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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본분을 무시한 대가 (78/127)

78화. 본분을 무시한 대가2021.12.28.

황제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세게 물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의 동공이 짐승의 그것처럼 바짝 조여들었다. 심장이 폭주하듯 거칠게 뛰었으나 반대로 온몸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황후가 입은 오묘한 남색의 드레스에는 금사가 별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걷는 걸음마다 흔들리는 치맛자락은 밤의 장막 같았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달처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를 형상화한 드레스는 황후에게 녹아든 것처럼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그녀의 것과 유사한 디자인의 정장을 입은 리오넬이 있었다. 보폭을 맞추어 정중하게 황후를 에스코트하는 리오넬의 우아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귀부인들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후와 보좌관은 처음부터 한 쌍이었던 것처럼 어울렸다. 황제의 시선이 가볍게 맞잡은 두 사람의 손끝으로 향했다.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나타난 아델라이드의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잡아먹을 듯 날이 선 황제의 시선이 어찌나 노골적인지, 주위의 귀족들 모두가 숨죽이며 그들을 주시했다. 아델은 녹색 계열의 옷을 입고 나타난 황제와 디안을 번갈아 바라본 뒤, 황제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황후와 함께 인사를 올리는 리오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16553299835736.jpg“입장하시지요, 폐하.”

날아드는 서늘한 음성에 황제가 아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델은 굳게 닫힌 연회장의 문을 고집스럽게 바라볼 뿐, 카를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다. 카를은 턱에 힘을 주며 씹어뱉듯 명령했다.

16553299835742.jpg“문을 열어라.”

황제의 명령에 육중한 문이 서서히 입을 벌렸다. 이미 연회가 시작된 터라 열린 문틈으로 소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3299835746.jpg“황제 폐하, 황후 폐하, 헤르베르트 후작과 디안 푸아티에 백작 영애 드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넓은 연회장에 울려 퍼지자, 장내를 메우던 소음이 일제히 사라졌다. 악단도 연주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도착해 있던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도 문을 향해 몸을 돌렸고,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도 마찬가지였다. 데스포네 공작은 열린 문 너머로 황제가 보이자 과장되게 웃으며 외쳤다.

16553299835751.jpg“황제 폐하! 궁주님과 그림같이 잘 어울리십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오넬은 아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늘 그랬듯 담담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맞잡은 손끝에 단단하게 힘이 실렸다. 리오넬은 아델의 손을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아델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아델은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웃어 준 뒤 그의 손을 다시금 힘주어 잡았다. 황제가 디안과 함께 먼저 입장했다. 데스포네 공작은 연회의 주인인 양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고, 디안을 이끌고 친히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아기님을 가져 힘이 든 것이라는 둥, 힘든 걸음을 했다는 둥, 데스포네 공작이 장황히 디안을 치켜세우는 동안, 황후가 리오넬과 함께 입장했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 흐름에 데스포네 공작마저도 홀린 듯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가 앞으로 나와 황후를 맞이하며 인사를 주고받자, 귀족들의 눈이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 번쩍였다. 황제 부부가 각자 파트너를 대동하고 온 것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연회장은 하나의 거대한 정치판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황후와 인사를 하고 싶어 일제히 들썩이는 통에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는 뒷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굵직한 중견 귀족들마저 황후와 인사를 해 보고 싶어 흐름에 동참하자,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 진영은 상대적으로 텅 비어 보였다. 그 모습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데스포네 공작이 미간을 굳힌 채 성큼성큼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황좌에 앉아 황후를 노려보는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16553299835751.jpg“보이십니까? 지금은 그저 흐름일 뿐이지만, 곧 눈덩이처럼 뭉쳐져 거대하고 단단한 세력이 될 겁니다! 일주일? 아니, 당장 며칠만 지나도 그리될 거란 말입니다!”

빌어먹을 황후가 탑을 2년 안에 파괴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니, 탑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귀족들 모두의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16553299835751.jpg“그저 노려보는 것만으로 방법이 나옵니까?! 더 늦어서는 안 됩니다!”

데스포네 공작이 억눌린 목소리로 분통을 터뜨려도, 황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용암을 마신 듯 목구멍이 홧홧하고 가슴이 뜨거워진 데스포네 공작은 태풍의 눈처럼 인파 사이에 고고히 서 있는 황후를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16553299835751.jpg“폐하!”

데스포네 공작이 으르렁거리며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전히 황후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황제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마주친 시선에, 데스포네 공작은 반사적으로 눈썹을 굳혔다.

16553299835751.jpg‘……이것 봐라?’

집착과 욕망이 뒤엉킨 황제의 눈빛에 데스포네 공작마저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태풍의 눈 주위로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듯, 황후가 일으킨 폭풍이 황제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황제는 데스포네 공작을 빤히 바라보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16553299835742.jpg“저 흐름을…… 더는 두고 보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오.”

카를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델을 바라보았다. 홀로 고고히 빛나고 있는 나의 밤. 생각해 보니 사랑이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가지는 것이었다. 아니, 그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오넬 헤르베르트나 테세우스 발드르 같은 그녀 주변의 성가신 것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려야 했다. 아델을 뷔에타로 보낸 이유도 그녀를 온전히 가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델라이드는 보기 좋게 그 생각을 깨부쉈다. 고작 그 정도로는 그녀를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 그럼 어디까지 밀어 넣어야 너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가 있을까. 너에게서 무엇을 빼앗아야, 내 손을 잡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카를은 잔인한 결론을 내렸다. * * * 연회는 칼 대신 말과 눈빛이 난무하는 전쟁터였다. 밀려드는 파도를 노련하게 헤치고 나아가는 선장처럼, 아델은 귀족들을 능숙하게 상대했다. 리오넬도 보좌관으로서 아델의 옆을 지키며 그녀를 거들었고,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 역시 아델의 곁에서 유기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진영을 형성했다. 아델은 잠시 숨을 고르며 리오넬과 테세우스, 그리고 엘리자베타에게 속삭였다.

16553299835736.jpg“내일 오전에 잠시 황후궁으로 오세요. 보여 드리고 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6553299854202.jpg“알겠습니다.”

테세우스와 리오넬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들 주변을 기웃거리는 인파를 둘러본 엘리자베타가 단상 위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16553299854207.jpg“백성들의 안전을 볼모로 권력을 잡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짓이었는지, 황제도 지금쯤 깨달았겠지요. 오전에 가겠습니다.”

얼마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을까? 시종이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 황후에게 말을 전했다.

16553299835746.jpg“황제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아델은 반사적으로 황좌를 바라보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눈치 빠른 시종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16553299835746.jpg“테라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많은 시선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아델은 눈썹 한 올까지 신경 쓰며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3299835736.jpg“그렇군. 안내하게.”

16553299835746.jpg“예.”

시종이 서둘러 몸을 돌리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길을 만들었다. 시종을 따르기 전, 아델은 가까이에 있던 리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눈동자를 향해 보일 듯 말듯 작게 웃어준 뒤, 걸음을 옮겼다. 리오넬은 그녀의 뒷모습을 애타는 시선으로 좇았다. 막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제 처지가 가슴에 얹힌 돌이 되어 숨을 조여 왔다.

16553299854267.jpg“……리오넬.”

나직한 부름에 리오넬은 형을 바라보았다. 테세우스가 엄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젓자 리오넬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나 그의 온 신경은 굳게 닫힌 테라스 문 너머로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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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편, 시종과 함께 테라스 문 앞에 다다른 아델은 숨을 고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시종이 문을 열자, 문틈을 비집고 달려 나온 냉기가 아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잠시 온기가 돌던 손은 순식간에 마디 끝부터 차가워졌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펴고 테라스로 들어섰다. 황제가 칼로 에는 것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16553299835742.jpg“앉으시오.”

아델은 황제의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황제를 볼 때마다 그녀는 필연적으로 제 위치를 떠올렸다. 그것은 습관 같은 것이었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자, 화려한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궁도, 아름다운 드레스도, 대단한 명예도 없이 꽃물이 든 소박한 면 치마에 대충 꺾어 든 들꽃을 든 채 리오넬을 향해 달리던 꿈속 장면이 자꾸만 환영처럼 겹쳐졌다. 꿈속에서 아델은 황후도 무엇도 아닌 그저 한 여자였고, 리오넬 역시 보좌관도 무엇도 아닌 그저 한 남자였다. 우습고도 허무맹랑한 상상이다.

16553299835742.jpg“황후.”

머리 위로 떨어진 싸늘한 음성에 아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노골적인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은 그를 바라보며 생각을 다잡았다.

16553299835736.jpg‘우선, 데스포네 공작을 황궁에서 치워 내자. 황제가 그의 권력에 기대어 있는 형국이니, 틀림없이 황제도 힘을 잃으리라. 일단은 거기까지.’

바로 그때, 황제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한데 이번엔…….

16553299835742.jpg“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한 젖은 음성이었다. 아델은 도대체 황제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주시했다. 잠시 침묵하던 카를이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16553299835742.jpg“데스포네 공작을 밀어내 실권을 장악하고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면, 깃펜을 쥔 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소?”

16553299835736.jpg“…….”

16553299835742.jpg“저 많은 귀족이 그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충성을 다할 것 같소? ……아닐걸?”

카를은 매혹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3299835742.jpg“그대는 에흐몬트에 닻을 내린 배지. 그대가 아무리 고트로프의 황녀라 해도, 이곳 에흐몬트에서 황후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리오넬 헤르베르트가 아닌, 나와의 연결고리 때문이야. 그러니 지금 그대는 제 손으로 닻줄을 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오.”

16553299835736.jpg“지금 제가 오직 권력욕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델이 음산한 어조로 답하자, 카를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16553299835742.jpg“이건, 내 마지막 경고이자 부탁이오.”

16553299835736.jpg“…….”

16553299835742.jpg“이 년 안에 탑을 없앨 수 있다고 했던 말을 공식적으로 취소하시오. 더불어, 앞으로는 마법사로서 어떠한 의견도 제시하지 마시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자 아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3299835736.jpg“그리 못 합니다.”

16553299835742.jpg“그대는 언제나 그대의 생각만 관철하려 하는군. 오만하게도.”

16553299835736.jpg“저는 고작 제 취향을 폐하께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탑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면, 귀족들도 지금보다 진심으로 폐하를……,”

16553299835742.jpg“됐소. 지겹군.”

아델의 말허리를 툭 자른 황제가 언뜻 맥락에서 벗어난 듯한 말을 꺼냈다.

16553299835742.jpg“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 그대는 황후로서 가장 중요한 본분을 늘 무시하고 있소.”

그리고 입을 꾹 다문 아델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16553299835742.jpg“나는 경고했소. 거절한 것은 그대요.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 또한.”

시린 바람이 불어와 아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에 실린 기운이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 * * 황제는 그 길로 연회장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제 뒤를 따라오는 시종에게 명령했다.

16553299835742.jpg“지금 당장 신전에 연락하여 국혼을 주관했던 대신관을 불러들여라. 더불어 수석 재판관도 들라 해.”

아델라이드. 더 이상 황후가 아니게 된 후에도, 너는 그렇게 나를 거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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