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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보좌관직을 사임해도 좋아 (70/127)

70화. 보좌관직을 사임해도 좋아2021.11.30.

아델은 다시 돌아와 독대를 청하는 테세우스가 의아하였으나, 흔쾌히 그의 요청을 허락했다. 테세우스는 맞은편에 앉은 황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후를 대하기에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아델은 언짢은 기색은커녕 도리어 그 기회를 틈타 그를 마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참아 내기 힘든 적막감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가라앉았으나, 두 사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황후를 마주하자 테세우스는 리오넬이 어찌하여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통감했다. 황후는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강렬한 빛처럼, 순식간에 상대방을 사로잡았다. 테세우스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16553297878151.jpg“무례를 용서하십시오.”

16553297878157.jpg“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명확하게 하세요. 난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황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테세우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16553297878151.jpg“좀 전 제가 드린 독 검사지는, 실은 공가 직계에게만 허락된 비밀스러운 물건입니다. 아무리 친근해도 웬만해선 외부인에게 건네줄 만한 물건이 아니지요. 오늘 저는 폐하께 신뢰의 의미로 발드르 공가를 대표하여 드린 것이고요.”

테세우스의 말에 아델은 아차 싶었다.

16553297878157.jpg“일전에 장관에게 받은 독 검사지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앞으로도 그 부분을 조심하지요.”

16553297878151.jpg“곤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함부로 노출하지 않을 뿐, 외부인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될 것은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다만,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테세우스가 말끝을 흐리자 아델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어떤 말도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16553297878157.jpg“발드르 공.”

16553297878151.jpg“죄송합니다. 음…….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말입니다. 비록 서로의 이득을 위해 발드르 경이 보좌관직에 응했더라도, 황후 폐하께 충분한 신뢰가 없었다면 아마도 독 검사지를 선물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델은 테세우스의 본심을 예리하게 살피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했다.

16553297878157.jpg“장관과 발드르 공께는 늘 많은 신세를 지고 있어요. 나 또한 장관에 대한 신뢰가 두텁습니다.”

16553297878151.jpg“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오나,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이 되면, 폐하께서도 더 이상 보좌관이 필요치 않으실 때가 오실 겁니다.”

16553297878157.jpg“…….”

16553297878151.jpg“발드르 경이 보좌관직에서 물러나도, 발드르는 언제나 폐하를 위해 물심양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리오넬의 형으로서 부탁드립니다. 부디 어느 순간이고 그의 명예를 지켜 주십시오.”

테세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고개를 숙였다.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진심이 얇은 장막 너머로 보일 듯 말 듯했다. 그리고 아델은 그것을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그저 간단히 수긍하면 될 일이건만, 왜 목이 막힌 듯 한마디 말을 내뱉는 것이 어려운지. 아델은 온몸의 힘을 쥐어짜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16553297878157.jpg“당연한 말입니다. 걱정 마세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미소는 지을 수 없었다. * * * 테세우스가 돌아간 뒤에도 아델은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테세우스의 에둘러 한 말의 뜻은 분명했다.

16553297878151.jpg‘리오넬 발드르가 보좌관이 아니어도 발드르 공가는 폐하를 지원할 것이니, 그의 명예를 생각하여 적당한 시점에 보좌관에서 파해 주십시오.’

한데 그 말을, 왜 리오넬이 아닌 그녀에게 와서 했을까.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랍을 열어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에 비친 여자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아델은 깊고 긴 숨을 내쉬며, 늘 머리 한끝을 채우고 있는 그 날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얼굴만이 시야를 꽉 채우던 밤, 늘 단정하던 눈빛은 흐트러진 채 그녀를 담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 움푹 들어간 깊은 눈, 베일 듯한 콧날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찰나, 숨결이 가까워졌다. 그때 번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왜, 그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가왔을까. 어째서 고개를 돌리면 늘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일까, 왜……. 그리고 어찌하여 그녀는 그를 떠올리며 ……들뜨는가. 어쩌자고 이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아델은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긱스 부인이 조용히 들어와 또 다른 방문객이 있음을 알렸다.

16553297906158.jpg“황후 폐하, 보좌관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아델은 숨을 참으며 얼른 거울을 꺼냈다. 그리고 제 얼굴색을 찬찬히 살핀 다음 다시 여유로운 태도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긱스 부인이 밖으로 나간 사이, 아델은 손에 쥐고 있던 케이스를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서랍을 그대로 닫으려다 말고 잠시 고민하다가 케이스를 도로 꺼냈다. 인기척이 들리자 가슴이 묘하게 술렁였다. 아델은 작게 숨을 고르며 서랍을 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16553297878157.jpg“…….”

하지만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려던 것이 무색하게도 아델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 올려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휘어진 눈가에 맺힌 다정함에 아델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리오넬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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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329790617.jpg“황후 폐하.”

아델은 눈을 내리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렁이는 가슴을 꾹 누르며, 케이스를 쥔 손에 힘을 줬다.

16553297878157.jpg“어서 와.”

1655329790617.jpg“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아델의 태도를 눈치챈 리오넬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조심스레 그녀의 낯빛을 살피는 시선에 뺨이 간지러웠다. 아델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16553297878157.jpg“아니. 별일 없었어.”

아델은 눈을 뜨고 시선을 들었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 가득 걱정과 염려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델은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16553297878157.jpg“방금 발드르 공과 그랜드 공이 다녀갔어. 중신회의에서의 일을 말해 주던데. 그러고 보니 아까 그들과 함께 오지 않고?”

1655329790617.jpg“잠시 관저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참이었습니다. 중신회의에 참석하실 수 있다는 소식도 들으셨겠군요.”

16553297878157.jpg“그렇지. 아까 두 사람에게도 말했는데, 다음 중신회의에선 칼뱅 백작 영지의 일을 공론화시키고 싶어.”

1655329790617.jpg“관련 자료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델의 태도와 어조가 가벼워지자 리오넬도 다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아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16553297878157.jpg“아까부터 왜 자꾸 웃어?”

그러자 리오넬이 눈썹을 기울이며 받아쳤다.

1655329790617.jpg“언제는 제가 자꾸만 인상을 쓴다고 싫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16553297878157.jpg“내가 언제 그랬어?”

1655329790617.jpg“그때 저더러 인상 좀 그만 찌푸리라고 하셨잖습니까.”

16553297878157.jpg“찌푸리면 주름 생긴다고 하지 말랬지. 말 돌리지 말고, 왜 자꾸 웃냐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리오넬인 싱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1655329790617.jpg“제가 웃는 것이 싫으십니까?”

16553297878157.jpg“어?”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아델은 멍하니 되물었다. 리오넬은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다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폭풍이 내려치는 검은 밤바다처럼, 그의 눈동자는 깊은 곳에서 출렁이고 있는 듯 보였다. 아델은 그의 두 눈 가득 일렁이는 이름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대답을 요구하듯 침묵하는 그에게 아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16553297878157.jpg“아니.”

그러자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리오넬이 눈을 길게 휘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휘어진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가지런한 치아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홀린 것처럼 그 미소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던 그녀는 잠시 잊고 있던 케이스의 존재를 상기했다. 아델이 케이스를 바라보자, 그녀의 시선을 좇던 리오넬도 그것을 발견했다.

1655329790617.jpg“어…… 제가 드린 것 아닙니까? 검사를 하실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16553297878157.jpg“아니, 그건 아니고…….”

아델은 리오넬과 눈을 맞추었다.

16553297878157.jpg“리오넬.”

1655329790617.jpg“말씀하십시오.”

16553297878157.jpg“이거 아무나 주면 안 되는 거라면서?”

당황한 듯 눈을 커다랗게 뜨는 리오넬의 모습을 보니 괜한 장난기가 치솟았다. 아델은 씩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16553297878157.jpg“발드르 공이 그러던데. 웬만해선 외부인에게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거라고.”

1655329790617.jpg“……금기사항은 아닙니다.”

16553297878157.jpg“그래? 공가의 가주도 고민하다가 선물하는 거라던데?”

1655329790617.jpg“발드르 공께서도 검사지를 선물하셨습니까?”

16553297878157.jpg“응. 은밀히 사용해 달라고 하더라. 경도 내게 눈에 띄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했어야지. 내가 멋도 모르고 남들 앞에서 함부로 사용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1655329790617.jpg“제가 뭔가 대단한 것을 주는 것처럼 말했다면, 받으셨겠습니까?”

16553297878157.jpg“…….”

1655329790617.jpg“어차피 독 검사지는 가문 내에서 제가 맡아 제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문이 나거나, 시중에 유통되는 독이 바뀌면 검사지도 신속하게 바뀔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16553297878157.jpg“…….”

아델은 리오넬의 단정한 얼굴을 물끄러미 훑어보다가 말했다.

16553297878157.jpg“중신회의에서 발드르 공과 그랜드 공이 나의 참석을 주장했으니, 이제 사람들은 나와 두 공작 가문을 연관 짓게 되었겠지.”

아델의 말을 경청하던 리오넬이 얼어붙었다. 이어질 말이 두려워서 숨을 삼키는데, 황후가 잔인하리만치 무감정한 어조로 담담히 덧붙였다.

16553297878157.jpg“리오넬, 나는 그대를 보좌관으로 두어 얻고자 했던 것을 이미 얻었다. 그대 또한 그렇지 않은가 싶어.”

1655329790617.jpg“…….”

16553297878157.jpg“그러니 그대는 이제 적당한 시점을 보아 보좌관직을 사임해도 좋다.”

온몸의 피가 발아래로 쏟아져 버린 듯한 오싹함에 리오넬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내쉬는 숨이 어찌나 차게 느껴지는지 오한이 밀려들었다. 동요를 숨기고 싶은데, 도저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자신이 없었다. 리오넬은 시선을 낮게 깔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1655329790617.jpg“……왜 갑자기…….”

16553297878157.jpg“그대가 어찌하여 보좌관이 되었는지,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어. 각자의 이득이 충족되는 선에서 보좌관직을 내려놓는다면, 깎이는 명예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을 거야.”

1655329790617.jpg‘명예의 무게.’

리오넬은 입술 끝을 세게 짓씹었다. 그녀의 배려가 잔혹하게 가슴을 헤집는 것만 같다.

1655329790617.jpg“폐하께서는 아직 원하시던 목적을 다 이룩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16553297878157.jpg“…….”

그는 불쑥 고개를 들어 아델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남자의 눈이 아델을 삼킬 듯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1655329790617.jpg“이 땅이 지옥 같다던 말씀이 제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16553297878157.jpg“…….”

1655329790617.jpg“이제 막 걸음을 떼어 기울어진 추를 간신히 움직여 볼 참입니다. 저는 폐하의 곁을 더 지키겠습니다.”

16553297878157.jpg“……리오넬.”

1655329790617.jpg“폐하께서 모두 이룩했다는 판단이 드신다면, 그때 제 보좌관직을 파하겠다 명령해 주십시오.”

경은, 어째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그를 바라보는 아델의 얼굴도 천천히 일그러졌다. * * * 리오넬은 도망치듯 황후궁을 벗어났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가 어찌나 높은지, 지금 제가 어떤 얼굴과 눈빛을 하고 있는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휘둘렸다. 날카롭게 벼려졌던 이성은 황후라는 존재 앞에 무뎌지고 무뎌져, 한마디 말과 한 줌 눈빛에도 들떴다가 나락으로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아무도 없는 길가에 서서 리오넬은 제 그림자 속에 파묻혀 고개를 숙였다. 거칠게 출렁이던 감정이 가라앉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뺨을 스쳤다. 리오넬은 뜨거운 가슴이 좀 차게 식길 바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황후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동요하는 제 모습이 한심하고도 처량했다. 리오넬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1655329790617.jpg‘지금 그만두는 것이 현명한가? 나는 후회하지 않을까?’

테세우스의 말대로 이 관계의 끝은 어차피 정해져 있다. 그리고 황후는, 평생을 황족으로 살아와 황족으로서의 품위와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리오넬은 다짐했다. 감히 황후를 연모한 제 마음을 충성으로 해소하기로. 오늘처럼 말 한마디에도 휘둘리는 날이 무수히 반복되겠지만, 마음이 해지고 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충성만 남지 않을까. ‘아, 내가 한때 저렇게 고귀한 분을 연모했었지.’ 하고 회상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리오넬은 늘 그래 왔듯 후회하더라도 걷고 싶은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다만,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보던 형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1655329790617.jpg“이제 때가 된 것 같군.”

리오넬은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옹송그렸던 어깨를 펴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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