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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누굴 보고 웃는 거야 (66/127)

66화. 누굴 보고 웃는 거야2021.11.16.

그랜드 공작의 방문 후, 테세우스는 수많은 귀족 가문의 가주들과 회동하며 여론을 모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엘리자베타 울리히의 수도 귀환을 알리며, 뷔에타에서 황후가 보여 준 놀라운 일들을 공유했다. 회동에 참석한 귀족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반짝였다.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가 탑과 마력을 무기로 귀족들의 목을 옥죄던 올가미에 드디어 틈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6553297065263.jpg“그랜드 공께서 정녕 우리와 함께하시기로 하신 것이지요?”

16553297065269.jpg“물론이오.”

귀족들은 리오넬이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테세우스 가까이에 있던 자칼 가의 가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16553297065263.jpg“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 모두 다 함께 나가 그분을 맞이합시다.”

16553297065278.jpg“좋습니다!”

  * * * 황후가 수도로 귀환하는 날, 축제를 방불케 하는 인파가 성곽과 황궁 사이 가도로 몰렸다. 한편에는 데스포네 공작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그 반대편에는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를 필두로 하는 귀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데스포네 공작 진영의 귀족들은 화려한 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엘리자베타를 힐끔거리며 속닥였다.

16553297065263.jpg“그랜드 공께서 돌아오셨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군요.”

잠시 후, 성문의 거대한 도르래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16553297065263.jpg“오오! 문이 열린다!”

수많은 시선이 성문으로 향했다. 천천히 입을 여는 문 너머, 뷔에타의 탑을 파괴하고 귀환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자 군중은 너나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환호했다. 선두에 선 황후와 데스포네 공작이 성문을 넘어오는 순간, 함성이 더 커졌다. 데스포네 공작과 그 옆으로 다가온 레녹스는 개선장군처럼 한껏 으스대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아델이 묶었던 머리카락을 풀었다. 폭포처럼 쏟아져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 일순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아델의 의중을 파악한 리오넬도 말을 몰아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델이 만개한 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속삭였다.

16553297065291.jpg“환하게 웃어. 저 둘에게 밀릴 수는 없잖아?”

데스포네 공작 무리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임에도, 아델의 말에 리오넬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차피 황후가 명령한 바였기에 리오넬은 제 웃음을 감추지 않고 모두 내보였다. 처음엔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를 바라보던 사람들도 점차 황후와 리오넬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군마를 모는 황후는 여린 듯 강인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을 지키는 국방부 장관이자 기사 중의 기사인 리오넬 발드르 역시 눈부시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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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아낌없이 웃는 절색의 남녀를 홀린 듯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16553297065278.jpg“황후 폐하!”

인파 속의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외치자, 아델은 그를 향해 오른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내 곳곳에서 환호가 튀어나오며 사람들이 황후의 이름을 소리 높여 연호하기 시작했다.

16553297065278.jpg“황후 폐하!!”

리오넬과 아델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은 뿌듯한 얼굴로 가슴을 활짝 폈고, 발드르 공가 쪽 귀족들도 씩 웃으면서 함께 황후를 연호했다. 그러자 반대로 표정이 와락 구겨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데스포네 공작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획 돌리는 공작을 먼 곳에서 바라보며 엘리자베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3297094452.jpg“우리 숙부님, 화가 많~이 나셨네.”

한편, 테세우스의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동생에게 못박여 있었다. 형인 그조차 본 적 없을 만큼 환히 웃으며 황후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리오넬. 그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이 황후라도 되는 양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뭔가를 깨달은 듯 깊고 긴 탄식을 내뱉었다.

16553297065269.jpg“리오넬…….”

  * * * 황후의 귀환 소식을 들은 카를도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황후를 부르짖는 군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완전히 입을 벌린 황궁 정문 너머,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쏟아지듯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 요요한 금빛 눈동자, 창백한 뺨, 붉은 입술, 아델라이드. 나의 아델라이드. 나의……. 환희에 차 달리던 카를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는 멈춰 선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가 두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린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투명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16553297094462.jpg“너…… 누굴 보고 웃는 거야…….”

그러나 그녀의 눈길은 리오넬 발드르를 향해 있었다. 황제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카를의 눈가가 붉어지며,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16553297094462.jpg“리오넬 발드르…….”

증오에 찬 카를의 시선이 천천히 리오넬에게 향했다. 리오넬 역시 환하게 웃으며 아델을 보고 있었다. 마치 신이 내린 한 쌍처럼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누군가가 심장 언저리에 딱딱하고 차가운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만 같다. 멍하니 넋을 놓았던 카를이 다시 아델을 바라보았을 때, 우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제를 본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옅어진다. 옅어지다 사라진다. 등 뒤로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찌릿한 느낌에 카를은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16553297094462.jpg‘아니지, 아델라이드. 너는 나를 보고 웃어야지! 너는 나의 황후니까!!’

  * * * 황제는 뷔에타에서 돌아온 이들을 굳은 얼굴로 맞이했다. 물론 그는 황제였기에, 그조차도 근엄해 보였다. 황제는 돌아온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사상자들에 대해서는 애도를 표했다. 아델과 데스포네 공작을 비롯한 황궁 앞에 모인 모두가 황제에게 예를 표함으로써 길었던 뷔에타 여정이 끝났다. 그러나 달아오른 절정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카를의 시선은 멀어지는 아델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데스포네 공작이 다가와 은밀히 말을 걸었다.

16553297094474.jpg“폐하, 독대를 청합니다.”

  * * * 황후의 귀환 소식을 들은 긱스 부인은 재빨리 목욕물을 데우고, 침실에 그녀가 좋아하는 향을 피우며 황후를 맞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저 멀리 황후의 모습이 보이자 긱스 부인은 한달음에 달려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16553297094477.jpg“어서 오십시오, 황후 폐하.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델은 허리 숙인 노부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16553297065291.jpg“잘 지냈소?”

할 말이 많았으나, 긱스 부인은 주름진 얼굴을 부드럽게 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3297094477.jpg“야위셨군요.”

황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긱스 부인은 황후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두 눈을 시퍼렇게 빛냈다.

16553297094477.jpg“안 되겠습니다. 주방장에게 일러 사이사이 간식을…….”

16553297065291.jpg“적당히 주시오, 적당히.”

황후가 말을 잘랐으나, 긱스 부인의 눈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16553297094477.jpg‘세상에. 얼마나 고생하셨으면, 손가락에도 살이 빠지신 것 같군!’

아델이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동안, 긱스 부인이 부른 시녀들이 황후의 뭉친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뜨끈하고 노곤한 감각에 취해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푹신한 침대 위였다.

16553297065291.jpg“아……, 이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천근처럼 느껴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세상이 어슴푸레하게 어두웠다. 깜빡 잠이 들어 몇 시간을 내리 잔 모양이었다.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긱스 부인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는 아델을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왔다.

16553297094477.jpg“깨어 계셨군요.”

16553297065291.jpg“무슨 일 있소?”

황후의 물음에 긱스 부인은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16553297094477.jpg“황제 폐하께서 와 계십니다.”

긱스 부인은 ‘황제’라는 말에 황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한데, 침의 차림이던 아델이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춰 입기도 전에 별안간 문이 열렸다.

16553297094477.jpg“황제 폐하!”

침실 곳곳에 불을 밝히던 긱스 부인이 놀라 뒤돌았고, 시녀의 도움으로 머리를 묶고 있던 아델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어둡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아델을 쏘아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16553297065291.jpg“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델이 책망하듯 날카롭게 묻자, 카를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어 있었다. 황제인 그의 품이 가장 편안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그녀를 보냈다. 한데 그녀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공을 쌓고 기사들까지 모조리 제 편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리오넬 발드르가 그녀의 침실 앞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는 말을 들었을 땐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황후궁을 찾아온 참이었다. 카를의 시선이 아델의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져, 얇은 침의에 닿았다. 얇은 침의 사이로 투명한 피부가 보였다. 지극히 사적인 모습이었다. 이 모습을, 그자도 봤을까? 머리 한구석을 자꾸만 맴도는 음험한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카를은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3297094462.jpg“단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마주하면 어떠한가?”

그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16553297094462.jpg“내가 그대의 남편 아닌가?”

그래서일까? 그는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몽롱한 기운이 아침 이슬처럼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아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황제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갈구하며 한없이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아델은 풀린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내리며 긱스 부인에게 명령했다.

16553297065291.jpg“부인, 시녀들을 데리고 잠시 물러나시오.”

긱스 부인은 아델의 명령이 떨어지자 들고 있던 등불을 조심스럽게 걸어 둔 뒤 문밖으로 나갔다. 시녀들도 잰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고, 이내 조심스럽게 문이 닫혔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더 느긋한 자세로 뒤로 기대었다. 눈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황제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마주 일어나 인사를 하지도 않는 방자한 모습이었으나, 카를은 그 무엇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숨 쉬는 것마저 잊은 것처럼 홀린 듯 아델을 바라볼 뿐이었다. 얇은 침의 차림의 그녀는 무방비하고 은밀했다. 불빛 머금은 금빛 눈동자와 붉은 입술에서 관능적인 향이 요동치는 듯했다.

16553297065291.jpg“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귓바퀴를 타고 흐르는 아델의 음색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델은 놀라 눈을 치켜떴다.

16553297065291.jpg“!!”

의자 앞까지 다가온 황제가 한쪽 무릎을 천천히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것이다. 붉은 기가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가 맹목적으로 아델을 담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각인하듯 하나하나 뇌리에 새겼다. 이 예쁜 눈을 초승달처럼 휘어 웃으면 홀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이대로 꽁꽁 묶어 가두고 싶은 욕구가 불쑥 치솟았다. 그녀가 없던 낮과 밤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질문을, 그는 결국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것은 아델의 예상을 빗나가는 물음이었다.

16553297094462.jpg“그곳에서, 리오넬 발드르에게 시중을 맡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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