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데스포네 공작의 음모 (73/127)

73화. 데스포네 공작의 음모2021.12.11.

데스포네 공작의 단언에 공허하던 황제의 눈빛이 선득해졌다.

16553298482974.jpg“안 돼!”

16553298482985.jpg“황후를 없애지 않으면, 허수아비가 되는 쪽은 폐하이실 겁니다.”

16553298482974.jpg“내가 경고했잖소? 그 여자에게 손대지 말라고!”

황제의 일갈에도 데스포네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16553298482985.jpg“지금 저들은 황후의 마법적 지식과 엘리자베타의 신분을 구심점으로 모였습니다. 일단 황후만 끊어내면 저들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겁니다. 세력이 커지기 전에 먼저 손을 쓰셔야 합니다.”

16553298482974.jpg“…….”

16553298482985.jpg“폐하!”

데스포네 공작이 답답하다는 듯 황제를 부르자, 카를은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16553298482974.jpg“……고민해 보겠소.”

16553298482985.jpg“시간이 없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돌려 데스포네 공작을 노려보았다.

16553298482974.jpg“고민해 보겠다고 하지 않소!! 경고하는데, 내 허락 없이 그 여자에게 손을 댄다면 아무리 숙부라고 해도 가만있지 않을 거요.”

데스포네 공작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16553298482985.jpg“너무 오래 걸리시면 아니 됩니다. 곧 국경일이지요? 그날 한번 보십시오. 아마 황후 주변에 귀족들이 개떼처럼 몰려들 겁니다.”

16553298482974.jpg“…….”

16553298482985.jpg“그리고 설마 해서 여쭙습니다만, 오늘 일이 있었는데도 황후와 함께 입장하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그날 황후 주변에는 발드르 공가 사람들이 득실거릴 겁니다. 디안 푸아티에를 파트너로 대동하세요.”

카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16553298482985.jpg“폐하의 아이까지 가진 디안을 함부로 취급하신다면 폐하의 평판도 함께 떨어질 것입니다. 게다가 황후는 오늘 회의장에서 폐하께 큰 망신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황후에게 먼저 함께 가자 청하신다면 폐하께서 굽히고 들어가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16553298482974.jpg“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그만하시오.”

16553298482985.jpg“……그리고 고트로프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16553298482974.jpg“…….”

16553298482985.jpg“정 안 되면 고트로프에는 적당한 이를 황후 시해범으로 몰아 던져 주면 되니까요. 현명하게 생각하십시오.”

  * * * 중신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황후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살핀 긱스 부인이 결재를 받으려던 서류를 숨기며 물었다.

16553298497879.jpg“괜찮으십니까?”

16553298497883.jpg“……괜찮소.”

긱스 부인은 얼른 차를 끓였다. 아델은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길고 긴 한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16553298497883.jpg“칼뱅 백작이 영지를 포기했다고 하는군.”

그 말에 긱스 부인은 잠시 찻주전자를 꺼내던 손을 멈추고 들릴 듯 말듯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서둘러 차를 우렸다.

16553298497883.jpg“작위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진배없지. 올해 배정된 세금을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하고.”

긱스 부인이 아델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16553298497883.jpg“고맙소.”

16553298497879.jpg“그날도 말씀드렸지만, 폐하께서는 하실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16553298497883.jpg“혹 칼뱅 백과 황제 폐하의 사이가 좋지 않았소?”

16553298497879.jpg“아뇨. 칼뱅 백작가는 대대로 황가에 충성을 바치기로 유명합니다. 권세를 누린 가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분란 없이 명맥을 이어 가고 있었지요.”

16553298497883.jpg“그럼 도대체…… 기준이 뭘까…….”

아델은 눈을 내리깔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데스포네 공작이 던졌던 말을 떠올렸다.  

16553298482985.jpg‘……탑은 탑을 부르고, 탑은 탑을 흡수합니다.’

16553298497883.jpg“그게 무슨 의미지?”

아델이 고트로프에서 탑을 파괴하는 방법에 몰두했다면, 데스포네 공작은 에흐몬트에서 탑을 이용하는 방법에 몰두했다. 무려 14년 동안이나. 분명, 공작은 그녀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으리라.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내느냐인데……. 아델이 고민에 잠긴 사이, 긱스 부인이 그녀 앞에 결재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델은 서류를 간략히 확인한 뒤 긱스 부인에게 감사를 전했다.

16553298497883.jpg“나 대신 국경일 준비를 한다고 고생 많았소.”

16553298497879.jpg“선대 황후 폐하 시절부터 늘 해 오던 일이라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기쁜 일이지요. 아, 그리고 서류 뒤편에 보시면 드레스 카탈로그가 있습니다. 한번 보시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주세요.”

부인은 싱긋 웃으며 서류를 공손히 내민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델은 긱스 부인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가 서류를 들고 책상으로 향하며 투덜거렸다.

16553298497883.jpg“탑 때문에 언제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깟 국경일이 다 무슨 소용인지.”

16553298545466.jpg

  * * * 한편, 황제가 상아궁을 다녀간 뒤로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디안도 국경일이 다가오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엔, 수도의 모든 귀족이 황궁으로 초청되어 연회를 즐긴다. 최근 3년은 그녀가 직접 국경일을 준비했기에 연회가 시작되면 마치 주인처럼 연회장을 누비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맘때 수도의 유명 의상실은 귀부인들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권세 있는 귀부인들에겐 수석 디자이너가 직접 드레스 카탈로그를 보내 우선적으로 선택권을 주곤 했다. 디안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3298545474.jpg“카탈로그가 왔겠네. 가져오렴. 지금쯤 골라야지.”

그녀의 말에 로레인은 난감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카탈로그를 들고 와 디안 앞에 내밀었다. 디안은 로레인이 건네는 카탈로그를 받아 들고는 천천히 넘겼다. 로레인은 숨을 죽이며 디안의 눈치를 보았다. 곧, 그녀가 화를 낼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디안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거친 손길로 책장을 넘겼다.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디안의 손이 덜덜 떨리더니, 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되물었다.

16553298545474.jpg“……지금, 감히 내게 이걸 보냈어?”

16553298545481.jpg“……예.”

로레인의 대답에 디안은 카탈로그를 와락 쥐더니 세게 던져 버렸다. 카탈로그가 날아가면서 무게감 있는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종이에는 각 디자인에 대한 우선 선호도를 기재해 달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지난 3년간, 디안은 우선 선호도 따위를 고려할 필요 없이 고르기만 하면 무조건 그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저 종이를 받았다는 것은, 의상실에서 디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이 있음을 의미했다. 그게 누구겠는가?! 디안은 두 눈을 이글거리며 배를 꼭 껴안았다.

16553298545474.jpg‘아가. 너는 꼭 아들이어야 한다. 꼭 아들로 태어나, 나를 황제의 어미로 만들어다오. 어미가 믿을 사람은 이제 너뿐이야.’

그러자 배 속 아기가 마치 알겠다는 듯 그녀의 배를 툭툭 치는 것 같았다. 배를 끌어안고 있던 디안이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16553298545474.jpg“아기가 움직였어!”

의원은 아직 태동을 느낄 시기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디안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16553298545474.jpg“그래, 아가. 난 너만 있으면 돼. 너만 있으면.”

배를 쓰다듬는 디안의 눈빛이 새파랗게 번득였다. * * * 아델이 한참 국경일 연회 준비로 바쁜 와중에 의외의 인물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것도 은밀히. 브룬힐 알렉사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로, 그 강렬한 색 덕분에 아델도 그녀를 쉽게 기억해 냈다.

16553298497883.jpg“내가 일전 마법사단을 방문했을 때도 자네를 만났던 것 같은데.”

16553298545481.jpg“예, 맞습니다.”

16553298497883.jpg“스트라이커 랭킹 2위에 기록되어 있는 인재더군. 만나서 반갑네.”

16553298545481.jpg“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델은 인사치레를 이어 붙이는 대신 브룬힐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분명 남들의 눈을 피해 찾아온 이유가 있을 터. 브룬힐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황후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16553298545481.jpg“진정 이 년 안에 제국 전역의 탑을 파괴하실 수 있으십니까?”

예기치 않은 곳에서 튀어나온 질문에 아델은 천천히 팔짱을 꼈다.

16553298497883.jpg“그렇다고 한다면?”

16553298545481.jpg“고트로프에서 탑 대항 본부를 창설하셨다 들었습니다. 더불어 고트로프 어디에도 탑이 잔존하지 않도록 하셨다 들었습니다. 데스포네 공작님과 대립하면서까지 하고자 하시는 일이, 혹 에흐몬트의 탑을 모두 파괴하는 것인지요?”

아델은 브룬힐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브룬힐은 황후의 침묵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어차피 황후를 찾아온 시점부터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뜻을 함께하는 마법사단 내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6553298545481.jpg“황후 폐하. 혹, 에흐몬트 전도가 있을까요?”

16553298497883.jpg“말을 하다 말고 전도는 갑자기 왜?”

16553298545481.jpg“먼저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결국 아델이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펼쳐 주자, 브룬힐은 그 위에 서슴없이 무언가를 그리며 표시하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은 곧 브룬힐이 표시하는 것이 탑과 마력반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표시를 이어 가는 브룬힐의 모습에 아델은 내심 감탄했다. 이윽고 펜을 놓은 브룬힐이 한 걸음 물러나자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지도를 전체적으로 살폈다. 마력반경까지 표시된 지도를 놓고 보자, 뭔가 규칙성이 보였던 것이다. 아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브룬힐을 바라보았다.

16553298545481.jpg“보이십니까?”

16553298497883.jpg“마력반경이 겹치는 곳에 상위 탑이 들어서는 것인가?”

16553298545481.jpg“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상위 탑이 들어서면, 그 주변의 하위 탑들은 자연적으로 사라집니다.”

16553298497883.jpg“그럼 그대는 이 작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황후의 물음에 브룬힐은 다시 펜을 들어 빠른 속도로 몇 군데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탑이 들어선 곳도 있고, 아직 탑이 들어서지 않은 곳도 있었다.

16553298545481.jpg“데스포네 공작은 제가 지금 표시한 곳에, 1급 탑이 들어서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브룬힐은 다시 펜을 들고 둥근 마력반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16553298545481.jpg“제국 전역이 마력반경에 들어옵니다.”

아델은 과거 데스포네 공작의 말을 떠올렸다.  

16553298482985.jpg‘제가 계획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마법사들은 비로소 온전히 힘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마법사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날이 오면, 마법사가 아닌 자들은 이등 인류가 될 거랍니다.’

  아델은 그 기가 막힌 계획에 실소하며 신랄하게 말했다.

16553298497883.jpg“마력을 자유자재로 쓰는 대신, 마수를 품고 살겠다?”

16553298545481.jpg“……황후 폐하. 제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폐하를 찾아온 이유는, 데스포네 공작이 가져오려는 지옥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델은 브룬힐을 바라보다가 다시 전도로 눈길을 돌렸다. 얼기설기 이어진 탑의 반경이 끔찍할 정도로 완벽하게 제국을 덮고 있었다.

16553298497883.jpg“이런 미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16553298497883.jpg“무려 십사 년 동안 탑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릴 방법을 고심했던 것이로군.”

아델이 다시 브룬힐을 마주 보자, 브룬힐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98497883.jpg“그대 이외에 이 계획을 반대하는 마법사들이 더 있는가?”

16553298545481.jpg“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오랜 기간 자료를 모아 알아낸 사실입니다.”

아델은 잠시 숨을 고르며, 이 일로 브룬힐이 얻게 될 이득이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했다. 혹, 데스포네 공작이 보낸 계략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브룬힐이 보여 준 자료는 작금의 현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델은 지도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16553298620848.jpg

16553298497883.jpg“이 자료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쉽고 간결하게 정리해 줄 수 있겠소?”

황후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브룬힐의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다. 오랜 기간,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브룬힐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3298545481.jpg“물론입니다, 황후 폐하.”

브룬힐이 돌아가자, 아델은 당장 목전에 닥친 또 다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집무실로 돌아왔다. 긱스 부인은 아델이 결재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델이 책상에 앉자 긱스 부인은 드레스 카탈로그를 가져오며 확인했다.

16553298497879.jpg“이 디자인으로 선택하신 것이 맞으시지요?”

16553298497883.jpg“그렇소.”

16553298497879.jpg“그럼 이 디자인을 황제 폐하께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두 분 의상이 세트처럼 보이도록 통일하기 때문입니다.”

16553298497883.jpg“…….”

한데 그 말을 들은 황후가 미간을 굳히며 침묵하자 긱스 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16553298497879.jpg“왜 그러십니까?”

16553298497883.jpg“……폐하는 함께 입장하지 않으실 것 같소.”

중신회의에서 황제는 대놓고 아델에게 자기를 무시했다며 화를 냈다. 그리고 수세에 몰린 데스포네 공작 또한 아델과 황제가 파트너로 사이좋게 입장하는 꼴을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황제는 디안 푸아티에와 입장하리라. 잠시 고민하던 긱스 부인이 재빠르게 대안을 제시했다.

16553298497879.jpg“그렇다면, 일단 이 디자인을 헤르베르트 후작저에도 하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께서 푸아티에 영애를 파트너로 대동하신다면, 황후 폐하께서도 홀로 입장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보좌관과 함께하신다면, 폐하의 위신을 지키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적당한 시점에 보좌관직을 사임하라 이야기한 것이 고작 며칠 전이건만, 또다시 이렇게 엮이다니. 제 동생의 명예를 지켜 달라던 발드르 공작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아델은 복잡한 심경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16553298497883.jpg“그리하시오. 내 직접 편지를 쓰겠소.”

16553298646456.jpg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