을 모두 회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네가 나의 권한을 암암리에 행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지.”

16553296651137.jpg“……폐하…….”

16553296635077.jpg“더는 묵인하지 않겠다.”

카를은 들고 있던 머리카락을 바닥에 버리며 동시에 제 감정도 함께 털어 냈다. 그동안 버리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명분이 없어서였다. 그럴듯한 이유도 없이 버리기엔 죄책감이 따라붙어 성가시니까. 충격으로 점철된 커다란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황제는 비로소 제 안에 있던 모든 죄책감을 홀가분하게 털어 냈다. 한때 디안에게 황후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여 줬었다. 하지만 역시 그의 곁을 지킬 이는 아델라이드, 그녀뿐이란 확신이 들었다. 미련 없이 뒤돌아서는 황제의 모습이 어찌나 매정한지, 디안은 멀어지는 그를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에 조용히 서 있던 긱스 부인 역시 물끄러미 디안을 바라보다가 황제를 따라 몸을 돌렸다. 한나 긱스가 모시는 황후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여인 때문에 가슴앓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긱스 부인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날이 밝아 올 무렵, 머리카락이 잘린 시녀가 궁 밖에서 발견되었다. 긱스 부인이 직접 그녀를 만났으나, 시녀는 겁에 질려 어떤 말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16553296635072.jpg“어찌할까요?”

시종의 질문에 긱스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분하게 답했다.

16553296635066.jpg“더 묻지 말고 퇴직금을 두둑하게 주며 퇴궁시키게. 어차피 저 시녀를 저렇게 만든 이는 대가를 치렀고, 앞으로도 지리하게 치르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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