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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황후를 찾아온 테세우스 (69/127)

69화. 황후를 찾아온 테세우스2021.11.27.

그날 오후, 예정된 중신회의가 시간에 맞춰 열리자 귀족들이 삼삼오오 회의장으로 몰려들었다.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발드르 형제와 함께 사이좋게 입장하여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은 그랜드 공작이었다. 그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대지주로서, 언제든 중신회의에 참석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맞은편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엘리자베타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획 돌렸다. 그는 예전부터 선대 황후의 성격을 쏙 빼닮은 조카를 몹시도 못마땅해했다. 뷔에타 건부터 시작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가뜩이나 황후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질 지경인데, 엘리자베타까지 돌아오다니! 이윽고 황제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중신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카를은 곧장 리오넬을 쏘아보았다. 반드시 저자를 황후의 옆에서 치워 버리리라 다짐하며 시선을 돌리던 차에, 익숙한 자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황제와 엘리자베타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선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진 듯했다. 엘리자베타까지 동원한 발드르 공가가 무엇을 요구할지 불 보듯 뻔했다. 간밤에 잠들지 못했던 여파까지 겹치자, 회의를 시작도 하기 전부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카를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이윽고 중신회의가 시작되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마법사단의 공적을 치켜세웠는데, 황후나 리오넬을 중심으로 한 기사들의 성과를 최소한으로 깔아뭉개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결국, 다른 사람이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떠드는 공작의 작태를 보다 못한 엘리자베타가 말허리를 자르며 나섰다.

16553297714588.jpg“데스포네 공.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지 알겠으니, 인제 그만하시지요.”

데스포네 공작이 엘리자베타를 극도로 꺼리는 것은 바로 이렇게 거리낄 것 없이 과감하고 직선적인 언행 때문이었다. 공작이 화가 난 듯 눈을 부라렸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그의 장황한 말을 한 문장으로 일축해 버렸다.

16553297714588.jpg“마법사단의 공적이 대단하다, 이 말이 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발드르 공가 쪽 사람들이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16553297714599.jpg“커흠흠!”

16553297714588.jpg“한데 왜 마법사단의 이야기만 지겨울 정도로 하시고, 황후 폐하와 기사들의 공적은 한 말씀도 없으신가요?”

16553297714599.jpg“물론, 황후 폐하와 기사들도 열심히 힘을 보태긴 했지요! 하지만 그 거대한 2급 탑을 한 방에 박살 낸 마법사들과 비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16553297714588.jpg“그래요? 물론 마법사들이 대단한 활약을 보여 주었지만, 저는 피해 정도가 굉장히 경미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요. 장관, 한 말씀 해 주시죠.”

리오넬이 엘리자베타의 말을 부드럽게 이어받아 전투의 진행과 피해 규모를 간략하고도 핵심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을 끝마치면서 덧붙였다.

16553297714618.jpg“황후 폐하께서는 에흐몬트의 마법사단이 알지 못하는 마법적 지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이 가져온 여파는 상당히 컸다. 레녹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데스포네 공작도 핏대를 세웠다.

16553297714623.jpg“어허! 장관!! 지금, 에흐몬트의 마법사들을 무시하는 것인가!!”

공작의 노성에도 리오넬은 여유로운 태도로 응수했다.

16553297714618.jpg“그런 뜻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때, 상황을 관망하던 황제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며 리오넬을 향해 입을 열었다.

16553297714633.jpg“해서, 국방부 장관. 그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리오넬과 황제의 시선이 첨예하게 맞물렸다.

16553297714618.jpg“황후 폐하께 중신회의 참석 권한을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데스포네 공작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16553297714623.jpg“그럴 수는 없지!! 역사상 황후께서 중신회의에 참석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자 엘리자베타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16553297714588.jpg“선례가 드물 뿐, 전무한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 안 된다고만 하십니까?!”

16553297714623.jpg“뭐라?!”

16553297714588.jpg“우리가 몰랐던 마법적 지식을 알고 있다면, 마땅히 자문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두려워서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겁니까?”

16553297714623.jpg“엘리자베타 울리히! 예의를 지키지 못할까!”

16553297714588.jpg“저는 충분히 예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숙부!!”

엘리자베타와 데스포네 공작이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사이, 발드르 공작쪽 사람들도 엘리자베타의 기세를 이어받아 목소리를 보태기 시작했다.

16553297731782.jpg“그랜드 공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황후 폐하의 중신회의 참석을 반대할 별다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와글와글 소란해진 장내를 둘러보던 테세우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테세우스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3297731782.jpg“발드르는 황후 폐하의 중신회의 참석을 적극적으로 요구합니다, 폐하.”

리오넬이 그의 뒤를 이었고, 엘리자베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수십 명의 중신이 테세우스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일어섰다. 묵직한 압박감이 밀려들자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카를의 표정도 굳어 들었다. 흘러드는 바다를 손바닥으로 막을 수 없듯, 제아무리 황제라도 수많은 이의 요구를 명분 없이 무시할 수는 없는 법. 황제는 결국,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델라이드 황후의 중신회의 참석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 * *

16553297714623.jpg“황후의 참석을 허락하시면 어찌합니까,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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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무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데스포네 공작이 화를 냈다. 카를도 참지 않고 되받아쳤다.

16553297714633.jpg“그럼 그 상황에서 다른 묘안이 있었단 말이오?!”

데스포네 공작은 황제가 못마땅해 미칠 지경이었다.

16553297714623.jpg“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절대로 황후를 뷔에타에 보내시면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그 결과가 어떤지 좀 보십시오!!!”

16553297714633.jpg“혹시 몰라 마법사단의 정예들을 모두 보내 주지 않았소? 도대체 얼마나 손을 놓고 있었기에 모든 공적이 황후 한 사람에게 몰린 거요?!”

황제의 반박에 화가 난 데스포네 공작은 거칠어진 숨을 씨근씨근 몰아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짜증스레 쓸어 올렸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16553297714623.jpg‘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황제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바라보자 데스포네 공작은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황제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3297714633.jpg“황후를 죽이고자 하셨소?”

무표정한 얼굴, 억양 없는 목소리. 예상을 뒤엎는 당혹스러운 질문에 데스포네 공작은 한순간 얼이 빠져 버렸다.

16553297714623.jpg“……뭐?”

16553297714633.jpg“아니오? 그럼, 디안 푸아티에인가?”

16553297714623.jpg“……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16553297714633.jpg“황후가 거슬리더라도, 감히 함부로 손대지 말라, 이 뜻이오. 그 여자는 내 것이니.”

황제는 한 걸음, 위협적으로 공작에게 다가갔다.

16553297714633.jpg“아델라이드 황후는 장차 에흐몬트 황제가 될 아이의 어미가 될 사람이고, 그 아비는 당연히 나지. 그러니 지금 저들끼리 손을 잡든 말든, 종국에 그 여자가 있을 자리는 오직 내 옆이 아닌가?”

데스포네 공작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뜻 고요하게 보였던 황제의 눈동자는, 자세히 들여다보니 끈적한 집착과 소유욕이 엉켜서 늪의 진흙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며 억울한 듯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16553297714623.jpg“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울리히 황가에 뼈를 묻은 제가, 황가의 안주인을 해하려 했다니요?! 도대체 이 숙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기에 그런 오해를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발드르 공가와 그랜드 공작이 손을 잡고 황후를 등에 업으려는 이 시점에 말입니다!!”

그러나 카를은 냉담한 의심을 끝까지 거두지 않겠다는 듯 답이 없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황제의 귓구멍에 대고 ‘그 여자가 작정하고 우리를 꺾으려 하잖아!!’라고 소리를 질러 주고 싶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데스포네 공작은 잠시 후, 독사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16553297714623.jpg“그리고 황후께서 폐하의 옆자리에 있다고 한들, 오른손으로는 폐하를 잡은 채 왼손으로는 리오넬 발드르를 잡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를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16553297714623.jpg“황후께서 적당한 때를 보아 보좌관을 파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제 생각에는 굳이 그럴 것 같지는 않더군요.”

16553297714633.jpg“그게 무슨 의미요?”

황제가 으르렁대며 묻자 데스포네 공작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16553297714623.jpg“그냥 그래 보였다는 겁니다. 뷔에타에 다녀오는 동안 살펴보니, 두 사람이 퍽 친근해 보이더군요. 아, 친근 정도를 넘어섰던가? 말씀드렸죠? 후작성에 머무는 동안 리오넬 발드르가 황후 폐하의 침실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고요. 더불어 황후께서도 깨시자마자 그를 찾았다고 하시더군요.”

카를은 리오넬 발드르를 향한 아델의 미소를 떠올리며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데스포네 공작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16553297714623.jpg“저는 울리히 황가의 충신입니다, 폐하. 부디 저를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는 유유자적이 황제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황제를 지옥으로 처박아 놓고. * * *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가 함께 황후궁을 찾았다. 긱스 부인은 여전히 그림처럼 근사하게 어울리는 두 공작을 보며 아쉬움을 눌러 삼킨 채 집무실로 안내했다. 아델이 문을 넘어 들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16553297767487.jpg“어서 오시오, 그랜드 공, 발드르 공.”

그리고 두 공작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잠시 두 사람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던 아델이 은근한 어조로 말을 던졌다.

16553297767487.jpg“중신회의가 끝났나 보군요.”

엘리자베타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16553297731782.jpg“다음 회의 때에는 함께 참석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델은 눈썹을 까딱이며 우아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16553297767487.jpg“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괜찮았습니까?”

엘리자베타가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긱스 부인마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한바탕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데스포네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16553297714588.jpg“반발이야 심했으나, 폐하의 참석을 막을 명분이 없으니 그들이 뭘 어찌하겠습니까?”

16553297767487.jpg“고맙습니다. 두 분 덕분이에요.”

황후의 말에 테세우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16553297731782.jpg“폐하의 공적 덕분이지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16553297767487.jpg“괜찮습니다.”

찻주전자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가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델과 엘리자베타가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테세우스가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아델에게 내밀었다. 아델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16553297731782.jpg“건강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에흐몬트에서 주로 사용되는 독을 가려낼 수 있는 검사지이니, 음식을 드시거나 차를 마실 때마다 사용하시면 됩니다. 다만, 은밀히 다뤄 주십시오.”

함에는 아델에게도 익숙한 종이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

16553297767487.jpg“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장관에게 이미 받은 참이었어요. 잘 가지고 있다가 유용하게 사용하죠.”

16553297731782.jpg“……리오넬이 이미 드렸습니까?”

테세우스의 물음에 아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엘리자베타가 부드럽게 끼어들며 인사를 건넸다.

16553297714588.jpg“그럼, 황후 폐하. 건강에 유의하시고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16553297767487.jpg“조심히 살펴 가세요, 그랜드 공, 발드르 공.”

테세우스는 아델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자베타와 함께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좀 전의 대화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황후에게 건넨 독 검사지는 발드르 공가에서 비밀리에 제조한 물품으로, 그 존재가 알려지면 독이 더욱 정교해질 위험이 있어 대대로 공가의 직계만 은밀히 사용했다. 따라서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 해도 쉽사리 외부인에게 건넬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테세우스도 수없이 고민하다가 신뢰의 의미로 가져온 참이었는데, 리오넬이 먼저 황후에게 독 검사지를 건넸다니. 심지어 황후는 그 의미도 모르는 눈치지 않은가.

16553297714588.jpg“장관이 그 종이를 황후께 드렸다니, 신뢰가 돈독한 모양이오.”

한때 발드르 공작부인이었던 엘리자베타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굳은 얼굴로 침묵하다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16553297731782.jpg“그랜드 공. 잠시 황후 폐하를 뵙고 가야겠으니 먼저 가시지요.”

엘리자베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테세우스는 몸을 돌려 황후궁으로 다시 들어섰다. 지난밤, 혼란스레 흔들리던 리오넬의 눈빛이 아직 생생했다. 이미 스스로 갈무리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깊어진 것일까. 하지만 리오넬이 끊어 낼 수 없다면, 황후가 끊어 주면 될 일이다. 그편이 황후와 리오넬 서로를 위해 좋았다. 테세우스는 결연한 눈빛으로 해야 할 말을 고르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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