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헤르베르트 후작2021.12.04.
집무를 보고 있던 테세우스는 갑작스러운 리오넬의 독대 요청에 표정을 굳혔다.
“모두 잠시 나가거라.”
마이클 로젠을 비롯해 집무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가신들이 공작의 명령에 하던 일을 멈추고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황량한 집무실에서 형제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리오넬은 테세우스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언뜻 화가 난 듯한 형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허리 펴고 고개 들어.”
리오넬이 다시 고개를 들자, 테세우스는 책상을 짚으며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갑작스럽게 웬 사과야.”
“허락도 없이 공가의 물건을 함부로 황후 폐하께 드린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웃기지 마. 나한테 사죄할 것이었다면 애초부터 선물하지도 않았겠지!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형님.”
“…….”
“미루고 미뤘던 작위 승계를 받고자 합니다.”
“……!”
선대 공작은 죽기 전, 자기가 가지고 있던 헤르베르트 후작위와 영지를 리오넬 앞으로 남겼다. 다만, 선대 공작이 타계했을 때는 리오넬이 성년이 아니었으므로, 승계가 미뤄진 것이었다. 테세우스는 늘 리오넬에게 후작위를 승계받고 입지를 다지라 권했지만, 리오넬은 같은 공저에 머물며 일을 돕는 것이 편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 왔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금 이 시점에서 승계를 받겠다고 말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건 원래 네 것이니 내게 사과할 필요 없잖아?”
“…….”
“리오넬!!”
“보좌관직은 사임하지 않겠습니다.”
리오넬의 선언에 테세우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사임하지 않겠다고? 그 자리가 영원할 줄 알아?!”
“압니다. 언젠가는 내려놓을 자리라는 것을요.”
“그런데?!”
“다만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다.”
테세우스는 책상을 돌아 나와 리오넬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네가 보좌관이 아니어도, 발드르는 황후 폐하를 물심양면 도울 거다. 그분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혹시 황후께서 만류하시더냐?”
“아니요. 사임하라고 하시더군요.”
답하는 리오넬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허망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에 테세우스는 숨이 턱 막혔다. 리오넬은 이내 결심한 듯 단단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의 팔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정중하게 말했다.
“발드르 공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하는 것으로 보여?!!”
폭발하듯 화를 내는 테세우스에게 리오넬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저는 지금 누구보다 저를 위한 길을 걷는 중이니.”
“……널 위한 길이 도대체 뭔데?!”
리오넬은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테세우스의 손을 잡았다.
“형님. 파국으로 치닫는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제 몸을 태우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가진 생각이 제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그저 곁을 지키고 싶은 것뿐입니다.”
“…….”
테세우스는 할 말을 잃고 황망한 표정으로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리오넬은 잡았던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헤르베르트 후작위 승계를 부탁드립니다, 발드르 공작 전하.”
* * * 에흐몬트 법률상, 공작은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자기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작위와 영지를 혈족에게 승계할 수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황제가 수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발드르 공작은 공저 내에서 간결한 절차를 거쳐 리오넬에게 헤르베르트 후작위와 영지를 승계했다. 공제였던 리오넬 발드르가 리오넬 헤르베르트 후작이 되었다는 소식은 금세 에흐몬트 사교계에 퍼졌고, 아델에게까지 전해졌다.
“오늘 갑자기 헤르베르트 후작이 되었다고?”
아델의 머리카락을 빗으로 부드럽게 빗어 내리며 긱스 부인이 답했다.
“꽤 오래 미루시더니, 갑작스럽게 승계를 받으셨군요.”
“…….”
“…….”
두 사람은 그 뒤로 말이 없었다. 긱스 부인은 비단부채같이 섬세한 속눈썹 아래 감춰진 황후의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되짚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엉킨 곳 없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하릴없이 계속 빗어 내리며, 부인은 묵묵히 황후의 뒤를 지켰다. 비록 가까이에서 리오넬을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긱스 부인은 오랜 세월 황궁에서 지내며 표면적으로나마 그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오늘 황후궁을 나서던 리오넬 발드르의 표정은 단언컨대 긱스 부인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잠식당한 듯했다. 도대체 황후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가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 그리고 왜 갑자기 그동안 미루고 있던 작위를 승계받은 것일까? 관록의 노부인은 불쑥 드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눈치챘으나 모른 척 황후의 어깨에 따뜻한 담요를 덮어 주고 차 한 잔을 쥐여 준 뒤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날 밤. 아델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바람이 부는 들판에 서서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물결치는 들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펄럭인다. 시선을 내리자, 자수 하나 없는 면 치마가 보인다. 끝단에 꽃물이 든 치마는 생전 입어 본 적 없는 소박한 것이지만, 그저 웃음이 났다. 탁 트인 들판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그때, 들판 저 먼 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델의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들꽃을 툭툭 꺾어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소박한 치맛자락을 쥔 뒤에 그를 향해 달렸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검푸른 머리카락과,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동자. 아델은 있는 힘껏 그를 불렀다.
‘리오넬!!!’
아델은 눈을 번쩍 떴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둠에 익숙하진 시야로 금이 자잘하게 박힌 화려한 천장이 보인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고일 새도 없이 넘쳤다. 넘치고 넘친 눈물이 귓구멍으로 쏟아지자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졌다. 시간이 뚜벅뚜벅 느린 걸음을 걷는 밤, 아델은 제가 왜 우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울었다. 흐느낌이 튀어나오자 이불을 뒤집어썼다. 먹먹한 어둠이 가슴에 새어들었다. 손에 쥔 이름 모를 들꽃 몇 송이. 자수 하나 없는 소박한 면 치마. 그리고 그가 있었다. 비록 꿈이었으나, 그 다정한 미소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델!!’
넘치는 애정을 가득 담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도. * * * 새벽녘에 잠을 설쳤지만, 아델은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어제에 이어 열릴 중신회의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간결하고 깔끔하게 꾸며 주시오. 머리카락은 틀어 올리는 것이 좋겠군.”
긱스 부인은 열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황후의 몸단장을 진두지휘했다. 이윽고 단장을 마친 모습은 그녀를 치장했던 시녀들조차 감탄할 정도로 근사했다. 긱스 부인이 흐뭇한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습니다, 폐하.”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우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황후 그 자체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보자, 꿈속에서 입고 있던 면 치마가 불현듯 떠올랐으나 아델은 상념을 뒤로 밀어냈다.
“수고 많았소. 너희들도 수고했다.”
디안 푸아티에가 보낸 시녀들은 이제 상아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아델은 그녀들에게 비밀스러운 일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지금 몇 신가?”
“여덟 시 오십 분입니다.”
“그럼 곧 올 때가 되었군.”
아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긱스 부인이 재빨리 문을 열자, 시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알렸다.
“그랜드 공작, 발드르 공작과 헤르베르트 후작이 만남을 청하였습니다, 황후 폐하.”
‘리오넬 헤르베르트…….’
단어가 영혼을 품으니 그것은 마법이라. 아델은 그 이름을 입속으로 가만히 굴려 보다가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 * *
“황후 폐하 드십니다.”
긱스 부인이 황후의 입장을 고하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긱스 부인이 옆으로 물러남과 동시에 황후가 물 흐르듯 우아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럽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지적으로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매혹적이면서도 우아했다.
“밤새 편안하셨습니까, 황후 폐하.”
“물론입니다.”
아델과 엘리자베타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자, 뒤이어 테세우스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델이 두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리오넬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아델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리오넬은 정중히 예를 올렸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발드르 경이었는데, 오늘 아침엔 헤르베르트 후작이 되었구려. 축하하오, 헤르베르트 후작.”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자, 모두들 잠시 앉으세요.”
둥근 탁자에 모여 앉은 네 사람은 리오넬이 꺼낸 칼뱅 백작령 관련 자료를 살펴보며 오늘 중신회의에 대해 논의를 이어 갔다.
“분명 데스포네 공작이 푸아티에 백과 함께 반쯤 억지를 부릴 겁니다.”
리오넬의 진지한 말에 엘리자베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본 적이 없는 아델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테세우스와 리오넬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엉뚱한 마법적 지식을 동원한다면, 내가 조목조목 반박하면 되니 너무 걱정 말게.”
아델의 말에 엘리자베타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지금껏 수세에 몰렸던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오늘, 필요하신 만큼 마음껏 발언해 주십시오.”
“걱정은 내려놓게.”
두 여자가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씩 웃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테세우스와 리오넬도 서로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두 여인이 오늘 기어코 중신회의를 휩쓸어 버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